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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엄 열매  [3643]
· 설교 일자 : 2010년 11월 14일
· 본문 말씀 : 누가복음 15장 11-24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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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엄 열매 (누가복음 15장 11-24절)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아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비 그리스도인들도 잘 아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너무도 잘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어떤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비유이지만 간단하게 내용을 요약해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받을 유산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각 유산을 나눠주었습니다. 며칠 안 되어 둘째 아들이 받은 유산을 챙겨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제멋대로 방탕하게 살면서 가지고 간 재산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그 때에 그 전역에 심한 흉년이 들었고, 그는 돈이 다 떨어져 형편없는 빈털터리가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들판에 나가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배부르게 먹을거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배가 너무 고파서 돼지 구정물 속의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도 거리가 상당히 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알아보고 뛰는 가슴으로 달려 나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때 빼고 광을 내게 한 뒤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통해 우리들의 삶에 주시는 메시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챙겨갔던 먼 나라라는 곳이 어디인가?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니다.
  비유속의 먼 나라는 돼지를 치는 지역이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식용이나 희생제사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스스로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돼지를 만지는 일조차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문화를 알고 나면, 둘째 아들이 떠나 간 먼 나라는 분명 유대인의 마을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마을에서는 돼지를 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요단 동편의 북쪽에 있는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떠난 먼 나라는 아마도 데가볼리에 속한 10개의 이방인 도시와 같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군대마귀를 돼지 떼에게 쫒으신 지역 거라사라는 지역도 그 지역에 있습니다. 아니면 더 먼 이방나라였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몫을 챙겨 떠난 둘째 아들이 갔던 곳은 먼 곳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갈 수 있다면 먼 곳에 가고자 했습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떠났습니다. 거리로만 먼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 집에서 살 때 그를 속박하고 얽매였던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정욕대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마음껏 방탕할 수 있는 곳입니다. 즉 하나님과 부모의 간섭 없이 방탕한 생활을 해도 어떤 것도 자신에게 신경 쓰게 할 것이 없는 이방인의 땅으로 갔습니다.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었겠지요. 그 끝이 어떤 것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 없이 살고 싶은 곳으로 갔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교우 여러분, 둘째 아들은 하나님 없이 야망을 이루려고 하고, 하나님 없이 성공하려고 하고, 하나님 없이 행복을 누리고 싶고, 하나님 없이 마음껏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가 갔던 먼 나라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인생입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면 무너지는 집처럼, 문제를 만나면, 장애물을 만나면, 위기를 만나면 흔들리다가 처참히 무너지고 마는 삶입니다. 그런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아니라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입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정함이 없이 어디론가 날라 가 버리고 마는 삶입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 없이 발버둥치고 온갖 땀을 흘리고 애를 써도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없는 삶에는 불안과 허무와 고통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런 삶을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둘째 아들이 갔던 먼 나라에 여러분도 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까? 하나님 없는 먼 나라에 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피해 멀리 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 다음 질문은 둘째 아들이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흉년이 들고, 돼지를 치면서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으려고 했던 쥐엄 열매가 무엇인가? 입니다.
  쥐엄 열매는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볼 수 있는 콩과에 속한 열매였습니다. (사진 1,2,3 보여주면서) 콩꼬투리는 익어도 벌어지지 않고, 마르면 그대로 떨어집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정말 먹을 것이 없을 때 마지막에 먹는 식량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 춘궁기때 캐먹은 풀뿌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보통 끓는 물에 쥐엄 열매를 넣어서 죽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필수 영양분들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난한 원주민들의 식량이 되고 있습니다. 또 소, 말, 돼지, 닭 등의 가축 사료로도 훌륭합니다.
  쥐엄나무 열매의 씨는 무게가 균일한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무게를 다는 저울추로 쓰여서 무게의 기준이 되기도 했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는 매년 성전에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여기서 1세겔은 20게라인데, 1게라는 0.2그램으로 쥐엄 열매 속에 있는 씨 한 개의 무게에서 나온 것입니다.다이아몬드의 무게를 말하는 케럿은 그리스어의 Keration으로서, 쥐엄나무의 학명인 Ceratonia와 어원이 같습니다. 1캐럿은 0.2그램 즉 200mg입니다. 쥐엄열매 한 개의 무게입니다. 가장 귀한 보석인 다이아몬드의 중량을 매기는 보석의 무게 단위로 쓰는 캐럿이 가장 가난한 처지를 상징하는 쥐엄 열매에서 단위가 나왔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둘째 아들이 빈털터리가 되어 쥐엄 열매를 먹으려 했다는 것은 그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 돼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몸을 굽힌다는 것은 엄청난 굴욕이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고자 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한 생각이고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처참할 정도로 밑바닥까지 내려간 처지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밑바닥까지 비참하게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지만, 결국 비참한 지경에 떨어져서야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은 깨달음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신앙도 가질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그냥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믿음도 없고, 변화도 없고, 성장도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시작장애로 아무것도 볼 수 없던 사람이 눈을 뜨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자신은 한계가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 연약하고 미련한 존재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만 길이 있고, 하나님께 열쇠가 있고, 하나님께만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진리를 깨달아서, 결국 인생이 하나님께로 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들은 쥐엄 열매조차도 먹을 수 없는 처절한 상황, 비참한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러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철저히 깨닫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깨달음은 깨어짐이 있어야 깨달음이 있습니다. 자신이 깨어져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깨어져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경우 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깨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유산 받은 것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에도 아직 깨어지지 못했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어 이방인의 돼지 농장에 취직하면서도, 즉 유대인으로서 부정하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면서도 아직 깨어지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너무도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쥐엄 열매조차도 없었고, 주는 사람도 없게 되자 그는 비로소 깨어졌습니다. 그의 생각, 그의 계획, 그의 자존심, 그의 능력,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이 다 깨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쥐엄 열매는 곧 궁핍과 가난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궁핍과 가난에 처해서야 드디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깨질 대로 깨지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습니다. 쥐엄 열매를 먹고서야, 쥐엄 열매를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처지에 던져지고서야 그제야 깨닫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소위 바닥을 치고 마는 깨어짐이 있고서야 깨닫습니다. “이게 아니구나!”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는 절벽 끝 벼랑 끝에 서서 자신이 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서야 그 때 깨닫습니다. “잘못 걸어왔구나! 잘못 살았구나!” 그제서야 신앙이 제대로 생깁니다. 여러분, 깨달음이 없이 믿음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여러 번 깨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제자로서, 사도로서 훈련받고 성장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입니다. 그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묻는 사람을 저주하며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닭이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닭이 울자 베드로는 통곡하였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고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닭이 우는 소리는 본문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쥐엄 열매와도 같습니다.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었지만 그것이 없자 아버지 집을 생각하고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듣자 자신의 허상이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심문하고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음성에 그는 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깨어지니까 자신이 하고 있는 열심히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들의 인생의 걸음걸음에서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과 방법과 목표가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깨어져야 합니다. 깨어지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니까 자꾸만 복음에서 이탈 되는 것입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니까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먼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깨뜨리지 않은 채 봉사를 하니까 자꾸만 자기를 위한 봉사,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자기 뜻을 관철 시키려는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깨어짐은 다른 말로 내려놓음이라고 합니다. 깨어짐은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에는 겸손함과 온순함이 담겨있습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허리가 굽혀지지 않습니다. 혈기가 죽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존심이 더 앞섭니다. 자기 방법, 자기 경험, 자기 능력, 자기 욕심, 자기 혈기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아만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둘째 아들이 갔던 먼 나라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힘과 세상의 논리만이 있는 곳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깨어지고 깨달음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류모세 선교사가 쓴 [열린다 성경 - 식물이야기 편]에는 쥐엄 열매를 설명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마가복음 1장 6절에 기록하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동쪽 유다 광야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유다 광야에는 메뚜기가 없다고 합니다. 류 선교사는 이스라엘에서 10년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유다 광야를 수없이 지나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식량으로 먹을 만큼 많은 메뚜기를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유다 광야에는 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기에 잠깐 동안 파릇파릇 나오는 조그만 풀들은 건기의 6개월 동안 바짝 마릅니다. 그야말로 유다 광야는 돌멩이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 아무리 천하무적 메뚜기라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먹었다는 메뚜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유대인에게 쥐엄 열매는 메뚜기 열매로 통한답니다. 서로 생긴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먹었다는 메뚜기를 자연스럽게 쥐엄 열매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산지는 쥐엄 열매가 많이 납니다. 요한은 말린 쥐엄 열매를 유다 광야로 가지고 가서 몇 달치 혹은 몇 년치를 저장해 놓았다가 먹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2세기 초에 로마의 현상범이었던 랍비 시므온 바르 요하이는 유다 광야에서 쥐엄 열매로 연명하면서 몇 년 동안 로마의 수색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쥐엄나무를 haruvim(carob)라 하고, 메뚜기를 hagavim(locust)라 합니다. 메뚜기를 성경에 옮겨 쓸 때 'r'자를 'g'자로 잘못 기록하여 성지(광야)에 흔한 쥐엄나무 열매가 메뚜기로 잘못 기록되지 않았나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이 쥐엄 열매를 '세례요한의 빵'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전승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뉴욕의 시장에서 쥐엄 열매를 '세례요한의 빵'이라 하며 팔고 있다고 합니다. 쥐엄나무 영어이름은 locust tree 즉 ‘메뚜기 나무’라 하는데, 세례요한의 식량인 메뚜기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쥐엄 열매는 궁핍과 가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쥐엄 열매를 통해 인생의 바닥을 경험하고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지를 깨닫고 결단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쥐엄 열매는 절제와 겸손과 청빈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갔고, 메시야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명을 준비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쥐엄 열매를 먹는 경험을 해 보았습니까? 정말로 쥐엄 열매를 먹어 보았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의 쥐엄 열매와 같은 상황을 여러분은 겪어 보셨느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쥐엄 열매를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질병이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쥐엄 열매와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사업의 실패와 어려움이, 직장의 문제가 여러분에게 쥐엄 열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자녀의 문제가 여러분에게 쥐엄 열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어떤 실수와 실패가, 어떤 잘못과 죄가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쥐엄 열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반대 방향을 보고 살았던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터닝 포인트일 수 있습니다.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우리 교단에서 발행하는 교단지 한국기독공보 24면에는 탤런트 이 광기 집사의 간증이 소개되었습니다. 탤런트 이 광기 집사(일산 벧엘교회)는 지난해 신종플루로 인해 7살 난 금쪽같은 아들을 하늘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는 아들과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보내고 나서야 ‘내 아들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때부터 ‘나의 내려놓음이 시작됐다’고 말을 이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았어요. 별빛이 반짝이는데 아들의 눈빛을 닮은 것 같았어요. 나에게 7년 동안 기쁨과 행복을 주고 간 아들. 하나님의 큰 쓰임을 받고 하늘나라로 간 아들. 아들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종플루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켰고, 덕분에 많은 아이들이 빠른 치료를 받고 생명을 다시 얻었다고 들었어요.”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울고만 있지 않고, 슬퍼만 하지 않고, 아들의 보험금으로 아들의 눈빛처럼 빛나는 세상을 위해 세상의 아이들에게 예수님 사랑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보험금 전액을 아이티 구호자금으로 월드비전 단체에 기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은 7명의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예쁜 여학생을 보러 처음 교회에 갔다는 이 광기 집사, 그저 제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것에만 행복을 느꼈던 평범한 아버지였던 그는 목숨과도 같은 아들을 하늘에 보낸 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나를 버렸다’는 이 집사는 7명의 아버지가 되어 “하늘에 있는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소박한 바람을 전하였습니다. 탤런트 이광기 집사에게 아들은 쥐엄 열매와 같은 상황입니다. 슬픔과 절망의 쥐엄 열매이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사명을 깨닫는 터닝 포인트,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쥐엄 열매처럼 사명을 준비케 하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개그우먼 이 성미씨의 간증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아픔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몰랐을 것이고, 축복도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춘기 아들이 학교에서 큰 싸움을 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이 그에게 쥐엄 열매가 된 것입니다.
  굶식과 금식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냥 굶으면 굶식입니다. 목표를 가지고 굶으면 금식입니다. 그냥 굶지 말고 금식을 하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난을 성숙의 기회로 만들어라, 은혜 받는 기회로, 방향전환의 기회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났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반가이 맞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당시 1세기의 전형적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먼저 안부를 묻기 전에 아들이 존경하는 예우를 갖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모든 사회적 관습을 다 팽개치고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 아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아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안았습니다. 아마도 그의 행색과 처지는 몹시 악취가 나고 볼품이 없었을 것입니다. 돼지를 치며 함께 뒹굴었으니 어떠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으로 아들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오는 죄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부끄럽고 죄송하고 염치없고 한심하지만,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또 용서하시고, 또 받아주시고, 또 새롭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사죄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대로 다 받아주었고 용서했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인이라는 것,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새 출발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인정하십시오. 고백하십시오.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내어 놓으십시오.
여러분, 입구는 다양해도 출구는 하나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의 삶의 상황들은 다양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 장애물, 아픔, 슬픔, 상처, 가난, 질병, 고난, 위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들어온 입구는 각양각색이지만 그것을 해결하여 나가야 할 출구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웃음이 시들어가고 있습니까?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까? 질병으로 건강이 밑바닥에 있습니까?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삶의 문제가 엉켜서 해결이 되지 않습니까? 부부의 문제,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로 고통의 쥐엄 열매를 먹고 있습니까? 인생의 어떤 문제를 만나 쥐엄열매를 먹고 있습니까? 심각한 고난을 겪으면서 쥐엄 열매를 먹고 있습니까? 위기를 겪으면서 쥐엄열매를 먹고 있습니까?
그 상황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 인정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사명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010년 11월 14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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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 일시  2010년 12월 05일
· 말씀  마가복음 12장 18-2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 일시  2010년 11월 28일
· 말씀  이사야 7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 일시  2010년 11월 21일
· 말씀  전도서 12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쥐엄 열매
· 일시  2010년 11월 14일
· 말씀  누가복음 15장 11-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왜 감사해야 합니까 ?
· 일시  2010년 11월 07일
· 말씀  시편 100편 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손 마른 사람
· 일시  2010년 10월 31일
· 말씀  눅6:6~11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부르심을 받은 대로
· 일시  2010년 10월 24일
· 말씀  고린도전서 7장 20-2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등불이 켜져 있습니까?
· 일시  2010년 10월 17일
· 말씀  디모데전서 1장 18-2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신실한 사람
· 일시  2010년 10월 10일
· 말씀  골로새서 1장 1~2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거룩한 식사
· 일시  2010년 10월 03일
· 말씀  요한복음 6장 47-5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빛의 열매
· 일시  2010년 09월 26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8-1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임마누엘 신앙
· 일시  2010년 09월 19일
· 말씀  마태복음 1장 23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
· 일시  2010년 09월 12일
· 말씀  시편 57편 1~2절
· 설교  손병인 목사 (양정중앙교회)
   
주일예배 설교
 그럼, 그리 바꾸겠습니다
· 일시  2010년 09월 05일
· 말씀  누가복음 14장 25-3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 일시  2010년 08월 29일
· 말씀  고린도후서 13장 5-9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수준을 더 높이십시오
· 일시  2010년 08월 22일
· 말씀  여호수아 6장 1~7절, 15~2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