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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080]
· 설교 일자 : 2010년 04월 18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8장 31~36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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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1~36절)

  어떤 사람이 산에서 새끼 산새를 잡아다가 자기 집에서 기르려고 새장 안에 넣었습니다. 새장 안에 갇힌 새끼 새는 밤새도록 울어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어미 새가 날아와 먹이를 물어다가 그 새끼 새에게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두 번 어미 새가 날아올 때마다 새끼 새가 그 먹이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새끼 새는 죽었습니다. 알고 보니 어미 새가 새장에 갖혀 울부짖는 새끼 새를 차마 못 보겠는지 독이 있는 먹이를 가져다가 죽게 한 것입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 페트릭 헨리의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 연설 마지막 말처럼, 어미 새는 자기 새끼 새에게 자유가 없느니 죽음을 택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짐승도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송아지는 꼬뚜레하는 것을 싫어하고, 강아지는 목걸이로 묶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각종 동물들이 철장 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합니다. 독일의 대학 영양학 연구팀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자유로운 상태에서 먹이를 주며 기른 닭이 닭장에 가두어 기른 닭보다 영양이 풍부한 달걀을 낳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닭뿐이겠습니까? 자유가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동식물들도 그것을 압니다. 인간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철학자들은 인간이 신을 믿는 한 자유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권위의 폐기를 시도했습니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전제군주의 권위, 또는 국가의 권위를 폐기했습니다. 신의 권위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사상이 불일듯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타난 인류의 사탄적 사상가가 칼 마르크스입니다. 마르크스는 신이 있는 한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해방은 이 의존을 물리침으로써 끝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을 자유의 기본 원리로 정한 공산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사상에 기초합니다. 사르뜨르라는 철학자도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선포하면서 신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근대 철학자들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무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도덕률도 폐기해야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을 노예로 만드는 전제군주를 없애버렸고, 종교적 인간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권위를 없애버렸고, 나아가서 인간을 얽매는 도덕률까지도 폐기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인간해방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상대로 인간은 정말 절대 자유를 누리고 행복해졌을까요? 이런 사상으로 만들어진 결과는 허무주의가 생겨났습니다. 사상 속에 하나님도 없고, 도덕률도 없으니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있을 수 없으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바르게 정립할 수 없는 사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생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며 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의 사상은 스스로 정신병자가 되거나 자살로 끝나고 맙니다. 절대 자유를 누리려고 했던 인간의 노력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파괴하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인간에게 구약의 전도서는 오래 전에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허무하다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헛되고,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전도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절대적인 자유란 없습니다.
절대자유, 즉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제한된 자유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시간이 흐르면 늙지도 말아야 하고, 나이를 먹어서도 안 되고, 그리고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여러분이 한 곳에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론상으로는 절대 자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실천적으로는 절대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도 절대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시험하거나 시험을 당하실 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자유는 완전한 자유’라고 세계적인 학자요, 저술가요 목사인 존 스토트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심으로 자유를 누리신다고 설명합니다. 설명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이런 본질에 맞게 행하심으로 그 안에서 진정하고 온전한 자유를 누리신다는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반대되는 일을 하신다면 그것은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 될 것이며, 따라서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유를 누리시기 위해서 죄를 지으신다든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사랑과 반대되는 일을 행하신다든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유로우시니 불의와 부정과 악을 행하신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이상한 거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길 수 있겠습니까? 본질과 존재 목적에 맞게 일치되는 일을 행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말입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새가 하늘에서, 나무가 땅에서 자유롭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목적을 부여받아 생명을 받았으며,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섭리안에 있어야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후반, 문인이고, 유명 방송인이며 그리스도인 연설가인 말콤 머거리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싶어했지만 결국 하나님께 추적당하여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하게 완전한 자유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써서 벌써 10만부가 팔린 이어령 박사, 전 문화부장관도 그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지성 안에서 자유를 누리려고 했고,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식인들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생각의 상자나 지식의 상자에서 해방되려는 노력을 합니다.” 지식에서부터 절대적 자유를 누리려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삶의 절망을 철저히 경험하면서 지성을 넘어선 영성에 접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정말 튼튼하고 영원한 끈에 끌려 다니고 싶습니다.”라며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했습니다.
  기차는 기차만이 달릴 수 있는 철로, 레일이 있습니다. 기차든, 지하철이든 탈선한 것을 보면 차량들이 고철 덩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수백 명의 여행객들을 싣고 힘차게 달리던 차량이 탈선하니까 꼼짝 하지도 못합니다. 기차가 자유롭고도 힘차게 달리려면 철도 위에 있어야 합니다. 좁은 길이라고, 또 매일 보는 지겨운 길이라고 벗어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철도는 기차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차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배에게는 해로가 있습니다. 비행기에게는 항로가 있습니다. 기차든, 배든, 비행기든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마음대로 다니면 잠깐 동안은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이윽고 문제가 생깁니다. 타고 있는 승객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지게 합니다. 기차는 레일 위에서 달릴 때, 배는 해로를 항해 할 때, 비행기는 항로로 날아갈 때 원하는 목적지를 갈 수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람은 사람이 가야할 길을 걸어갈 때 진정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노예선에 200여명의 노예들이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어느 날 백인들을 다 죽이고는 배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 중에는 배를 조종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유는 있었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원들이 나침반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기억하고는 나침반을 배 앞쪽에다가 놓고서 절을 하면서 고향으로 데려다 달라고 빌었습니다. 노예들은 자유는 얻었지만 자유를 누릴 지혜와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또다시 자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1절, 32절에,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를 모르면 반드시 무엇인가에게 종노릇하게 됩니다. 처음 주인을 힘으로 제거하여 자유롭게 될지라도 또 다른 주인이 나타나 종노릇 하게 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자유롭게되어도 곧 다른 것에 종노릇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말씀을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수많은 기적과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의 자기중심성에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온갖 두려움에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에 우리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난 주 설교 말씀대로, 우리는 온갖 짐과 속박과 우리를 짖 누르고 괴롭히고 지배하려는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짖 누르고 괴롭히고 지배하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야 할 것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유는 소극적인 자유라고 말합니다.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짐과 속박과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성숙하고 풍성하고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하지만, 자유롭게 된 후에 무엇을 위해 자유롭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다음에는 그 자유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할 자유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를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구할 때 예수님의 완전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우리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 살아가는 삶입니다. 결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삶이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참 인간의 삶의 모범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 매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삶의 길을 인도하시고, 가르쳐주십니다. 말씀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진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도로에서 자동차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신호등입니다. 신호를 위반하며 마음대로 달리면 머지않아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릴 것입니다. 신호는 자동차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지켜야 할 약속이고, 질서입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주는 멍에가 아닙니다.
  이번 천안함 침몰 사건 수색 작업 때 보니까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는 잠수부들은 물속에 들어갈 때 잠수복을 입고, 허리에 무거운 납으로 만든 허리띠를 차고 들어갑니다. 물위로 떠오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납 허리띠는 물 밖에서는 굉장히 무거워 걷기조차 어렵지만, 바다 밑 물속에서는 무게를 거의 느낄 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물 밑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  속에서 무거운 허리띠는 멍에가 아닙니다. 그 무거운 허리띠가 잠수부들에게 물속에서 자유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 말씀하셨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진리 말씀은 멍에가 아닙니다. 짐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배우고 깨닫고 실천함으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말씀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진리 안에 무엇이 있기에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안에 거할 때 우리가 자유롭게 된다고 하셨는데, 진리 안에 있는 그 무엇 안에 거한다는 말일까요? 커뮤니케이션 프로듀서인 이의용 장로는 “소금물을 가마솥에 넣고 끓이면 소금이 남는다. 그러면 성경책을 끓이면 무엇이 남을까? ‘사랑’이란 두 글자가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 주제이고, 진리의 핵심 내용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고 있으면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어떤 뜻과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말씀합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사랑의 근원, 사랑의 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존재 목적을 위해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인간은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사랑 없이 살 수 없고,  사랑 없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완성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를 가장 잘 사용하는 최고의 절정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신에게 있는 자유를 사용하여 자기를 표현하고 상대와 함께 자유를 누리게 하는 자유의 최고봉입니다. 사랑은 최고의 자유로운 행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우리들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사랑으로 자유를 사용하여 서로 종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종노릇할 수 있는 자유,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단계도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야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무섭고 두렵고 하나님의 눈치를 늘 봐야 하고, 노예처럼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안 하면 하나님께 벌 받을 텐데, 내가 이것을 해야 하나님께 내가 벌 받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은 종이 주인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단계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거나 기쁨이 있지 않고 늘 무겁습니다. 힘듭니다. 하나님께 늘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늘 회초리가 들고 있는 하나님만을 생각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요리문답 1번,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해야지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움의 산을 향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그것은 종교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마지못해 하는 요리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접하려고 하는 요리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준비하는 마음이 다르고, 기쁨이 다르고, 맛이 다릅니다. 사랑으로 하면 신나고 쉽고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성령님을 사랑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아래 있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뜻은 성령님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 복종할 때 사랑할 자유가 유지됩니다. 성령님은 자유의 영이십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장 17절 말씀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속에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또한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 안에 열매 맺게 해주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에,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갈망하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데로 순종할 때 우리 안에 자유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 땅의 것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온갖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하고, 진정한 인생의 목적을 이루면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진리안에서 자유를 누리십시오. 사랑으로 완성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사랑으로 자유롭게 하셔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010년 04월 18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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