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4장 7-8절) |
현재의 모습이 미래의 모습을 결정해 줍니다. 현재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보면 미래의 내 모습이 어떻게 될지, 미래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마음속에 품느냐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날그날의 행동과 생각의 품격이 결정될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뚜렷하게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매우 흐릿하게 무력하게 방향과 목표 없이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인 문제, 정신적인 질환을 앓게 되는 사람들의 많은 경우는 미래에 대한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목표가 무너져서 생기는 결과입니다. 자신에게 미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목표,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삶의 분명한 목표를 갖고 사는 미래지향적인 삶입니다. 신앙인이지만 만약 삶의 목표가 없다면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든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에 머물러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언제나 강력하고 확실한 미래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고, 그때에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위에서의 삶은 단지 거쳐지나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하나님 나라 천국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에는 이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믿게 되면서 이 세상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천국을 동시에 살아간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영원히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다시는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눈물 흘리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위의 삶은 무시하고, 죽고 난 다음의 세상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다.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것, 즉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지혜 등 값지고 존귀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자녀들이 부모의 것을 꼭 자기 것처럼 편안하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우리집 아들들은 내 책상에 있는 풀, 가위, 스케치 테잎, 호치케스라고 불리는 스태플러, 색상 펜, 기타 등등을 자기 것처럼 씁니다. 어느 날 내가 쓰려고 하면 없습니다. 처음에는 서랍을 뒤지며 한참 찾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보이면 애들 책상에 가 봅니다. 그러면 지들 책상에 떡 하니 있습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옆집의 애가 내 책상에 와서 그렇게 맘대로 가져다 쓰면,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계속 그러면 그냥 놔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 아버지 하나님의 풍성함을 이 땅에서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함께 할 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했습니다. 죄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부패하게 되었고, 죄 때문에 사탄이 우리를 죄의 종으로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잃어버리고 불안과 고통과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강단에서 제가 죄에 대한 이야기를 안 했으면 좋겠지요? 죄에 대한 설교를 하면 피곤하고 짜증스럽습니까? 귀가 따갑습니까? 그래도 죄에 대한 설교를 하면 귀가 따갑게 느껴지는 사람은 그래도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죄에 대해서 그래도 조금은 찔리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설교를 하는 대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양 흘려서 듣고, 귀에 들어오지 않으니 편안하게 졸고나 있고, 오히려 나와는 상관없고 다른 누구에게나 상관있는 말씀으로 듣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중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무슨 중병이냐 하면 강퍅증입니다. 완악하고 강퍅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심령이 완악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하튼 그래도 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이 땅에서의 삶을 풍성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으십시오.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려 하거나,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건성 건상 회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죄보다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의 유혹을 받고 넘어진 것보다도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무서운 문제라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한 번 두 번 그냥 지나치면 죄를 많이 짓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독이 든 음식을 입으로 삼키면서 달콤하고 잘 넘어간다고 해서 그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현수 목사는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도 어릴 때는 거짓말만 해도 양심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는데 아제 웬만한 거짓말은 양심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는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양심이 ‘고슴도치’였다면, 이제는 그 고슴도치가 빤질빤질한 공이 되어 버렸다. 어지간해서는 양심에 가책이 오지 않는다.” “사실 우리 안에는 도둑도 창기도 살인마도 들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솔직한 본질인데, 다만 좋은 환경 속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 점잖게 예배당에 앉아 있을 뿐이다.” 점점 양심이 마비되어 갑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가 우리의 영혼에 남아있으면 양심에 굳은살이 베깁니다. 양심에 철판을 깔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갑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죄를 짓지 않거나 죄를 용서받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거룩해지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을 읽겠습니다.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게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저버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룩하라고 하시는 말씀의 목적은 하나님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야 당연하듯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데, 거룩함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 짓지 않으려는 노력이 단지 벌 받지 않기 위해서 죄를 안 짓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수준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 짓지 않으려는 노력은 거룩해지려는 노력이어야 합니다. 거룩해지려는 것은 곧 거룩해짐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경험을 하기 위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해질 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우리를 통해 드러납니다. 우리가 거룩해질 때 죄를 이길 힘이 생깁니다. 양심이 회복이 됩니다. 우리가 거룩해 질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지만, 또한 우리가 거룩할 때 충만히 거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면 우리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죄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 마귀를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오래된 나쁜 습관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영혼이 치유가 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날마다 위대한 경험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어 천국백성으로 준비되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 말씀합니다. 레위기 19장 2절에, “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1장 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에베소서 5장 27절,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말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거룩하라고 하시는데, 정말 우리는 거룩해 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거룩해질 수 없는데도 자꾸만 거룩해지라고 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코데쉬’의 뜻은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원래 거룩은 하나님께만 있는 성품으로 모든 피조물과 완전히 다르게 구별되심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는 완전히 다르게 구별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명령하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될 때 거룩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거룩해진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현현하시는 성전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시간이 안식일이 거룩한 날입니다. 제사 의식과 관련된 모든 물건들, 십일조, 제사장의 예복들이 거룩한 물건들로 구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지금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여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거룩해 질 수 있는 것은 거룩한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함께 하실 때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여기면서 ‘나는 거룩한 백성이다, 성도다’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착각의 말일 뿐입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서 정결케 되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주일은 안식과 회복과 재창조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다가갈 만큼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죄를 고백하면 깨끗이 죄를 용서받고 정결케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정결하고 거룩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라고 청하면, 나중에 죄를 안 짓게 되거들랑 오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일예배에 빠지는 사람들 가운데 한 주간 동안 죄 지은 것이 많아서 하나님께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못 나오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분을 위해 탈런트 조형기 씨의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물론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아시고, 우리의 속사정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부패한 본성도 아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온전해 질수 없고, 의로워질 수도 없으며, 거룩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아무도 바로 설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에 견딜 수 없음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용서받을 길이 없고, 우리의 그 어떤 고행이나 노력이나 대가를 지불하여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아십니다. 오직 한 길 하나님의 긍휼! 그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 긍휼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죄 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우리는 거룩해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담대히 나아가라는 말씀은 염치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뻔뻔스럽게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용서를 받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형편이나 준비나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회개하러 나오는 우리들에게 “인간아! 잘 난체 하더니 그럴 줄 알았다. 왜! 죄 안 짓겠다고 하더니 꼴좋다!” “또 그랬어? 또 죄지었어? 넌 구제불능이구나!” 이렇게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언제나 “이제부터 안 그러면 되지. ” 라고 위로와 격려를 해 주십니다.
여러분,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언제나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께 자복하고 회개하여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혼이 깨끗해지고, 영혼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고무줄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더군요. 고무줄은 세게 잡아당기면 팽팽해지지만 그 당기는 힘이 약해지면 원 상태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스스로 팽팽해지도록 긴장감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옛날 자신의 습관과 성격으로 되돌아가 죄인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꾸만 죄를 짓고, 그것도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되고, 자신의 신앙에 변화가 없는 것 같으면 낙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잊고서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평생 신앙생활한다는 것을 아시고, 꾸준히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한 걸음씩 한걸음씩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합니다. 속성과정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결코 한 순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영성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 예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닮는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한 순간에 안 됩니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란답니다. 호박은 6개월이면 자랍니다. 그러나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평생 걸립니다. 그러니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거룩한 신분이 되지만, 그러나 그 거룩을 완성하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거룩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매일 기도와 말씀 묵상이라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으로 받지만, 거룩은 은혜의 수단인 지속적인 훈련으로 완성됩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교우 여러분,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든 신앙인들이 모두 다 낙심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이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도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담대하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거룩해져서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복과 사랑과 능력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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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20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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