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사무엘상 2장 27-30절) |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마구 주워 먹습니다. 함께 따라온 새끼 멧돼지도 어미 멧돼지를 따라 도토리를 주워 먹습니다. 다 주워 먹은 멧돼지는 도토리가 땅 속에서 나오는 줄 알고 자꾸만 땅을 팝니다. 도토리가 땅에 떨어져 있으니 나무에 붙어 있다가 땅으로 떨어진 열매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어미 멧돼지의 행동을 보고 새끼 멧돼지도 땅을 팝니다. 땅속에서 도토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새끼 멧돼지는 어미 멧돼지가 하는 행동을 본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이런 멧돼지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은 쳐다보지도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오로지 땅만 쳐다봅니다. 땅만 파면 물질의 복을 받는 줄로 착각하고 육적으로만 세상 것을 감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면 멧돼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그렇게 살면 자녀도 부모따라 그렇게 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땅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시편 128편 1절 말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는 말씀은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땅의 길만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자꾸 바라볼 때에는 그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바라봅니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을 자꾸만 바라보게 되니까 그것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소위 누구를 닮는다고 할 때, 자꾸만 그 사람을 보게 되니까 닮는 것입니다. 한번 보았는데 그 사람을 닮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물론 한 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이 커서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꾸어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한 번 본 모습을 자기 머릿속에 기억하고, 그것을 자꾸만 되 뇌였기 때문에 닮게 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자꾸 보고 닮게 되는 것이 가정안에서의 삶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몇 살 안 된 아이가 뒷짐을 지고 걸어 다닙니다. 그렇다면 분명 그의 아빠나 엄마 중의 하나가 뒷짐 지고 걷기 때문입니다. 자주 봤기 때문에 따라합니다. 아이가 코를 자꾸 파거나 코를 파서 벽에다가 바르는 아이는 분명 그의 아빠나 엄마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부모는 아니라고 하겠지요. 애가 어디서 이상한 것을 배워가지고 왔다고 말하겠지요. 정말 그럴까요? 아이가 찬송을 부르는데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따라한다면, 분명 그의 부모나 아니면 함께 사는 할머니가 그렇게 찬송을 부르기 때문에 따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이 가장 잘 일어나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은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이 제일 처음 만나는 삶의 환경이며, 공동체입니다. 제일 처음 경험되는 학습의 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삶의 모습은 아주 중요합니다. SBS 방송에서 하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나 행동을 하는 아이를 관찰하고 가족과 함께 힘을 합쳐 바로 잡아주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의 사례들을 보면 아이의 문제의 원인이 부모에게 있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부모의 행동과 생활 습관을 아이가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잘못된 훈육방식이 아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만듭니다. 부모의 강박 성향에 아이가 불안하여 아이도 소아강박 증세를 보입니다. 부모의 무절제한 생활을 보고 아이는 통제할 수 없는 아이가 됩니다. 부모가 자녀의 거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고 부모의 눈에 보이는 자녀만 꾸짖어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한 생명을 보내실 때에는 그 가정의 책임자들, 즉 부모들이 그 생명, 즉 자기 자녀들을 잘 양육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잘 양육한다는 것은 삶으로 본을 보이는 양육을 말합니다. 함께 삶을 나누고 공유하면서 양육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받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간 동안, 책임을 지고 사랑하고 양육하고 성장시켜서 사회로 나아가 온전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사명을 받은 청지기로서 본을 보여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의 가정에서 바라봄의 법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사무엘 상 1장부터 4장까지에 나오는 엘가나와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과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대조시키면서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 중의 한 부분입니다. 1장부터 4장까지에는, 한편에서는 사무엘을, 다른 한편에서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여러 면에서 대조시키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는 반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갖고자 하는 것을 모두 약탈하여 손에 움켜쥐고야 맙니다. 사무엘은 점점 더 성숙해져 갔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타락해 갔습니다. 사무엘은 키와 인격이 자라갔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점점 더 사망에 어울리는 행실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이유와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특히 자녀 교육에 관한 것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에게 바른 신앙을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바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 이하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여 제사법에 맞게 행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했습니다. 음행을 행했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 풍습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행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제사장의 아들로써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우습게 여기고, 멸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익명의 선지자를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그 내용의 앞부분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래서 30절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집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과 집을 경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굉장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 결과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 이스라엘 군대가 맞서 나가 싸우는데, 블레셋 군대에게 사천 명 가량의 군사가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진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언약궤, 법궤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진중에 갖다가 놓으면 언약궤가 효력을 발휘하여 블레셋을 이길 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때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이니까 언약궤와 함께 와서 진중에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갖다가 놓은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과의 다시 붙은 싸움에서 참패하여 큰 살육을 당합니다. 그때 죽은 보병의 수가 3만 명이었습니다. 남은 이스라엘 군대는 뿔뿔이 다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은 나이가 98세였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아들 둘이 다 죽었다는 소식과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가정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경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부모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과 엘리 제사장의 가정, 이 두 가정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습니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라 한 가정은 하나님께 경멸을 당하여 패망하고, 한 가정은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시어 복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먼저 우리가 깨달을 것은 종교적 환경이 거룩함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 가정 모두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내용과 결과는 천량지차였습니다. 오늘의 말로 표현하면, 교회에 다니는 가정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 복 받는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경외하는 가정이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부모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부모가 목사이고, 장로이고, 안수집사이고, 권사라고 해서 그 자녀가 모두 바른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제사장으로서 자녀들의 신앙을 바르게 세워주지 못했습니다. 신앙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본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신앙의 본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신앙의 본을 보이면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을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많이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까?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까? 물론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하겠지요.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자녀들이 바른 신앙을 갖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더 더욱 한심하고 허망한 기대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30절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까?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믿으며, 그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기대하는 자세는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에 나오면서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가슴 속에,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내 가정 안에서 함께 하시고,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베푸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되고, 범사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듣고 실천하는 삶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빠 엄마가 집사인 가정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가 교회에 나가기는 나가지만 그 아들의 눈에는 믿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싸우고 식사할 때 기도도 하지 않고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들리는 노래 소리는 “정주고 내가 우네” “땡벌”과 같은 트로트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가는 모습은 교회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교회에 갔다 오면 늘 재미있었냐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엄마가 교회학교를 마치고 가자 오늘은 뭘 배웠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아이가 말합니다. “오늘은 모세가 이집트의 바로 왕 군대를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해서,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죠.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적군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그러자 어머니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얘야,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머리를 극적이면서 하는 말이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 믿을 걸요?" 라고 말하더랍니다. 아이는 자기 엄마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까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부모이니까 감히 말을 안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병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행실과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나았습니다. 이 사실을 자녀들에게 간증을 합니다. 어떤 가정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결단을 하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실제 수입보다 더 많이 드리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이만큼의 십일조를 할 정도가 되어야 저희 집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자녀도 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만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그렇게 십일조를 드린 지 10달이 지나자 십일조를 드린 만큼 이상의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체험들을 부모가 자녀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정에서는 신앙이 바로 섭니다. 종교적인 습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가정의 자녀들은 살아있는 소중한 믿음을 물려받습니다. 이런 가정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을 기대하며 존중히 여기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존중히 여기시고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삼상 4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나이가 98세이고 눈이 어두웠다고 하면서 18절에, 두 아들 죽은 소식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 충격을 받았나 봅니다. 그래서 앉아 있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렇게 죽은 이유를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이가 많아도 몸이 비대하려면 어떻게 하면 비대할까요? 당연이 잘 먹어야 합니다. 무엇을 먹어야 비대해질까요? 야채를 많이 먹으면 그렇게 될까요? 고단백, 칼로리 높은 것, 지방질을 많이 먹어야 그렇게 될까요? 여러분도 잘 아시고 계시군요.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행동을 보면, 엘리 제사장의 식생활 습관이 어떠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2장 12-17절의 내용을 보니까, 성전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로 화목제를 드릴 때 제물 중 기름 부분만을 번제단에 태우고, 고기 부분은 제사장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나누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기를 삶은 뒤에 모세의 율법에 지정한 몫에 따라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에게 각각 분배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홉니와 비느하스는 갈고리로 삶는 솥에 집어넣어 스윽- 돌려서 걸려 나오는 것은 무조건 자기들이 가져갔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제물의 기름부분은 태워져 받쳐야 했지만 그들의 탐욕은 기다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먹기를 탐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엘리 제사장만 비대했던 것이 아니라 두 아들도 몸에 많은 지방질이 쌓여 비대했을 것입니다. 본문 29절에 그런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그들이 살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그들이 가로챘던 고기는 지방층이 곁들여진 부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삶아 먹기에 접합한 질이 떨어지는 퍽퍽한 고기부분은 싫어하고, 구워 먹기에 적합한 지방질이 곁들어진, 소위 마아블링이 좋은 부분을 탐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것은 식생활 습관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일부러 아들들에게 고기를 탐해서 먹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가정의 식생활 습관이 결국 두 아들에게서는 더 많은 육식 식탐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몸 안에 영양이 과다하게 축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식욕과 정욕이라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몸 안에 쌓인 과다한 영양에 기초한 스태미너로 음란한 짓을 했습니다. 그 결과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부모의 식습관, 가정의 식습관을 자녀들이 물려받습니다. 부모가 좋아하는 음식을 자녀가 닮아갑니다. 여러분, 대체로 부모가 아이스크림 먹고 가는 뒤를 과체중인 자녀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따라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이스크림 먹는 것이 죄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이 가정의 식생활 습관에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식습관이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계속 정크 푸드를 먹이십시오. ‘정크 푸드’란 칼로리는 높으나 영양가는 낮은 인스턴트식품, 패스트푸드를 말합니다. ‘정크 푸드’라는 말은 ‘쓰레기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당분 음식을 많이 주십시오.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을 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확실히 예언하건데 과체중, 비만이 됩니다. 그 결과 식욕조절중추가 망가집니다. 식욕조절중차가 망가졌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여러분의 집에 보일러 자동온도조절기가 망가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 지. 방은 땀이 날 정도로 더운데 보일러는 계속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동온도조절장치가 망가져서 보일러에게 “그만 때!”라는 명령을 못 보냅니다. 그런 집은 그 다음 달 연료비가 수백만 원이 나올 것입니다. 식욕조절중추가 망가지면 통제가 안됩니다. 여러분, 음식 많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식욕조절중추를 망가뜨리는 정크푸드, 고당분 음식을 피해야 합니다. 그 음식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과체중에 해당하는 분들이 불편한 자리로만 느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건강을 위해 약을 먹고,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셔도 비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또 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체중이 지나치면 기억력, 집중력 등 인지기능이 저하되고 체중을 줄이면 이러한 문제가 해소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것을 아십니까? 미국 켄트주립대학 연구팀이 발표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체의 영양과다는 때때로 영과 혼의 영양결핍을 동반합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 멀어지고 식탐과 정욕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마귀는 음식물을 교묘하게 조정함으로써 건강과 부, 그리고 행복을 파괴하는 교활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비만을 파괴자이자 살인자로 간주하십시다. 무절제가 영과 혼과 육을 파괴하는 질병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식욕조절중추가 회복되도록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식생활 습관을 잘 갖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내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지를 배우도록 하는 중요한 방법이 가정에서 식생활 습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지기 정신에서 나옵니다. 청지기 정신이란 자신이 주인이 아니고, 소유주가 아니라, 청지기, 관리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정신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몸도 하나님의 것이니 잘 관리해야 한다는 신앙에서 출발하여 좋은 식습관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와 자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시겠습니까? 돈입니까? 땅문서입니까?
교우 여러분,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에게 고기를 잡아다 주기보다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하지요?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어떻게 고기를 잡으며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물고기 잡는 법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사는 믿음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며 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하나님의 원리로 관리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보배이고, 희망인 어린이를 사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 방법 중의 중요한 것 하나는,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좋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들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와 자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시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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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5월 0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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