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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삶  [3332]
· 설교 일자 : 2009년 12월 06일
· 본문 말씀 : 역대하 24장 15-2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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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삶 (역대하 24장 15-22절)
  지금은 독일에 가서 목회를 하는 후배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1993년도 교육전도사 시절에, 스텔라 88이라는 50만 원 정도 가격의 중고차를 어디서 얻어 가지고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운전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때인지라 골목길에서 마주친 벤츠차를 비켜 지나가다가 그만, 벤츠차 뒤쪽 문 옆 부분을 긁었습니다. 상황이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꼼짝없이 수리를 해주어야 할 상황인데, 스텔라88중고차를 팔아도 그 벤츠차 문짝의 손잡이 수리비 정도밖에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후배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수리비를 대려면, 몸속의 장기라도 하나 팔지 않고서는 돈 나올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위배되는 장기 매매를 할 수도 없은 일입니다. 벤츠차 주인이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서 아무 말도 못 꺼내고 거듭 죄송하다고만 하며 허리를 꺾어 굽신대는 후배와 후배의 차를 한두 번 정도 보더니, “됐습니다. 그냥 가세요!” 그러면서 차에 타더니 가버리더랍니다. 그 때, 후배의 귀에 들리는 “됐습니다. 그냥 가세요!”라는 그 음성이 천사의 소리로 들리고, 그게 복음이더랍니다. 그 때 그 후배는 가버리는 벤츠차 뒤에다 대고 얼마나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120도 숙여 절을 했는지 모른답니다. 아마도 그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정신이상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길거리에 서서 멀쩡하게 생긴 젊은 사람이 차는 가고 없는데 허공에다 대고 그렇게 절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이야기를 후배에게 듣고서,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 누군지 모르지만, 고급외제차 타고 다닐만한 자격이 있다!” 그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일이니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벤츠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 벤츠차 타고 다닐 정도면 돈이 좀 있는 집이겠지요. 진정한 부자는 그런 상황에서 경제적인 도량뿐만 아니라 마음의 도량도 그 정도는 돼야 수준 있는 고품격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차만 좋은 것을 타고 다닌다고 고품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겉보기에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상류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인격은 천한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기들끼리 상류사회라고 말하지만 인생의 질은 하류 인생만도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도 많고 가진 재산도 많은 데, 연체된 세금 액이 수십억이 되어, 국세청에서 찾아가면, 도망 다니고, 거짓말 하고, 화를 내고, 그러면서 국가와 다른 국민들에 의해 혜택은 다 받고 살면서도 쫌팽이로, 극한 이기주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움켜쥐려고 발악을 하는 저질 인생이 있습니다. 썩는 냄새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는, 분열된 이스라엘 땅의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왕궁 옆에 있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포도원을 채소밭으로 쓰도록 자기에게 주면, 다른 땅을 주든지, 돈으로 쳐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들로부터 받은 유산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4절에, 아합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왕후 이세벨이 악한 계략을 꾸며서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나봇이 사는 동네에 귀족들과 장로들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인 즉슨, 사람 두 사람을 사가지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증언하게 하여 나봇의 죄를 물어 돌로 쳐 죽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그 일이 자행되어 나봇은 돌에 맞아 죽고, 아합 왕은 그 포도원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 그런 것을 부창부수라고 하지요. 아합은 아무리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백성보다 못한 왕이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다른 사람의 포도원을 그렇게 빼앗으면 악을 행하는 것인데, 하물며 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통치해야 하는 왕이, 자신이 스스로 포도원 한 밭떼기에 탐이 나서 그걸 못가질 것 같으니까 근심하고, 답답해하고, 식사도 안하고 들어 누워서... 어린애도 아니고... 그리고 왕후는 모사를 꾸며 그를 죽이고, 빼앗게 되자 신이 나서 돌아다닙니다. 아합 왕과 왕후 이세벨이 하류인생, 저질 인생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삶의 수준을 지하실이 있고, 1층에 거실이 있고, 2층에 침실이 있는 집의 구조로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는 지하실 창고와 같은 수준의 삶입니다. 지하실에는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고 거미줄도 있습니다. 어둡고 곰팡이 냄새가 납니다. 이를 인생에 비유하자면 마음속에 탐욕과 미움과 나태와 정욕을 품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수준의 삶입니다. 육체의 쾌락을 찾으면서 삶의 의미나 목적을 잊은 채로 살아갑니다. 둘째는 1층에 있는 거실의 수준의 삶입니다. 거실은 대체로 잘 정돈되어 있어 손님이 와도 보여줄 만합니다. 이런 거실 수준의 삶, 응접실 수준의 삶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삶의 가치를 남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두는 윤리적인 삶, 도덕적인 삶입니다. 셋째는 2층 침실 수준의 삶입니다. 키르케고르는 42세에 죽었는데,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침실이란 혼자만의 침실이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 수준의 삶에는 남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찾아 진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종교적인 삶입니다. ‘절대자 앞에서의 단독자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지하실 수준의 삶을 살다가 그렇게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고, 눈에 보이는 것에서 만족을 얻고, 몸이 원하는 것을 해 주고, 감각적인 욕구를 채워 행복을 누리려는 삶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처럼, 많은 수확을 하고 창고에 쌓아두고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는 인생입니다. 보통 이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물질 만능주의, 이기주의, 쾌락주의, 현실주의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짖밟고 희생시키는 것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이런 수준의 삶에 대해서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양정교회 교우들은 지하실 수준 인생, 저질 인생을 살고 있는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키르케고르의 3단계 수준의 삶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삶을 비교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 역대하 24장 말씀에도 이렇게 세 종류의 인생, 세 종류의 삶이 나옵니다. 여호야다의 삶과 요아스 왕의 삶과, 그리고 일을 꾸미고 앞뒤를 가리지 않는 방백들과 무리들의 삶입니다.
  여호야다라는 대제사장은 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려고 힘쓰다가 130살에 죽었습니다. 그의 삶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과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왕의 묘실에 장사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때에는 여호야다의 영향을 받아 신앙을 잘 지키다가,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유다 방백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뀌고 신앙이 바뀌어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가 외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라’는 경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의 영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켜 백성들 앞에 높이 서서 “너희가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고 외치자, 요아스 왕이 명령하여 그를 여호와의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실 여호야다는 요아스 왕의 고모부로써, 아달랴 여왕이 왕권을 잡고 모든 왕자들을 살육할 때, 몰래 어린 요아스의 목숨을 구하여 성전에 데리고 가서 일곱 살 될 때까지 키웠고, 포악하게 통치하고, 우상을 섬기는 아달랴 여왕을 죽이고 왕자인 요아스가 왕위에 앉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일을 만든 인물입니다. 그래서 요아스 왕은 인간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여호야다에게 어린 시절부터 굉장히 영향을 받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다니요. 사촌간이기도 한데, 요아스가 왜 그랬을까요? 여호야다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바른 길을 걷고 신앙도 잘 지키고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여 살았는데, 여호야다가 죽고 난 후에 왕의 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 동안 잘 해 오던 것들을 내팽개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강퍅해 질대로 강퍅해져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끝은 악한 삶, 실패한 인생, 하나님께 버림받고 징벌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의해 왔다 갔다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람의 말에만 신경 쓰고,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삶, 사람들의 평가에만 신경 곤두세우는 사람의 종말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말에 너무 신경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솝 우화를 들어보십시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장에 갑니다. 아버지는 당나귀 고삐를 잡고 앞에 가고 아들은 그 뒤를 따라 갑니다. 두 부자가 어느 주막 앞을 지날 때, 그곳에 모여 있던 장사꾼들이 비웃습니다. 당나귀를 타고 가지 않고 힘들게 끌고 간다고, 타고 다니라고 있는 당나귀를 타지 않고 상전처럼 떠받드니 저런 주인을 만난 당나귀 신세가 좋겠다고 비웃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갑자기 창피해지면서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여 아들을 당나귀 등에 태우고 갑니다. 얼마쯤 가다 보니 어느 마을 앞의 정자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쉬고 있는 노인들이 아들은 나귀를 타고 아버지는 끌고 가는 그들을 보고, ‘저런! 저런! 불효막심한 아들놈이 있나!’ 아버지는 힘들게 걸어서 가고 아들은 편안히 상전처럼 나귀를 타고 간다고,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자식에게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나쁜 버릇을 길들인다고 아버지를 욕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또 노인들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이 되어 아들더러 내리라하고 자신이 당나귀에 올라탔습니다. 이렇게 얼마쯤 가다가 어느 마을 앞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개울에는 빨래를 하고 있는 마을의 아낙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낙들은 그들을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어린 아들은 뙤약볕 아래 걸어가고, 아비라는 사람은 아들이 다리 아픈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 편하자고 나귀를 타고가다니... 나중에 늙어서 아들에게 어떤 대접 받으려고 저러냐고 수근 댑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낙네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아들을 나귀에 태워 둘이 같이 타고  갑니다. 당나귀는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을 태우고 힘겹게 길을 갑니다. 다시 얼마를 가서 우물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물가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이 이 광경을 보고서 ‘조그만 당나귀가 얼마나 힘이 들까. 장에 팔리러 가는 모양인데 장에 가기도 전에 죽고 말겠다’고 가엾어 합니다. 또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잘못하다간 장에 닿기도 전에 당나귀가 힘에 부처 죽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당나귀 등에서 내립니다.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지나가는 사람이 웃으면 말합니다. 그러지 말고 아예 둘이서 당나귀를 메고 가면 어떻겠냐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무릎을 치면서 그게 참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 아들과 함께 당나귀 다리를 묶어 메고 갔습니다. 가다가 다리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 다리를 지날 때 당나귀가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당나귀는 다리 아래로 떨어져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어떤 교훈을 주는 우화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고 깨달으셨습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주위 사람들은 자기 생각의 틀 안에서 생각하고, 자기 수준에서 판단합니다. 다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자기 경험 범위 안에서 이해 해줍니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그들의 의견대로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의 중심이 흔들립니다. 갈등과 고민이 생깁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상실되어 갈팡질팡합니다. 이 세상은 사람의 생각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중심을 잡고 살라고 말씀합니다. 그 중심을 하나님께 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말씀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 저런 삶이 아니라 진리의 삶을 살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학자들을 많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왜 그렇게 책망하셨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들을 더 의식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었기에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내용이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들은 남들이 보는 데서만 다른 사람을 구제하고 도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박수쳐주는 소리를 듣기를 즐겨했습니다. 또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기도하는 것을 많이 보도록 사거리에 서서 기도하고, 기도도 길게 하고, 폼은 폼대로 다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금식도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더 집중하고 식욕을 절제하는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금식하여 얼굴이 핼쓱하고 초췌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서 사람들에게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금식했습니다. 그런 것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으로 잘못 되어 가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고상하게 보이고, 거룩하게 보이고, 의롭게 보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가차 없이 그들을 깨부수시니까, 그들을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니까, 그들의 껍질을 벗기시고, 그들의 가면을 벗겨버리시니까, 그래서 자신들의 수치스런 모습이 드러나고 허구가 드러나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싫어하고, 종교의 이름을 걸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고, 결국 당시 다른 기득권자들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겠다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 여러분들도 자칫 하면 바리새인처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 않고, 사람들을 더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벌써 바리새인이 되었든지, 머지않아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앞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처럼 사람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이 있다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수준의 삶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종교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눈을 더 의식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옳게 보이려고 더 노력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더 노력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더 인정받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더 인정받으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더 옳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을 더 옳다고 믿습니까?
산헤드린 공의회에 잡혀간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원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핍박하고 협박하고 복음을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려고 합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 받은 수많은 이방 교회의 교인들로부터 자신에 대해 오해와 편견과 시기와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대해, 자신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오직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삶의 모토는 ‘코람 데오’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에 계시니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오직 하나님 우선, 하나님 제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마치 사람들 앞에서만 살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고, 사람들에게만 안 그런 척 하고, 그래서 과장하고, 거짓되고, 위선과 외식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다 아시는 데... 하나님은 가면속을 꿰뚫어 보고 게시고,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고 계시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여러분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해 있는지, 여러분의 마음이 누구에게 기울어져 있는지 다 아시는 데...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에게만 안 그런 척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곳에 가서 이 말하고 저곳에 가서 저 말하고, 자신을 포장하면 잘 포장이 됩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의심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교회 봉사도 잘 못하고...” 그 말하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죄송한 일이 있다면 나에게 죄송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송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목사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볼까? 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애썼습니까? 요아스 왕처럼, 사람 때문에 신앙생활하고, 사람 때문에 봉사하고, 사람 때문에 열심내고, 사람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고, 사람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람 때문에 삶의 중심이 왔다갔다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안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법,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신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날 몰라줘도 하나님께서 날 알아 주시는 것으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12월 06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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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09년 11월 01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5-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실망이라는 지뢰
· 일시  2009년 10월 25일
· 말씀  시편 42편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후회의 비탈길
· 일시  2009년 10월 18일
· 말씀  고린도후서 7장 8~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툴툴 탓 탓
· 일시  2009년 10월 11일
· 말씀  빌립보서 2장 14-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일시  2009년 10월 04일
· 말씀  신명기 4장 15~2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