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예수님 (누가복음 7장 31~35절) |
. 지난 4일 강화도 해병대 초소에서 총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4명의 병사가 죽고 2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발생한 총기 사건의 주요 원인은 ‘가혹행위’, ‘기수 열외’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기수열외란 쉽게 말하면 집단 따돌림, 왕따입니다. 군생활 적응을 잘 못하거나, 선임병의 눈 밖에 나면 집단으로 따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후임 사병들조차 기수 열외 된 선임병을 무시하고 하극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따돌림을 받은 병사가 이에 앙심을 품고 소총과 탄약을 탈취하여 동료들을 향해 총을 쏘아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이 사건에 공범으로 구속된 정 이병은 신학대학을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해병대에 입대하기 전에는 남다른 애국심과 해병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대한지 6개월 만에 상관과 동료를 살해한 공범으로 구속될 만큼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는 선임병으로부터 종교적으로 심한 모욕을 당했고, 갖가지 구타와 가혹행위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6개월 동안 그의 인성은 파괴되었고 마음에는 ‘모두 죽이고 싶다’는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해병대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해병대 총기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왕따가 시작되어,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왕따, 직장에서도 왕따, 군대에서도 왕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왕따 당한 사람들이 받은 상처와 모욕과 소외감을 견디지 못해, 가해자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왜 이렇게 극으로 치닫는 것일까요?
우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합니다. 너무도 기다리지 못하고, 참아내지 못하고, 쉽게 화내고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쉽게 낙심하고 쉽게 절망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순간을 참지 못해 홧김에 폭력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입니다. 너무도 쉽게 자살하고, 너무도 쉽게 삶을 포기합니다. 우리사회는 총체적으로, 어떤 계층도 예외 없이 정신적 가치와 건강한 인성과 인격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난 7일 미국의 권위지 뉴욕타임즈가 한국의 국민들이 지나친 경쟁사회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전 국민이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의 상태로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 직장에서의 혹사, 상시적 불안, 과도한 스트레스가 일반적인 한국에서 학생들은 어느 때보다 학업 압박이 높아지고 직장인들은 퇴근 후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셔야 한다며, 한국의 자살률과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특히 만성적 우울위험에 놓여있는 것 같다”며 “한국 학생들은 초기부터 맹렬한 학업압박에 놓이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무한 경쟁사회에서는 1등만이 성공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등조차도 자신의 인생을 성공한 인생으로 여기고 행복하게 사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1등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늘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일등을 지키려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무한 경쟁사회에서는 1등외에 2등부터는 실패자요 낙오자라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 성공자보다 낙오자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됩니다. 오죽하면 개그콘서트라는 프로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대사를 외치면, 방청객과 시청자들이 그 말에 공감하여 통쾌하게 느끼면서 박수를 치겠습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일등만을 좋아하실까? 라는 질문을 해 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만을 좋아하실까? 신앙의 영웅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중에 없는 것을 아닐까?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1등만을 찾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어떠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누구를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내용은 배타적이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종교지도자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31절 앞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본문 31절 이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세대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당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말씀의 내용은 시장의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것으로 비유한 말씀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를 하려고 피리를 불며 다른 아이들에게 춤을 추자고 하였지만, 그 아이들은 권유를 무시하고 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들은 그러면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고 애곡하는 흉내를 내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우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장례식 놀이도 거부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처럼, 당시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엄격한 나실인처럼 생활하는 방식을 보고 그것이 귀신에게서 왔다고 거부하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기를 탐하고 잘못된 무리와 어울리는 자라고 거부하며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 외에는 다 거부하고 적대적이고 냉소적이며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도 거부하고, 예수님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진리 앞에 솔직하지 못했고,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무리가 아니면 배타적이었고, 자기들 기준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구분 지었습니다. 언제나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했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무리들처럼, 우리 사회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얼마나 공격을 해 대는지, 얼마나 거칠고 악하고 독한 말로 댓글을 다는지, 자기와 다르면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원수처럼 대하는지 참으로 걱정이 아니 될 수 없습니다. 포용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관용을 잃어버렸습니다. 이해하고 서로 용납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입에 맞으면 삼키고 그렇지 않으면 뱉어버리면 된다는 식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조금만 달라도 배타적입니다. 상대방이 나와 다를 때, 그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맘에 맞는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 성격적으로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리고 교제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왕따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 쉽게 수군수군 대고, 거리를 두고 상대를 하지 않으려고 하고, 내 기준에 맞추어 상대에게 쉽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만약 교회 공동체 안에서 조차도 왕따가 있고, 따돌림이 있고, 끼리끼리 어울리는 모습이 있다면 이 세상에 어떤 공동체에서 진정한 사랑과 교제와 하나 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에 새로 온 새 교우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새 교우들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게 왕따, 따돌림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용력을 갖고 서로를 용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함께 가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왕따 당하는 사람들의 친구이십니다. 소외된 사람, 힘없는 사람의 친구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내용을 언급하신 말씀 가운데, 34절에 언급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설명해주는 표현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며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자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셨고, 함께 음식을 잡수셨고, 그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문제, 그들의 상처,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왕따 당하는 사람들을 왕따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 죄인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며,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왔습니다. 거기에 키가 작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고 있던 세리장 삭개오였습니다. 예수님은 왕따 세리장 삭개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은 나병환자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귀신들려 무덤 사이를 오가며 사는 거라사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 왕따 당하고 있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나는 너희의 친구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윤복희 씨(권사)가 작사하고 윤항기씨 (목사)가 기도하면서 작곡한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동영상으로 편집한 노래로 듣겠습니다. 노래는 임재범씨가 불렀습니다. 이곡은 가사와 곡이 CCM으로 분류하는 곡입니다. (동영상을 듣고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괴로운 사람의 하나님, 서러운 사람의 하나님, 외로운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약한 자의 하나님이시며, 비천한 자의 하나님이시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의 하나님이셨고, 수많은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받아내야 했던 모세의 하나님이셨고, 사울 왕에게 광야에서 쫓겨 다니는 다윗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영웅이 영웅이라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약한 자였고, 괴로운 자였고, 억울한 자였고, 비참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신앙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우리가 지혜롭거나 능력이 많거나 문벌이 좋거나 강해서가 아니랍니다. 오히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련한 사람을 택하여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약한 사람들을 택하여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천한 사람, 멸시 받는 사람, 없는 사람을 택하여 있는 사람을 폐하려고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친구가
예수님은 약한 사람, 비천한 사람, 미련한 사람, 외롭고 괴로운 사람, 죄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습니까? 그 주님은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동행하기를 원하시고,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친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사람, 비천한 사람, 미련한 사람, 외롭고 괴로운 사람, 죄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어 주시면서 그들을 고치고 새롭게 하십니다. 죄인을 죄인으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병자를 병자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괴로운 사람을 괴롭게 놔두지 않으십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사건을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시는 예수님은 몸의 질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져서 고침 받았습니다. 여기서 ‘겉옷 가’라는 부분은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린 ‘옷단 술’을 만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을 지을 때 술을 달라고 지시하셨는데, 이는 그 술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민수기 15장 38-40절에 말씀하십니다.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이렇게 예수님도 옷단 술을 단 겉옷을 입고 다니셨고, 혈루증 앓던 여인은 바로 예수님의 겉옷 부분 중에 옷단 술을 만졌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당시 1세기의 랍비 문헌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온전하지 않은 자가 온전한 자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 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들이 예수님께 그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여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어 병 고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옷 가라는 것이 겉옷의 옷단 술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권위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했고, 이 겉옷에 달린 옷단 술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의미하는 영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영적 능력을 믿었고 그 예수님의 겉옷 옷단 술을 만진 것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병을 고쳐 달라고 하기에는 예수님 곁에 사람들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 15장에는 여인이 그의 몸에서 피의 유출이 있으면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부정하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눕는 침상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 즉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그 여인은 12년 동안 피가 멈추지 않는 혈루증을 앓고 있었으니 스스로도 부정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죄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혈루증 앓는 여인이 무리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리를 뚫고 나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부정하게 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여인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겉옷의 옷단 술을 만졌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낫게 될 것이라는 그 믿음으로 병이 낫게 되었고,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두려워하며 떨며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왜 그렇게 두려워하며 떨었을까요? 단순히 옷을 만진 것 때문에 두려워 떨었을까요?
1세기 당시의 랍비 문헌은 남의 옷단 술을 함부로 만질 경우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옷단 술을 만지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옷단 술 소유자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수염을 손주들이 만질 수 있지만 아무나 만지면 문제가 되는 것처럼,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의 옷단 술을 만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혈루증 앓는 여인은 예수님의 딸도 아닙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으로써 예수님의 겉옷의 옷단 술을 만졌으니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 사실이 다 드러나게 되었으니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딸아”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군중들 앞에서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한 순간, 여인은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옷단 술의 주인인 예수님이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함으로 처벌의 대상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 여인의 혈루증을 치료한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여인의 마음 가운데 있는 수치심과 죄의식까지 씻어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영혼도, 새롭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건강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친구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우리의 친구이신 주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전인적으로 치유하시고 새롭게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경쟁사회에서 1등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때로는 답답하리만치 천천히, 때로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뒷걸음질 치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낙오시키지 않으시고, 왕따 시키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지난주에 교사세미나 강사로 온 배 한숙 목사의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달팽이가 있었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자신을 달팽이로 비유하여 답답하리 만치 천천히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날 아침 / 노아의 방주로 모이라는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 하늘이 노랗게 보이던 / 달팽이가 있었습니다. // 언제까지 갈 수 있을는지 / 생명이 다하기 전에 / 갈 수는 있을는지 / 생각지 않았습니다. // 그냥 기었습니다. / 해가 지면 어둠 속을 / 이슬이 내리면 이슬 속을 / 며칠이고 비가 오면 / 물속을 기었습니다. // 속살이 타들어가는 / 땡볕 속에서도, / 가시밭 같은 모래 웅덩이 속에서도, / 그냥 기고 또 기었습니다. // 한바탕 바람을 일으키며 / 개미떼가 지난지도 / 몇 날이 되었습니다. / 서로 위로하며 함께 기던 / 지렁이도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갔습니다. //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 아무도 야속하지 않았습니다. / 등허리의 집채도 / 여려터진 느린 발도 / 다 괜찮았습니다. // 행여, 기다리다 지치신 하나님께서 / ‘달팽이는 끝내 오지 않는가 보다’ / 서운함을 감추시며 문을 닫을까 / 가슴이 아팠습니다. // 달팽이가 있었습니다. / 그렇게 그렇게 끝까지 기어가 / 마침내 방주에 이른 / 달팽이가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좌절 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외모, 우리의 똑똑함, 우리의 장점, 우리의 드러난 부분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우리의 어리석음, 우리의 단점, 우리의 약점, 우리의 숨겨진 부분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비밀까지도 아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가난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이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못 배운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배웠다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미련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구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연약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유명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유명해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죄인인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몸의 질병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해 있고 영혼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 언제나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거절하며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행입니다. 죄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교우 여러분, 괴롭고, 외롭고, 힘들고, 지치고 낙심될 때, 친구 되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 예수님께서 베푸신 관심과 용납과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어, 이 땅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이 사라지고,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기다리시고 기대하시는 하나님께, 노아의 방주로 부름을 받아 기어갔던 달팽이처럼, 우리들도 꾸준히 변함없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친구되신 예수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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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 10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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