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대가 (누가복음 9장 23-27절) |
산악인들 사이에 “링반데룽(ring wanderung)” 현상을 조심하라는 말을 한답니다. 링반데룽은 산악용어로 같은 곳을 빙빙 도는 서클 방황(circle wandering)을 말합니다. 넓은 고원 같은 지대에서 눈보라, 안개 속에서 등반자는 목적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무의식적으로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같은 곳을 맴돕니다. 그래서 이를 환상보행(環象步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산에서 길을 잃고 며칠이고 방황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악인은 안개나 구름이 낄 대 링반데룽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현상은 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서 헤엄을 칠 때나 잠수할 때도 나타납니다. 해안을 향해 헤엄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런 안개로 계속 주변만 맴돕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링반데룽 현상이 나타납니다. 열심히 교회를 나가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세상이라는 안개 속에서 무분별하게, 욕심이라는 구름 속에서 헤매면서, 현실이라는 눈보라와 타협하면서 링반데룽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은 링반데룽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떤 신앙의 단계에서 머물러 그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들이 맷돌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돌고 또 도는 신앙, 쳇바퀴를 돌리듯 열심히 돌려도 변화가 없는 신앙, 링반데룽현상만 일어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신앙이 쳇바퀴 돌듯 하지 않고, 성숙해지는 신앙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신자가 아닌 제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23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25절에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치르게 되는 대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신자가 아니라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는 자기 혼자의 영혼을 겨우 구원받지만, 제자는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합니다. 신자는 빈 어깨로 천국에 가려하고, 제자는 남의 십자가까지 지고 천국으로 향합니다. 신자는 혼자 기뻐하고 혼자 만족합니다. 그러나 제자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신자로 머물지 말고 제자로 살라고 말씀합니다.
대가(代價)란 일을 하고 그에 대한 값으로 받는 보수나, 노력이나 희생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결과. 또는 일정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하는 노력이나 희생을 말합니다. 은혜란 아무런 값없이, 공짜로 주시는 호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제목, 즉 은혜를 받으라는 말과 대가를 치르라는 말은 그 뜻에서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말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죄의 대가를 다 치러주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나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장 8, 9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은혜로 태어나지만, 성장하는 데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제자가 되는 데는 값을 치러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에 다니면 됐지, 또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구원받아 나중에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으면 됐지... 이정도 신앙생활하면 됐지...” 이런 생각은 이런 말과도 똑같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됐지, 뭘 학교에 다니고 성장할 필요가 있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으면 됐지. 어른이 될 필요가 뭐 있어?” 여러분, 사람이 태어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목표가 아니라 출발입니다. 시작입니다.
성경에는 영적인 상태를 네 가지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갓난아이, 어린아이, 청년, 어른의 단계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른 단계의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장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은혜만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공짜는 없습니다. 받는 사람은 공짜라고 생각하고 받지만, 그것을 주는 사람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공짜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양정중앙교회 부목사 내외가 이마트에 갔는데 교인을 만났답니다. 그 교인은 반가운 나머지 자기 카트에 실어놓은 과자를 그 부목사네 카트에 옮겨 놓으면서 가져가서 잡수시라고 주더랍니다. 얼떨결에 그 부목사내외는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고서 장을 다 본 뒤에 계산대 앞에서 계산을 해 보니 그 교인이 준 과자들은 하나도 계산이 안 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나에게 공짜를 주려면, 대가를 치른 후에야 나에게 공짜로 줄 수 있습니다. 그때 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도 예수님께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은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값없이 거저로 주신 은혜이지만 값비싼 은혜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생명과 바꾼 은혜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는 너무도 값비싼 은혜를 받았지만 값싼 은혜를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날마다 은혜만을 원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니 몇 주 전에 설교할 때는 신앙인은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은혜를 날마다 구하면서 살아야 한다,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할 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무슨 말이냐 하면, 너무도 은혜! 은혜! 하다 보니 주님을 위해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공짜만을 원합니다. 교회에서는 무엇이든지 공짜로 주어야 하고, 항상 교회에 오면 무엇이든 얻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반 사회에서는 회비 내라고 하면 잘 내면서, 교회에서 무엇을 한다고만 하면 다 공짜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짜가 아니면 교회가 무슨 장사를 하느냐? 교회가 세상 기업처럼 되 버렸다, 교회에 은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갓난아이 신앙인입니다. 늘 먹여주고, 입혀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목욕시켜주고, 늘 받기만 해야 만족하는 신앙의 단계입니다. 그런 사람을 나쁘게 말하면, 거지근성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공짜까지도 더 많은 공짜를 얻기 위해 욕심을 부립니다. 우리 시찰내의 모 교회에는 어느 집사님이 냉동 수산물 유통업을 하신답니다. 그래서 가끔 냉동고등어 같은 것을 교인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이 나에게 하는 말이, “신 목사님, 교인들이 냉동고등어를 나누어 가지면서 서로 싸워요. 누가 더 큰 것 가지고 갔네, 누가 더 많이 가지고 갔네 하며 싸워요. 민망합니다.” 이런 신앙에 머물러 있다면, 아니 이런 신앙에 빠져있다면 심각합니다.
은혜 받기만 원하는 사람은 좋은 음식만 먹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그냥 쉽게 생각하면, 영양가 많은 음식을 많이 먹으면 그 영양가가 내 몸속에 저장이 되어 내 몸을 건강하게 해 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그 영양분을 사용하여 움직이고, 운동하고, 일할 때 건강해집니다. 섭취된 영양분을 아껴두고 쌓아두면 나중에 힘이 넘칠 것 같지만 천만에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건강에 문제 덩어리가 되고, 나중에는 독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신앙이 제자리에 멈춰서 있거나 주저앉아 있지 않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아래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냥 가만 앉아서 입만 벌리고 떨어지는 감을 받아먹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는 하나도 꼼짝도 하지 않고 남이 주는 은혜만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식물인간이든지,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 마태복음 11장 28-30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은혜와 대가와의 역학관계를 잘 말씀해 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쉬게 해 주시겠다고 부르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는 말씀은 우리가 진정한 쉼을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멍에를 쉽고 가볍게 해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메라고 하는 멍에와 짐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라고 말씀하며, 대가를 지불할 때 은혜로 도와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본문 23절 말씀처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말씀합니다. 포기하고 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그 다음 단계의 신앙으로 성숙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야곱과 그 가족은 딸 디나의 일로인해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모든 가족에게 세 가지 당부를 합니다. “이방신상을 버리라” “자신을 정결케 하라” “의복을 바꾸라” 이것을 끔찍한 범죄행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한 행위 때문에 맞게 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하고, 의복을 바꿔입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사람으로 날마다 살려면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해 죄를 미워하고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썩어져 가는 옛 구습을 버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자기 자아를 깨뜨리는, 자기 자존심을 부셔버리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릇을 비우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그 그릇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 라는 그릇 안에 담긴 것을 비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쏟아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비우고 버리고 포기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새로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에 솔개류에 속하는 어떤 새에 관한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그 새는 보통 50년을 사는 데, 어떤 경우에는 100년까지도 산다고 합니다. 100년을 사는 새의 경우에는 50년쯤 지났을 때, 일부러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박아 다 뽑아버린다고 합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행위입니다. 그러고 나면 새 부리가 다시 돋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부리를 뽑아내는 대가를 치르면 새로 나온 부리로 100년까지 살게 된답니다. 50년을 사느냐, 100년을 사느냐는 사용하던 부리를 뽑아 버리는 대가를 치르느냐 치르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는 대가를 치르면 신앙이 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목숨처럼 여기는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고, 꽉 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제거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버리는 과정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우리 목숨을 잃는 것처럼 아깝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만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고, 수업료를 내지 않고도 배울 수 있고,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그 때 깨닫고 성장합니다. 질병에 걸려 건강을 잃고서 그 건강을 회복하기까지 엄청난 고생과 물질과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건강을 위하여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여 옛날 나쁜 습관을 고칩니다. 돈을 잃고 사람을 잃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돈! 돈! 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돈도 벌 수 있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직장과 사업에 큰 어려움을 겪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줄을 고백하게 되고, 오직 세상 일로, 사업으로 분주하고, 세상과 벗하여 살던 삶을 돌이키게 됩니다. 자녀문제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자녀양육이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길러주셔야 하고,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고 사랑할 대상이구나 하는 것을 배웁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힘과 권력에 자신의 삶을 걸었다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사람 믿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구나 하고 절실히 고백하게 됩니다.
이렇게 대가를 치른 후에 신앙은 성장합니다. 성숙해집니다.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청년 단계, 어른 단계로 나아갑니다.
교우 여러분, 성장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한 후에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 치러야 할 대가 중에 ‘끝까지 믿고, 견뎌야 하는 대가’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오래 참고 견디어 내는 대가를 치를 때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받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제물로 받치는 순종과 그 순종을 위해 하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하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기까지,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야 했고, 애굽에서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13년간의 외로움과 배신감과 온갖 고통을 겪으며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복을 얻었고, 다른 사람들, 자기 동족들을 위해 선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오래 견디는 대가를 치러서 더 나은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신 것처럼,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자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너무나 무겁고 힘에 겨워서 주님께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하나님, 이 십자가가 너무 힘들어요. 조금 가볍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안쓰러웠던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톱을 주면서 잘라내고 싶은 만큼 자르라고 하셨습니다. 자매는 십자가의 밑동을 잘라내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가는데 다시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져서 또 하나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조금 가다가 다시 부탁하고, 또 부탁하고... 십자가는 밑동도, 위 부분도, 옆도 조금씩 잘려나간 볼품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영광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구덩이 하나만 건너가면 영광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매에게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건너기에는 그 간격이 너무 넓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십자가를 그 위에 걸쳐 놓고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웬일입니까? 십자가의 길이가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 부족한 것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오면서 잘라낸 길이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위에서 죽으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내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고, 성장통도 겪어야 하고, 섬김도 있어야 하고, 나눔도 있어야 하고, 희생도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을 드려야 하고, 물질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교인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쉽게 신앙생활하려고 하고, 봉사가 없는 교인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희생이 없는 교인은 예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롬 8: 29) 이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요즘 대형교회에는 익명의 신자들이 있답니다. 그들은 제자의 삶을 회피합니다. 조용히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짊어져야 할 가장 적당한 십자가를 지워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때,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대가를 지불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사순절에 여러분의 신앙이 업그레이드되기를 바랍니다. 신자로 머물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도우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제자의 대가를 치루며 여러분의 신앙이 점점 더 성숙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
2009년 02월 22일
신문수 담임목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