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이사야 58장 6-12절) |
수년 전 월드시리즈 야구 경기의 7차전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아십니까? 당시 스코어는 동점이었고 9회 말이었습니다.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나왔습니다. 그는 장외 홈런을 때렸습니다. 관중들은 열광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월드시리즈의 9회말 투아웃에서 홈런을 때렸다는 말입니다. 그 타자가 홈런을 치고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 심판은 소리쳤습니다. “아웃!” 관중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심판은 타자가 1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홈런을 쳤어도 홈플레이트를 밟는 순간 아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얼마나 맥 빠지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많은 신앙인들이 이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홈런을 친 것 같습니다. 성공한 것 같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잘 다닙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헌금도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엇인가 빠진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것 같습니다. 놓친 것이 있습니다. 건너 뛴 것이 있습니다.
야구에서 홈런을 쳐도 홈에서 달려서 1루, 2루, 3루, 그리고 홈플레이트를 밟고 뛰어야 1점이 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도 꼭 있어야 할 것,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사야 58장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위험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경보를 울려서 그 위기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는 것이 선지자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흠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금식하며,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금식도 하고, 안식일도 잘 지키는 데 왜 하나님은 자기들을 보시지도 않고, 알아주시지도 않고, 복을 주시지도 않느냐, 자신들의 경건에 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하는 금식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너희는 금식을 나에게로부터 물질적인 유익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이웃과 쌈질을 하고,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였다. 그러니 어떻게 너희들의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간구에 내가 응답할 수 있겠느냐? 금식을 한답시고 신앙적 위선에 빠진 너희를 어떻게 인정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위선적인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경건의 형식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은 없다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안식일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말씀합니다. 금식과 안식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의 모습과 경건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전 중심의 제의 종교는 경건과 순종을 자주 제의 규정의 준수로 축소시키거나 왜곡시켰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금식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 제사를 드리는 행위를 보고 신앙이 있다 없다, 경건하다 경건하지 않다고 평가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실천하기 보다는 겉모양으로 보이는 종교적 행위에 더 집중하였습니다. 마음 없이 몸만 안식일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금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린 채 밥을 굶기만 하면 그것이 금식이라는 경건 행위가 되었습니다.
금식의 목적이 바꿔진 경우입니다. 무늬만 금식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여러분, 무늬만 나무라는 말을 기억하십니다. 모양을 봐서는 나무와 똑같은데 무늬만 그렇고 실제는 나무가 아닌 물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 요즘은 얼마나 진짜와 똑같이 만드냐 하면, 음식점 쇼 윈도우에 음식 메뉴를 실제 요리처럼 진열해 놓은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똑같은지 실제 요리보다 더 먹음직스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손으로 만져보지 않으면 이것이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도 있고, 공원 벤치도 앉아보지 않고서는 실제 원목으로 만든 의자처럼 보입니다. 겉모양이 같다고 내용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무늬만 신앙인, 모양만 그리스도인, 이름뿐인 교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건의 행위는 있지만 경건의 내용이 없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경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닮는 것,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경건의 목적을 잃어버린 종교 행위는 경건이 아닙니다. 밥을 굶는다고 금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 굶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금식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하나의 통로일 뿐입니다. 금식은 먹고 마시는 것을 전폐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경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늬만 금식인 경건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인애와 긍휼을 서로에게 베풀며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6절, 7절에 보니까,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자들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멍에는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불의한 폭력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사람들, 힘에 의해 억압당하는 사람들, 핍박당하고 거짓 고소를 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긍휼을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너희도 긍휼을 베풀어라”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 이웃뿐만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의 고통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 받고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파키스탄 펀자브 주의 '이탄왈리'라는 마을에 사는 아이샤 노린(45)은 다섯 아이의 엄마이자 동네 농장에서 일을 하며 근근이 먹고사는, 파키스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한 가지 다르다면 흔치 않게 그녀가 크리스천이라는 점입니다. 2009년 6월 더운 어느 날, 노린은 농장에서 일하다 동료들에게 물 한 잔을 나눠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신자인 동료들이 "크리스천이 주는 물은 더럽다"라며 쏟아버렸습니다. 그녀가 왜 크리스천이 주는 물이 더럽냐고 동료들과 언쟁을 벌이며 싸우게 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화가 난 노린이 "예수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마호메트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노린은 동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신성모독'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지난해 11월, 노린은 지방법원에서 파키스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신성모독법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신성모독법은 1980년대 중반 파키스탄의 독재자였던 지아 울하크가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이슬람교를 훼손하는 표현에 대해 최고 사형선고까지 내릴 수 있는데, 코란을 훼손하면 종신형 판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법안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그동안 962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 중 119명이 기독교인입니다. 대부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지만 10명은 옥중에서 누군가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신성모독법 쟁점으로 정국이 들끓자 노린이 살던 이탄왈리 마을이 속한 펀자브 주지사살만 타시르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습니다. 펀자브 주지사가 감옥에 있는 노린을 면회하고 그녀가 작성한 탄원서를 직접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다시 터졌습니다. 노린을 적극 돕던 펀자브 주지사 살만 타시르가 1월 4일 차를 타고 자택 인근 코사르 마켓을 찾았다가 경호원이 쏜 총에 맞아 과다 출혈로 사망한 것입니다. 그를 죽인 경호원은 평소 타시르가 신성모독법 폐지를 주장하고, 아이샤 노린 사건을 중재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총을 쏜 것입니다. 신성모독법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아이샤 노린은 아직 감옥에 있습니다. 설사 석방되더라도 그녀의 미래는 암담합니다. 노린이 살던 마을 주민들이 국가가 그녀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법대로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처단하겠다고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무바라크 대통령 축출로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29km 떨어진 한 마을에서 가문 내 종교 갈등으로 여러 명이 죽고 교회가 불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5일 한 콥틱 기독교인 남성과 무슬림 여성이 마을 인근에서 데이트 하는 장면이 목격된 게 사건의 발단입니다. 그 여성의 아버지는 충돌 사건이 있기 하루 전 그의 사촌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딸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음에도 그냥 살려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후 여성의 오빠들은 아버지를 살해한 사촌을 죽여 복수했고 이를 알게 된 인근 무슬림들이 집단행동에 나서 인근 성 미나 교회와 성 조지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회 신도 2명이 죽고 교회당은 전소되었습니다. 지난 해 11월에도 이집트 남부 도시에서 한 기독교인 남성과 무슬림 여성이 사귄다는 이유로 무슬림이 기독교인의 집 10채를 불태웠습니다.
북한 선교단체들은 기독교인으로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북한의 교인 수가 적게는 20만 명, 많게는 5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국제 선교단체인 [오픈 도어스]는 북한에 4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5만에서 7만 5천명이 신앙을 이유로 체포돼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국제선교단체인 [순교자의 소리]는 북한 내 지하교회 교인 5-6명이 좁은 방에 앉아 희미한 손전등 아래서 숨을 죽이고 성경책을 읽는 모습을 자유아시아방송에 공개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지하교회가 활발히 생겨나기 시작해 지금은 약 1만-2만 개 정도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북한 지하교회는 신자들의 안전을 위해 보통 3- 4명 단위의 작은 규모이며, 한반도에 기독교가 처음 소개된 평안도를 중심으로 북한 전역에 분포돼 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 선교단체의 소식에 의하면 자주 기독교인들이 북한 당국에 의해 색출 당하여 처형당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여러분, 북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복을 받고,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순수한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구원받는 것, 천국에 가는 것,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삶의 상황에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경건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김정일과 김정은과 기름진 배를 두드리고 있는 공산당 간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신앙을 같이 하고 있는 북한의 그리스도인인 형제자매들, 가난과 기근과 질병과 억압에 짖 눌려 살아가는 불쌍한 동족들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닮아 우리들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얻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자요, 장로교 신앙에 중요한 인물인 존 칼빈은 본문 6절 말씀을 주석하면서, 하나님께 금식 기도를 인정받으려면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빚진 자로서 경건에 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뜻은 하나님께 빚을 졌다는 뜻이요, 부모님의 은혜 속에 성장했다는 뜻은 부모님께 빚졌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신세를 졌다는 것도 그들에게 빚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빚진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더불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서로 빚을 지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한 로마서 1장 14절에 자신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만 복음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복음에 빚을 졌습니다. 본래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고, 어떤 분은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질병에 걸려 돌아가셨고, 어떤 분은 평생을 받쳐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대를 이어서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북한 교회에 복음의 빚을 졌습니다. 6.25 전쟁 이전에는 북한교회가 남한 교회보다 더욱 왕성하였습니다. 6.25전쟁으로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이 남쪽으로 피난 내려왔고, 우리교회도 북한에서 내려온 분들이 주축이 되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소속된 노회가 평양노회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는 차치하더라고 우리교회만큼은 설립부터 북한 교회의 신앙이 접붙여진 교회라는 사실을 놓고 볼 때, 북한 교회에 빚을 진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빚을 물려받았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북한 교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복음의 빚진 것을 갚아야 합니다. 빚은 갚아야 할 것이지 짊어지고 살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분들처럼 또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긍휼과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1952년 겨울, 차가운 서울의 새벽 거리를 거닐던 스완슨 목사님은 쓰레기들을 발로 툭툭 쳐보고는 트럭으로 내던지는 몇 몇 인부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던져지는 쓰레기 뭉치 속에서 순간적으로 어린아이의 팔이 삐죽 튀어 나온 것을 보고 황급히 인부들을 제치고 뭉치 안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지난 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웅크린 채 잠든 모습 그대로 얼어 죽은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인부들이 몰고 온 트럭 안에는 이와 똑같은 모양의 뭉치들이 가득히 널려 있었습니다. 스완슨 목사님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고국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 전역의 크리스천들에게 극심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한국 어린이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리며, 그들의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을 도전하였습니다. 그 후 50여 년 동안, 미국 크리스천들의 후원으로 10만 명의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끼니 걱정 없이 공부하게 되었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배출되었습니다.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단체가 컴패션입니다. 이 컴패션이 2003년 11월, 드디어 한국 컴패션으로 우리나라 땅에 세워졌습니다. 50년 전의 한국 고아들과 같은 모습으로 오늘을 힘겹게 살고 있는 전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받은 긍휼과 사랑의 빚을 돌려주려고 컴패션의 열 번째 후원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 이전, 일제시대 이전, 우리나라 개화기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선교사들과 외국 기독교 단체의 사랑과 긍휼을 많이 받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였습니다. 학교, 병원, 고아원, 여러 복지시설, 구제시설을 세워 아무 조건 없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 긍휼과 사랑의 빚을 진 것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가 세계 경제 11위라고 합니다. 경제가 성장했다는 말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제 그저께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동북부지역에서 발생한 규모 8.8의 강진은 일본 전역뿐만 아니라 러시아 · 대만 등 태평양 연안국가 및 섬들을 순식간에 '쓰나미(지진해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일본 전역이 쓰나미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되는 동안 태평양을 끼고 있는 30여개 국가들은 쓰나미 경보를 발령하고 자국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습니다. 일부 외신은 "일본 지진으로 인해 중미 국가 등 50개국에서 쓰나미 경보가 발령됐다"고 보도했고, 일본 기상청은 "앞으로 한달 간 규모 7.0 가량의 지진이 계속되고 쓰나미 역시 한달 정도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금까지 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죽었고, 그 피해는 상상 이상입니다. 대재앙입니다. 게센누마라는 도시는 밤새 지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전 도시가 사라질 판이랍니다. 뉴스 보도 장면을 보면서, 인류의 종말의 때가 임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만약 우리나라에도 저런 재앙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끝에 있을 일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6-8절 말씀에,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믿는 자들에게 때를 분별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보면서 한 번만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의 마음으로 일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의 독도에 대한 계속적인 야욕이나, 일본과 우리나라의 과거사 청산문제를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이번 대지진의 재앙으로 일본은 슬픔을 느낄 시간도 없이 충격과 공포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기도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를 위해 누군가 중보기도 해 주시는 분이 있었다는 것, 지금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최우선으로 우리 어머니의 기도에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해 주시는 성도들의 중보기도의 빚을 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 또는 다른 성도, 목회자들의 기도, 우리교회 중보기도사역팀의 기도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3부 예배 시에는 예배를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중보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은혜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여러분을 위해, 예배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여러분이 종교성이 뛰어나고 영적으로 활짝 열려있어서 믿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뒤에서 중보기도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여러분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중보 기도의 빚을 졌습니다. 열심히 기도할 힘, 기도할 호흡이 남아있는 동안 기도의 빚을 갚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8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겠다고, 물 댄 동산처럼 풍요와 건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다.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할 것이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 약속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 7절의 말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경건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면 긍휼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경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 헌금, 금식, 봉사,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생활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생활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고 다른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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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3월 13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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