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몸과 피 (마태복음 26장 19-29절) |
주일 아침, 들러붙은 엿처럼 잠자리에서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켰습니다. 앗 11시부터 주일 예배가 시작되는데, 10시 40분입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는지 안 닦았는지 모를 정도로 후다닥 하고는 아무 옷이나 주섬주섬 챙겨 입고, 교회를 향하여 전력질주 하였습니다. 도착 하여 보니, 11시 15분, 장로님의 기도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성경봉독, 찬양대 찬양 후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인지,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들어올리기 힘든 물건이 눈꺼풀이라고 했던가요. 목사님의 설교 중 유머소리에 와~하고 웃는 다른 교인들의 웃음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그러고 나니 설교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성찬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지난 주 광고시간에 오늘 성찬식이 있다고 들었지만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성찬위원들이 빵을 들고 쭉 지나갑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세례교인이니까 먹고 보자.” 빵을 한 입에 쏙 집어넣었습니다. 그 다음 포도주를 들고 쭉 지나갑니다. 빵을 먹었으니 당연히 포도주도 마십니다. 어제 밤에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는 것처럼, 포도주 잔도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뜨고 멀뚱멀뚱 있기가 그러니까 다른 교인들처럼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니고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마음에 느낌도 없이 그냥 눈만 감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성찬을 대하는 자세가 이렇지는 않겠지요? 우리 교회 교인중에는 이런 교인들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성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성찬의 의미를 기억하지 못한 채 성찬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무도 성찬의 의미와 유익을 어렴풋하게 알고 참여하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시고, 당부하신 것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독교 역사상 기독교에 대해 오해를 받았던 것 중의 중요한 것 하나가 성찬에 관한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면서 로마로부터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박해, 순교를 당하게 되는 요인 중의 하나가 성찬에 대한 오해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여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피니 마시라”는 소리를 밖에서 듣고서는 식인 종교라고 오해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전래 때에도 비슷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그와 같은 오해는 없지만 성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의 남편이 아내의 간곡한 부탁으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하필이면 그 남편이 교회에 나온 주일이 성찬식이 거행되는 주일이었습니다. 성찬식이 거행되는 동안, 그 남편은 몹시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조그만 빵조각 그릇이 눈앞에 도착하여 손으로 집어 먹으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부인이 남편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눈치를 주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더니 아내인 자기는 넙죽 집어서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작은 잔에 포도주가 담긴 그릇이 눈앞에 도착했습니다. 남편은 부인의 얼굴을 살짝 쳐다보았습니다. 부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감히 포도주를 마실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내는 자기 혼자만 포도주 잔을 들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남편은 몹시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왜 자기들만 먹고 마시고 나는 처음 나왔다고 못 먹게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별로 크지도 않고, 많지도 않는 빵과 포도주를 자기한테도 주면 뭐가 덧나느냐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내 다시는 교회에 오나 봐라!’ 그렇게 다짐하고는 다음 주부터는 교회에 안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여러분, 성찬이 그냥 일반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잘못된 종교의식이 될 것입니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당연히 교회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성찬은 일반적인 식사가 아닙니다. 배고파 먹는 음식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음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찬은 새 언약의 몸과 피입니다. 언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옛 언약에서 아담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 따 먹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돌보며 다스리며 생육하고 번성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담과 후손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옛 언약은 파기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언약이 파기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고통과 불행이 오게 되었습니다. 아담과의 언약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질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파기된 언약을 끝내지 않으시고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언약의 제물이 되셔서 새 언약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성경에서의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피를 주신 것은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들은 이 새 언약을 통해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찬 예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식은 성찬을 누가 우리에게 주시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의미하는 떡과 포도주를 하나님 앞에서 펼쳐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찬을 받으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떡을 떼고 잔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다 쏟아 주시며 우리를 대속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에 담긴 의미, 상징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있는 방석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고 애지중지하며 그 방석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방석 커버는 자기 어머니가 생전에 입으시던 옷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기에 남루해 보이고, 천도 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사랑하는 어머니가 평소에 입으시던 옷으로 만든 방석 커버이기에, 그 방석에 앉아 기도하면, 기도 많이 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저절로 나고, 어머니의 기도로 자신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자신도 어머니처럼 기도 많이 하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다짐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 시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우리나라 선수들이 얼굴 표정이 남다릅니다.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는 2010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태극기가 올라가며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것은 태극기와 애국가가 상징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기와 애국가가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태극기를 보거나 애국가를 들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솟구쳐 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찬을 주셨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참된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모여든 수많은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가 배가 고파 먹어야하는 양식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배부름을 얻고 굶주려 죽지 않도록 하는 영의 양식이십니다. 생명의 떡이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고 만족을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굶주리면, 우리 영혼이 양식을 먹지 못해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 생애를 걸쳐 자신의 사역을 통해 보여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으로 영접하면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시고, 영의 양식이 되시어 우리의 영을 살리고, 우리의 영을 만족하게 하고, 우리의 영이 영원한 만족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먹고 마시는 음식으로부터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진리, 사랑, 가치, 의미, 영원한 것, 영원한 생명을 통해서만이 만족을 얻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고, 우리 영혼의 굶주림을 해결하여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몸과 피를 다 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대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하듯,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예수님의 피의 공로, 보배로운 피의 공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은혜와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삽니다. 누리지 못하고 삽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지 못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습관이 있고, 때로는 기억상실증 환자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수시로 잊고 삽니다. 너무도 생생하게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조금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습니다.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조금 지나면 마음이 둔하여지고 무디어져서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때로는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고, 기억하고, 묵상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아시기에 이렇게 성찬을 제정하여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새 언약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으심의 의미를 가르치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시려고 했습니다.
성찬식에 참여했다고 해서 구원 못 받을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식은 구원을 받게 하는 예식이 아닙니다. 성찬식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만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찬은 자신의 신앙을 신앙공동체 안에서 확실히 드러내어 고백하고, 교회의 거룩한 예식인 성례 중 하나인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찬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아닙니다. 성찬은 회심의 방법도 아닙니다. 성찬은 죄 용서 받는 방법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마시면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사라져 깨끗해지는 종교의식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면, 참여하는 행위 자체가 자신을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성찬 자체가 즉 떡과 포도주 자체에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성찬의 참된 목적은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십자가의 용서,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구원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성찬의 핵심을 빼놓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 아닙니까?
종교개혁당시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는 “누가 주의 상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자기의 죄가 사하여지고 남아있는 연약성도 가려졌음을 믿는 사람, 또한 자신의 믿음이 더욱 강하여지고 돌이킨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이 참여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신앙고백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서약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몸과 피를 기억하며 우리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거룩하게 행해야 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찬을 올바르게 준비하고 참여하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연합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주님의 떡을 받아먹음으로 주님의 살이 우리의 몸에 계십니다. 주님의 잔을 받아 마심으로 그리스도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받을 때,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 시민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대사다!
성도 여러분,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고귀하고 복된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새롭게 사랑을 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십자가의 대속과 은혜를 새롭게 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사죄와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회복하고,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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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02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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