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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이는  [3451]
· 설교 일자 : 2010년 01월 17일
· 본문 말씀 : 히브리서 11장 5-6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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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이는 (히브리서 11장 5-6절)
  지금의 예능교회(구 연예인교회)가 처음에는 몇몇 기독 연예인들의 성경공부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전도사님과 이들 연예인들이 모여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잉태 사건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이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서 자기와는 아무런 일도 없었으므로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의 역사라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들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하던 연예인들 중에 이 이야기를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믿을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이렇게 황당한 거짓말을 마태복음 1장에 써 놓고서 자꾸 믿으라고 하면 어떻게 마태복음 2장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이 사람이 자꾸 물고 늘어지니까 성경공부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때 평신도였던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하도 답답하니까 그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야! 마리아 서방인 요셉이 믿는다는데 왜 네가 못믿겠다고 난리야!”
  성경을 읽으려면 창세기 첫 구절부터 믿음이 아니고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천지창조, 수많은 기적들, 마리아 처녀잉태사건, 예수님의 부활사건 등, 성경의 곳곳에 믿음이 아니고는 다 거짓말처럼 보이는 내용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성과 짧은 과학 논리만으로 성경을 읽으려는 사람들은 못 믿겠다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거절합니다.

  지난주에 드린 말씀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과 교제하고 싶어 하십니다.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인간에게 성경책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집에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빠가 오랫동안 해외에 근무를 하였습니다. 그동안 그 아이가 한 번도 아빠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빠가 근무한 곳이 쉽게 올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아빠 사진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빠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비행한 끝에 아빠의 모습은 피곤하고 초췌해 보였습니다. 아빠는 너무도 아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보자 아이가 품에 달려오기를 바라고 두 팔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웬 낯선 아저씨가 나타나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으니까 무서웠습니다. 아이는 아빠에게 달려와 안기기는커녕 오히려 뒷걸음질 치며 방구석으로 갑니다. 눈치를 봅니다. 몸이 더 오그라듭니다. 아빠는 안타까워서 “아빠야! 이라와!” 애절하게 말하지만, 아이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립니다. 여러분이 그 아빠의 입장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속상하지요? 마음 아프지요? 아빠를 알지 못하고 아빠임을 믿지 못하고 피하고 무서워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불러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달아나고, 숨고, 두려워하고, 자기 욕심대로, 자기중심적인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계에 먼지가 들어오면 기계가 자꾸 오작동을 일으키고 마침내 기계가 멈추게 되는 것처럼, 죄라는 바이러스가 인간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몸만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무디어지고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병들고,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결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자꾸만 문제가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관계가 단절되고,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한 예로, 우상숭배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오작동을 일으켜 하나님 아닌 것을 대상으로, 거짓 신을 대상으로 정하여 섬기는 행위가 우상숭배입니다.

  본문이 포함된 히브리서 11장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믿음의 영웅들이 등장하는 ‘믿음의 명예전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1장 전체의 내용은, 인생의 여러 가지 사건들, 즉 수많은 고난과 시련들, 말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또한 그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를 말씀하고 있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을 배우며 격려 받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그중 오늘 본문 5절에는 에녹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로 옮겨지지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6절에 말씀합니다. 사실 6절은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의 믿음 속에 있었던 아주 중요한 공통내용, 핵심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의 영웅들이 믿음의 명예전당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상주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에녹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도 복 받는 인생이 되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씀할까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할까요?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람이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행위를 선하게 하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타락한 사람이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준까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기준까지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턱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행위가 완벽하게 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 잘하다가 한 가지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로나 업적을 쌓으면 될까요? 어떤 업적을 쌓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사람의 업적을 기뻐하실까요? 큰 건물을 세우거나 놀라운 기술 또는 발명품을 만드는 업적을 세우면 될까요? 아니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사회와 나라에 공헌을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까요? 대통령이 되어서 나라를 선하게 의롭게 행복하게 통치하는 업적을 세우면 될까요? 단순히 업적만으로 그 기준을 삼는다면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세운 사람 한 사람만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고 나머지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업적이나 공로를 세우는 것으로도 안 됩니다. 그러면 고행을 수행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죄와 실수와 하나님 앞에 부족한 부분을 고행을 통해서 채우면 되겠습니까? 금식이나 단식을 많이 하고, 어깨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짊어지고 맨 무릎으로 산을 기어오르면서 참회하고 또 참회하고 고통을 참아내는 고행을 하면 죄 많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속을 푸실까요? 어느 정도 해야 우리에게 “됐다! 그만 하면 됐다! 고행을 행하는 것을 보니 네 죄를 다 용서해 주겠다!”고 하실 것 같습니까? 우리의 죄가 다 용서받으려면 도대체 얼마만큼 고행을 해야 할까요? 여기서 잠간,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저 연쇄살인범과 비교하면 내가 지은 죄는 죄도 아니야!” “나는 저 파렴치하고 추악한 어린이 성폭력범에 비하면 내 죄는 깨끗해!” “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생명을 잃게 한 대구지하철 방화범에 비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죽게 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 나는 죄가 없는 편이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죄가 작으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범죄와 죄를 잘 구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범죄는 그야말로 법에 어긋난 행동을 한 죄들입니다. 도둑질, 간음, 성폭력, 사기, 폭력, 살인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범죄를 포함하여 죄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이미 마음으로 살인의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음욕을 품었으면 이미 마음으로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도 믿지도 섬기지도 않은 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하시고 목적하신 대로 살지 않은 삶이 죄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 비해서 죄가 작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고행으로도 우리의 죄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고행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마음만 답답하게 해드릴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물이 뛰어나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얼굴이 잘생기거나 예쁘면 될까요? 요즘 말로, 여자는 쭉쭉빵빵에, 남자는 말 근육을 가지고 있으면 될까요? 여기서 한번 손을 들어보시겠습니까? 얼굴 생긴 것이 나 정도면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목이 신경 쓰여 손을 안 드신 분이 딱 두 세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외모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서 주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굴생김새나 외모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주시거나, 인정해주시지 않거나 한다면 하나님께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집안이 좋다든지 성격이 좋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요? 학벌이 좋다든지 토익점수가 많이 나온 사람, 학생이면 내신등급이 1등급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요? 아니면 요즘 유머감각이 있거나 개인기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고 웃겨드리면 될까요? 이것들도 아니라면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부입니다. 손을 마구 비비면서 하나님께 아부를 떠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실력으로도 안 되고, 빽으로도 안 되고, 학벌도 안 되면 아부라는 방법으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면 아부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아부를 한다면 어느 정도 해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서 손에 지문이 없어질 때까지 아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손에 지문이 남아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하나님께 아부를 제대로 했느냐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를 확인받으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천국에는 손에 지문이 없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게 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용으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님께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정도의 행위에 도달하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없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인간과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방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믿음이라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공의로 여기시고”, 하박국 2장 4절,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6장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로마서 3장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너희 믿음대로 되라”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베푸신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은 우리들에게 주신 기쁘고 반가운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는 이 말씀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행위나 공로나 업적이나 고행이나 외모나 혈통이나 학벌이나 능력이나 아부가 아니라,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나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어린아이든지, 나이든 사람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부자든지 가나한 사람이든지, 많이 배운 사람이든지 못 배운 사람이든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믿음을 다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갑니다. 믿음으로 새로운 차원의 삶을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잃어버렸던 영생과 영원과 천국의 삶을 누리어 갑니다.
  이와같이 믿음은 단서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단서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일의 첫 부분, 어떤 일의 시초를 말합니다. 어떤 범죄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이 한 가지 단서를 찾아서 그것 가지고 미궁 속에 있던 그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을 풀어가는 단서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서로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닥다리와도 같습니다. 사닥다리가 없으면 높은 곳을 올라갈 수 없습니다. 호박넝쿨이 지붕 위로 올라가 누렇고 큰 호박이 영글었어도, 무슨 무협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은, 사닥다리가 없으면 지붕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땅의 원리와 땅에 속한 우리의 감각, 육체적인 성향, 지성과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땅의 원리를 뛰어 넘어 하늘의 세계를 느낄 수도, 받아들일 수도, 경험할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사닥다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로 연결되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닥다리를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 다음 내용이 결정됩니다. 또한 믿음은 어둠속에서도 볼 수 있는 야간투시경을 착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간 투시경을 쓰면 어둠 속에서 사물을 확인할 수 있고 앞에 있는 위험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의 투시경을 쓰면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보이지 않는 손길로 주관하고 계신 것을 믿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고 일상의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던 배가 광풍을 만나 다 죽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이 사공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심하시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반드시 상주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이란,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리라고 믿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는 것이고, 우리가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수도원 주방에서 섬기는 영성으로 유명한 로렌스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크고 더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푹 젖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은혜와 복을 한없이 쏟아부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각각의 상황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여 그 약속을 믿고 매달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실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과 은혜가 임하여 병이 고쳐지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파도가 치는 바다를 잔잔케 하실 때에는 바다의 믿음을 보시고 잔잔케 하신다고 하지 않으시고 바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실 때에는 반드시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어느 집회가 있었던 날, 강사 목사님께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제가 믿음을 갖도록 기도해주세요. 제 몸은 치유 받아야 해요.” 자신에게는 치유 받을 믿음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즉시 말했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그러자 그 여인은 깜짝 놀라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정말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지 않으실 겁니까?” “예, 기도해드릴 수 없겠는데요.” “정말인가요?” 그 여인은 실망과 분노가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재차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단호하게 “정말입니다. 저는 자매님을 위해 한마디도 기도할 수 없습니다. 자매님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은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신자이지요?” 그 질문에 그 여인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이는 신자가 있을 수 있나요? 어떻게 믿음이 없이 신자가 될 수 있지요? 저는 자매님이 믿음을 갖도록 기도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자매님은 이미 믿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매님,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여러분,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다” 고 말하지 마십시오. 있는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을 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시고 약속을 성취하시고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분명한 믿음을 단서로, 믿음의 사닥다리를 놓아 하나님의 나라의 신령하고 영원하고 놀라운 은혜와 기적과 능력의 삶이 여러분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직 믿음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오직 믿음으로 여러분도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010년 01월 1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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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09년 12월 20일
· 말씀  이사야 30장 18~2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
· 일시  2009년 12월 13일
· 말씀  디모데후서 3장 15-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세 종류의 삶
· 일시  2009년 12월 06일
· 말씀  역대하 24장 15-2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인생
· 일시  2009년 11월 29일
· 말씀  마태복음 25장 14-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용서의 지우개
· 일시  2009년 11월 22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31절 ~ 5장 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선물이 되는 말
· 일시  2009년 11월 15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29-3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혀로 던지는 부메랑
· 일시  2009년 11월 08일
· 말씀  에베소서 4장 27-32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감사가 주는 선물
· 일시  2009년 11월 01일
· 말씀  골로새서 3장 15-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실망이라는 지뢰
· 일시  2009년 10월 25일
· 말씀  시편 42편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후회의 비탈길
· 일시  2009년 10월 18일
· 말씀  고린도후서 7장 8~1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툴툴 탓 탓
· 일시  2009년 10월 11일
· 말씀  빌립보서 2장 14-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일시  2009년 10월 04일
· 말씀  신명기 4장 15~24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