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학교(2) (신명기 8장 1-10절) |
지금부터 약 40년 전 초등학교에선 학생들에게 별걸 다 시켰습니다. 추수 후 이삭줍기해서 학교에 갖다가 내기도 하고, 겨울에는 교실 난로 불을 피울 수 있도록 솔방울 주어다가 내라고 하고, 송충이를 잡으러 산으로 전교생이 간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쥐잡기 날이라고 해서 쥐약을 나눠주고 쥐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가슴에는 흰색 바탕천에 빨간 글씨로 ‘쥐를 잡자!’라는 리본을 달고 다녔습니다. 등교시간에 선생님들이 검사했습니다. 그리고 잡은 쥐의 꼬리를 끊어 오라는 숙제도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학생들도 그런 숙제를 다 해내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지금 40, 50대 여성들은 대단하고 위대한 여성들입니다. 아마 거기에서부터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이 나오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쥐 잡는 날을 정하여 학교나 동네 이장이 나눠주는 쥐약을 일시에 쥐를 잡을 수 있도록 한 날 한 시에 먹다 남긴 음식물에 섞어서 쥐가 다니는 길에 놓는데, 이날이 동네 개들이 느닷없이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왜냐 구요? 집주인이 살포할 쥐약 섞인 음식물과 똑같이 생긴 샘플을, 쥐약을 뺀 샘플을 바닥에 놓고 키우는 개를 부릅니다. 그 당시 개 이름이란 크게 3개 내지 4개 이름으로 다 불렀습니다. 메리, 독구, 쫑, 그리고 워리입니다. 집주인이 부르지요. “메리!” 그러면 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달려와서 낼름 먹어치우려고 하면, 그 순간 그 개의 입이나 머리통은 집주인의 주먹에 의해 ‘퍽’하고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깨깽!” 소리와 함께 집주인에게 졸지에 맞은 개는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내리고 마루 밑으로 도망가 당황함과 배신감을 느끼며 마루에서 안 나옵니다. 다시 집주인이 다정하게 부릅니다. “메리!” 그러면 개는 다시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꼬리를 흔들며 갑니다. 집주인은 또 그 먹이를 가리키며 먹으라고 합니다. 개는 또 다시 먹으려는 순간, 이번에 집주인은 주먹이 아닌 발로 걷어찹니다. “깨갱”소리도 채 못 내고 숨넘어가는 소리 비슷한 외마디 소리를 내면서 다시 마루 밑으로 총알같이 쳐 박힙니다. 이렇게 수차례 반복하여 유혹과 구타를 당합니다. 그리고 쥐약을 놓은 다음날, 동네 개들이 곳곳에 개 거품을 물고 죽어 있었습니다. 쥐약을 먹고 죽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개죽음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집주인의 주먹질과 발길질, 몽둥이질을 받아가며 쥐약 놓은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훈련받은 개들은 동네를 룰루랄라 하며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쥐약 놓기 전에 주인에게 훈련된 개는 쥐약으로 놓은 음식이 아무리 탐나도 주먹질과 발길질과 몽둥이질이 생각이 나서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훈련 받은 개는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의도와 뜻을 가지고 삶의 광야 한 복판으로 우리를 끌고 가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광야 길에 서게 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질병이라는 광야, 사업 실패의 광야, 직장의 문제라는 광야, 상실과 시험의 광야, 고통과 시련의 광야에서 우리는 배울 것을 배우고, 통과해야 할 것을 통과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훈련받아야만 광야학교를 마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광야학교 2”의 설교는 광야학교 2학년 과정에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면 딱 맞습니다. 지난주에는 광야학교에 입학할 때에, 즉 초급반에 들어갔을 때에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모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자신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받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본문 말씀의 중요한 초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훈련받은 것을 기억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잘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이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우리들도 광야학교를 통해서 바르게 훈련 받고, 더욱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의 세월이 쓸모없는 낭비의 세월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꼬박 한 세대 동안 약속받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슬프게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반역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면, 하나님은 용서를 손에 들고 사랑으로 그들을 추적하셨습니다. 그 메마른 광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매일 아침 만나를 주어 양식으로 먹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모세는 말합니다. 본문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이런 뜻이 담겼습니다.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것에 달려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만나를 먹으면서 만나만 보지 말고,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보라! 만나를 먹으면서 만나를 통해 배부른 것에만 만족하면 그는 육적인 사람이다. 그는 이 세상에 매인 사람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것을 기억하고,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법을 배운 대로, 경험한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욕심을 버리는 훈련을 매일 아침마다 했습니다. 그들이 먹는 만나가 그러했습니다. 만나는 그날 먹을 것만 하나님께서 내려주셨습니다. 욕심을 부려 며칠 먹을 양을 거두어 두고 쌓아 놓으면 하루가 지나면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상해버렸습니다. 매일 아침 이슬이 땅에 내리듯 만나가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주을 때마다, 만나를 먹을 때마다 일용할 양식만 얻을 수 있고,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매일 터득했습니다. 우리의 빈 곳은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채워진다는 것을 매일 경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과 시련의 삶의 광야에서 욕심을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광야 학교에서는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 은혜로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배웁니다. 욕심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만약 우리가 중한 병에 걸리면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건강, 생명만이 소중할 따름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무엇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은 행복지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행복지수란 생활 전반에서 느끼는 행복 의 수준을 측정하여 수량화시켜 놓은 것을 말합니다.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행복을 많이 느끼면서 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보고를 들어서 알겠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방글라데시, 나이지리아가 높고, 미국은 47위이고, 일본은 더 낮고, 우리나라는 더 낮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진국 사람들은 국민소득이 더 많고, 더 질 좋은 환경에서, 첨단기술발전의 생활가전제품과 최고의 문화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왜 행복지수가 낮을까요? 왜 행복하다고 못 느끼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고 만족하기보다는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만 보고 늘 상대적 박탈감, 상대적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유가 늘면 늘수록 행복해 질 거라고 확신하지 않습니까? 집이 더 넓어지면, 최첨단 가전제품을 사용하면 더 행복을 느낄 거라 생각하여 그것을 소유하려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양심도 버리고, 윤리도 버리고, 부모형제도 모른 척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여러분, 김 국환씨가 부른 ‘타타타’라는 가요를 아십니까?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이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면, 오늘 성경 말씀 속에서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이라는 광야생활을 통해서 다시 포맷되어야 합니다. 다시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와 꼭 필요한 것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자족의 비결을 배우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의 한 복판에 몰아넣으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번창할 때나 성공할 때에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광야에서 배웠습니다. 마치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이따금씩 그들을 징계해야 하는 인자하신 아버지와도 같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경험하였습니다. 본문 5,6절에,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스라엘은 그들이 광야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 결과였다는 사실을 마음에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해 광야학교에 밀어 넣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때로 어렵고, 당혹스러우며, 심지어 쓰라린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외롭게 만들고, 탄식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를 좌절과 낙심의 광야 길로 내몰고, 시련과 절망의 광야의 한복판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을 바르게 훈련시키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를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징계와 형벌의 차이는 그 의도와 동기를 부여해주려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형벌은 고통을 주어서 잘못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언제나 우리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징계는 사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징계는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러분, 내가 식당이나 공공장소에 갔을 때에 옆에 있는 아이가 아주 버릇없이 굴고, 다른 테이블이나 알지 못하는 나에게까지 와서 함부로 굴면 정말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야말로 한번 그냥 주어 박았으면 하는 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부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 부모부터 한방 주어 박았으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그들과 심하게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집 애들에게 꾸지람을 한다든지, 회초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아이들이 사랑하는 내 자녀이고, 우리 자녀가 바르게 온전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깊고 큰 사랑이 나에게 있다면 반드시 꾸지람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꾸중도 하시고, 회초리를 드시고, 징계를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면 그냥 방치해 두었다가 심판하시고 멸망에 던져 버리시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당장은 달콤하지 않고 쓰기만 하지만, 징계 속에 담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불덩이 같은 사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징계를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마을에 아주 망나니 같은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버릇이 없기로 유명했고 문제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문제를 일으킨 아들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맞고 있던 이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괴성을 지릅니다. "때려라 때려! 때리면 네 아들 죽지, 내 아들 죽냐!" 자, 이쯤 되면 이 아이의 미래는 안 봐도 뻔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매를 들고 있는 손은 단순히 아픈 매가 아니라 바로 자기를 향한 사랑의 손인 것을 깨달아야 바르게 크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12장 5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10 ...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교우 여러분, 징계 속에 있는 교훈과 바르게 함과 온전케 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철이 든 자녀입니다. 철든 신앙입니다. 신앙이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지 않고 어른 신앙이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 고난과 시련의 광야라는 징계를 당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잘 감당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사람이 성공을 통해서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습니까? 실패를 통해서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습니까? 지혜로운 사람들조차도 성공을 통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합니다. 성공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기 보다는 교만과 자만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과 신앙이 온전해 지도록 광야학교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광야학교를 수료할 수 있도록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본문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지를 훈련하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복을 나누고 베푸는 통로가 될 수 있는 지 확인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성공을 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공을 할려고는 하지만 성공을 한 뒤 그 성공과 풍성함을 관리하고 누릴 수 있는 인격을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성공하기 전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추악한 모습으로 전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에는 빠지기 쉬운 고유의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성공을 했다고 할지라도 인격이 성숙하지 못하다면, 성공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공을 했다고 할지라도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나머지 교만, 탐욕, 자랑, 힘의 남용 등의 덫에 걸려 성공은 쉽게 문제가 생깁니다. 성공 이후 자신 안에 다스려지지 않는 교만, 탐욕, 자랑, 힘의 남용 등이 오히려 자신에게 불행을 불러들이는 빨판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반지 위의 보석이 빠지지 않도록 반지를 세팅을 할 때 보석을 꽉 붙잡고 있도록 견고한 발들을 만듭니다. 그래야 반지 낀 손이 어디에 부딪혀도 보석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격이 준비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으로 성숙해져가지 않으면 아무리 큰 재물이나 명예나 능력이 있을 지라도 그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불행의 지뢰가 됩니다. 인격으로 성공을 붙들 수 있고, 가꿀 수 있습니다.
온전한 인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공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고, 사람과의 관계나 재물 등에서 풍부한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해 광야학교에 인격과 신앙을 쌓아가게 하십니다. 더욱 온전한 성공, 풍성한 행복을 누리도록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광야학교의 수업료를 내게 하십니다. 무릎 꿇고 수많은 시간을 보내는 값, 고통을 겪는 값, 시련과 훈련을 거치는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재물을 잃는 값, 건강을 잃는 값, 직접 고통을 체험함으로 배우는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을 성공적으로 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변화되도록 신앙과 인격이 성숙하도록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이 광야학교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 광야 훈련이 우리의 영적 진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낸시 카마이클이라는 여성 가정사역자는 “광야 자체는 비극이 아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나는 광야라는 인생의 수렁에 빠졌고, 이로써 이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위로와 돌보심을 맛보았다. 내가 연약할 때 그분이 나의 힘이 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경험하는 시련과 고통의 광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광야 한 복판에서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광야학교의 어려움, 고통,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붙잡을 때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붙잡고서,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나를 위해 내주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도우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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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09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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