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III (로마서 5장 17~21절) |
신앙생활에 있어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은혜입니다.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앙을 갖는 것은 기독교 신앙, 복음적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기가 힘이 듭니까? 신앙생활을 정말로 잘 하고 싶습니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은혜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필요한 사람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열심히 살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으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여러분, 은혜는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종교생활과 다릅니다. 종교생활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에 따라 그 종교가 가르치는 교리를 믿고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처럼 가르치는 교리를 믿고 따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분명히 다른 핵심 교리가 있습니다. 이 핵심 교리 때문에 다른 종교와 구별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독선적이고 다른 종교와 타협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다른 종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종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종교는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적 씨앗이 있어서, 즉 종교성이 있어서 그것을 잘 키우면 온전한 인격이 되고, 신의 성품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종교적 씨앗을 잘 기르기 위해서 인격 수양도 하고, 고행도 하고, 선을 베풀기도 하고, 업적을 쌓으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종교적 노력으로 신에게 도달하려는 것이 일반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종교적 씨앗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기독교 신학적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의 전적 타락’입니다. 태초에 창조될 때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성은 죄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원죄를 유전 받아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 속에는 스스로 수양하고, 훈련하고, 노력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결과는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섬기고, 스스로 뭔가 인격 수양과 성품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타락한 인간 본성 때문에 교만해지고, 자신 스스로가 신처럼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무엇인가를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손을 써 주시지 않으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회복될 수도 없으며,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내려 주시는 사랑, 호의, 자비, 선물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은혜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크게 두 종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은혜이고, 또 하나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일반적인 은혜는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 하반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햇빛을 선인에게만 비추시고 악인에게는 햇빛을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십니다. 비도 마찬가지이고, 공기도 마찬가지이고, 이 세상의 창조물을 모두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가 아니면 이 땅위에서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지혜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도 필요합니다. 특별한 은혜란 그야말로 특별하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은혜를 베푸신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죄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고,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게 한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슬픔과 고통과 불행과 죽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절정을 이룹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희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21절 말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7절 말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특별하신 은혜를 구속의 은혜, 구원의 은혜라고 합니다. 이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입니다. 이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특별하신 은혜는 믿는 사람만이 받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특별한 은혜를 주셨지만, 믿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햇빛이나 공기나 빗방울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다 받아 누릴 수 있지만, 이 구원의 은혜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어떤 악인일지라도 믿음으로 받습니다. 18세기 영국에 아프리카 사람들을 잡아다가 북미와 남미에 팔아넘기는 무자비한 인신매매를 하는 영국의 노예선 선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배에 노예를 싣고 대서양을 건널 때 술을 마시고 취기가 돌면 아무나 끌어내서 바다에 던지는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상어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낄낄거리면 웃을 정도로 사악한 악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고약한 심성의 선장이 어느 날 폭풍을 만났습니다. 배가 뒤집힐 것 같았고,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순간,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시던 어머니가 매일 부르짖던 하나님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자신을 살려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풍랑에 떠밀려 겨우 육지에 닿은 그는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이 찬송곡의 멜로디를 못 들어본 사람이 없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을 작곡한 존 뉴턴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시라고 말하면, 나중에 술, 담배를 끊고 나서 나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전도를 하면, 지금은 지은 죄가 많아서 나갈 수 없고, 나중에 나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착하게 살게 되면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시라고 권하면, 나 같은 사람이 나가도 되냐고 되묻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기독교를 오해해서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은혜의 복음인 것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받는 것이지 본인이 해결하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해결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대상의 제한이 없습니다. 선착순도 아닙니다. 갖추어야 할 조건도 없습니다. 죄인이면 됩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속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받습니다.
‘배꼽이 있는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원죄가 있고, 스스로 범한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까?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그리하여 사죄의 은혜를 언제나 받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 농장에서 여름 방학을 보낸 남매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남동생 소년이 돌맹이를 던지다가 잘못하여 할머니가 아끼는 오리를 한 마리 쳐서 죽였습니다. 사실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에 소년은 그 죽은 오리를 풀이 무성한 풀숲에 숨겼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누나가 이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이후 며칠 동안 소년의 누나는 어린 동생에게 무언가 심부름 시킬 만한 일만 있으면, “너, 오리를 기억해라!”라고 속삭였습니다. 누나가 그 이야기만 꺼내면 소년은 아무소리 못하고 심부름을 다 했습니다. 툭하면 “너, 오리...”하는 누나의 조종을 견디다 못한 소년은 할머니에게 혼이 날 것을 단단히 각오하고 마침내 할머니에게 사실대로 고백했습니다. 고백을 들은 할머니는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 때, 창가에서 다 보았단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지. 그런데 얼마나 오랫동안 네 누나가 너를 노예처럼 부려먹을지 걱정이 되더구나!” 죄는 우리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오염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짖 눌러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그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대가로 지불하신 피!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케 살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죄가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받았지만 그것을 누리며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죄의 은혜를 늘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또 용서를 구하면서 회개했던 죄를 용서받은 줄을 확신하지 못하고 나중에 또 다시 그 죄를 꺼내어 하나님께 회개를 되풀이하여 하기도 하고, 감정적, 영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한 복음적 삶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가 언제나 죄를 고백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죄하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사죄하시는 은혜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받아 죄과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죄의 은혜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치르신 대가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면, 우리는 은혜를 남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죄하여주시는 은혜를, 언제나 우리가 회개하면 사죄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니 하나님의 은혜를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가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주시기까지 대가를 치러 주신 은혜를 생각한다면 사죄의 은혜를 남용할 수 없습니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 훼퍼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0 하반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의 뜻은, 더욱 많은 은혜를 받으려면 죄를 많이 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죄를 용서 받으려면 하나님의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고, 많은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받고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3절에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더니 유대인들과 유대교에서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향해 바울과 바나바가 권면하고 간 말이 무엇이었었냐 하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항상 인사말에서나 편지를 마무리하는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은혜를 강조했을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시작된 성경 말씀이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제일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명령하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22장 21절입니다. 그 말씀이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납니다. 세상 끝날까지 예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말씀입니까? 어떤 은혜가 함께 하기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과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은혜가 아니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유지될 수도 없고, 은혜가 아니면 천국까지 갈 수도 없습니다.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것, 구원, 성령 충만, 하나님과의 교제, 일상생활의 승리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을 둡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으며,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것입니다.
어떤 신앙인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봉사도 열심히 못했고, 헌금도 많이 못했고, 세상에서 죄도 많이 지었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까?” 당연히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니까 은혜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함에 근거하지 않고 아무 공로나 자격이 없는데도 풍성하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여 은혜를 구하기에 망설이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마귀가 여러분 마음에 넣어준 생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은혜를 늘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슈퍼마켓에 가면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기 콘센트에 가전제품 플러그를 꽂으면 전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얻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특별한 은혜입니다. 조이스 마이어는 “은혜란 우리가 값을 치르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말하면서 은혜를 받는 방법은 단지 믿고 구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구하는 것, 특히 은혜를 구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하는데 있고, 구한 후에는 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저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넘어지고 또 죄짓고 또 실수합니다. 하나님의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능력을 주옵소서. 저는 연약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주십시오. 제가 가야하는 길을 인도하여 주십시오. 제가 상처받고 낙심하고, 절망할 때, 위로와 격려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복을 주시옵소서. 은사를 주시어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시편 123편 3절에 시인은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또 구하고 또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 은혜를 아끼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감추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은혜를 드려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없습니다. 천국에까지 갈 수 없습니다. 때마다 일마다 은혜를 구하십시오. 은혜 속에 거하십시오. 은혜가 여러분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승리케 하시길 바랍니다. 오직 은혜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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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09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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