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sermon

양정교회 홈페이지와 YouTube 채널을 통하여 설교말씀과 강의를 영상/음성/스트리밍으로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2004년 8월 부터, 현재까지의 영상과 말씀 음원파일을 홈페이지를 통해 열람이 가능하며,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설교말씀 다시보기를 통해, 예배시간에 받았던 은사와 감동을 다시한번 회고하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등록된 설교영상 : 1,145
우리는 세상의 소금 (i)  [2764]
· 설교 일자 : 2012년 01월 01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 설교 : 신문수 목사

신문수 목사님의 다른 말씀 보기

우리는 세상의 소금 (i)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금년에는 어느 해보다도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평안과 기쁨이, 복과 함께 하심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늑대소년 실화를 아시지요? 양치기 소년과 늑대 이야기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이를 버렸는데, 늑대가 자기의 젖으로 그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가 열두 살 때까지 늑대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 소년은 사람의 모습을 하였지만 늑대처럼 행동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늑대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몸에 병이 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죄와 악한 사건들이 생깁니다. 사람다움, 인간다움은 ‘내가 인간이다’, ‘내가 사람이다’라는 분명한 자의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2012년에는 우리 교회 목회 표어가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표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이라고 일컫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유명한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유명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산상수훈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알 만한 사람은 아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의 가르침들 중에는 서양의 사상과 법, 도덕과 윤리에 지대한 영향을 준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누구인지를 먼저 분명하게 밝혀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들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누구를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인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누가 세상의 소금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보통 어떤 문장을 읽거나 말을 들어보면, 문장의 배열이나 문맥만 바로 잡고 나면 주어가 무엇인지, 서술어가 무엇인지, 목적어가 무엇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너희’는, 읽기에 따라서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말한 것 같기도 하고, 특별한 대상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2절까지 우리가 잘 아는 여덟까지 복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에 오늘 본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의 시작 부분의 말씀입니다. 팔복이라고 부르는 이 말씀은 1절을 보면, 예수님께 모여 온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대상이 무리들과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무리들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3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부터 12절까지를 화면을 통해 함께 보겠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을 말씀하실 때에는 ‘그들의 것임이요, 그들이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상을 3인칭 복수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에 해당하는 자들 모두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11,12절을 말씀하실 때에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비로소 ‘너희’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런 후,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떤 정해진 대상자를 염두 해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소금일 수 있는 ‘너희’와 소금일 수 없는 ‘그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소금일 수 있는 사람과 소금일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하여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욕을 듣고 박해 받고 악한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너희’라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받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의 대상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소금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소금일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교인과 신자와 제자가 있듯이, 교회에 다닌다고 다 세상의 소금이 아닙니다.
  어떤 교인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를 수 있습니다. “다행이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 아니네. 소금 역할을 하지 않아도 책임이 없네. 나는 그저 구원받기만 하면 되지 소금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교인으로 살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합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생각일까요? 신앙을 제대로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에 해당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너희’와 관계없는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냥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나 받고, 복이나 받고, 그저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아닙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25절 이하에, 제자가 되는 길을 말씀하시면서 34절, 35절에서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의 역할과 제자의 길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본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소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구원받게 되었고, 그 감격과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한 사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따르고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 예수님께서 하신 명령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사람, 이 세상에 소금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들입니까? 너희입니까? 무리들 중의 하나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세상 사람입니까? 세상의 소금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소금이란 어떤 것입니까? 소금은 염화나트륨(NaCl)입니다. 소금(Nacl)은 61%의 염화물과 39%의 나트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금 결정체의 99.9%가 염화나트륨입니다. 수분 0.1%, 불용해성물질이 20 ppm, 철분 1.5ppm, 구리도 아주 소량 있다고 합니다.
  소금하면 떠오르는 것은 짠 맛입니다. 소금에 있어서 짠 맛은 소금의 생명이고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이라고 말씀하신 소금의 맛이란 짠 맛입니다. 소금을 먹으면서 단맛을 얻기 위해 먹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설탕을 먹어야 하지요. 소금을 먹으면서 신맛을 원하거나, 쓴 맛을 얻기 위해 먹지 않습니다. 소금의 맛은 짠 맛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짠 맛을 내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소금에게 있어서 짠 맛은 소금의 성분이며, 소금의 본질입니다. 짠 맛은 소금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본질이란 생명이고, 사람다움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생명이 없어진다면, 사람다움이 없어진다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금은 어떤 물질에 짠 맛을 만들어 넣어서 소금이 된 것이 아닙니다. 바닷물에서 소금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소금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짠 맛을 혼합하거나 주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란 이미 짠맛을 가지고 태어나서 짠맛을 가지고 죽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소금이 숙성되어 짠 맛이 없던 것이 짠 맛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사람인 것처럼, 소금은 만들어질 때부터 짠 맛을 가지고 소금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금에게 있어서 짠 맛은 생명과 같고, 본질입니다. 짠 맛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소금은 저 혼자 있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이 가지고 있는 짠 맛을 목적대로 사용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소금은 두고 보라고 있는 관상용이 아닙니다. 소금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나 애완용 동물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소금은 짠 맛을 내기 위해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용할 때,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소금이 자기 역할을 할 때 소금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소금이 귀하던 시절에는 소금이 돈과 같이 통용되었고, 소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금이 보석은 아닙니다. 그냥 두고 보아도 아름다운 물질은 아닙니다. 소금은 사용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사용될 때 가치가 있습니다.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속담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기가 막힌 맛을 내는 소금이 있어도 소금 자체로 그냥 존재하면 아무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 녹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4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알이라는 존재는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밀알이 죽어져 분쇄되어야 밀가루가 되든지 뭐가 됩니다. 그냥 있어서는 한 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거나, 분쇄되어 밀가루가 될 때 가치가 드러납니다. 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만약 소금이 말할 수 있어서 소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면 소금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소금아, 너는 왜 이 땅에서 살고 있느냐?” “너는 왜 이 땅에 존재하느냐?” 소금의 존재 철학을 묻는 질문입니다. 소금은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을 위하여 존재한다.” 소금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소금은 음식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생선을 절이기 위해 존재합니다. 맛을 위해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맛이란 단지 음식의 맛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소금의 역할, 소금의 기능, 소금의 정체성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소금이 자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소금이 소금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소금으로써의 정체성이 상실되어, 다시 말하면 소금의 짠 맛을 잃어버려서 이것이 소금인지, 하얀 모래인지, 그냥 쓰레기인지 분별이 안 된다면 소금은 쓸모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리스도인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연말마다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의 손길을 전하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작년에는 사상 최고 47억 원이 모금되었습니다. 이는 1928년부터 해 온 모금 중 최고의 모금이랍니다. 서울 명동 모금에서 최고의 액수인 1억 1000만 원짜리 수표를 받았고, 90세 노부부가 각각 1억 원씩 2억 원을 후원금으로 내놓아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한편, 우리교회 사회봉사부가 돕고 있는 복지시설에 방문하여 사랑의 선물을 전했는데, 금년에 복지시설에는 예년에 비해 후원과 선물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영화 도가니 후유증도 있는 것 같고, 뉴스로 보도되는 비정상적인 사회복지 시설의 잘못된 운영 실태 보도들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단하게 깨달을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비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우리나라 국민들이 사랑이 메마른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데에다가 사랑을 후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열매니 방송국에 불우이웃돕기 후원 모금이라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금년에 예년 같지 않다고 합니다.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성금을 내면 그것이 제대로 쓰이는 지, 성금 관리하는 직원들 월급으로나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또 중간에 해 먹는 놈이나 년은 없는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을 만한 데는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아직 소금의 맛을 내는 곳에는 소금의 맛을 내도록 돕겠다는 뜻입니다. 소금으로 인정하겠다, 소금을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하여 봉사하는 지, 무엇을 위하여 활동하는지가 분명하고,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지를 밝힌 대로 하고 있다면 그 가치는 존중받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해 놓고서, 교회가 세상에 진리와 사랑과 생명을 전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 놓고서 다른 모습으로, 다른 목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니까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리고, 생명이 없으니 비판받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하지 않고 어떤 잘못을 하면 사람들로부터 그 잘못에 대해서만 질책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써의 존재 방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기대에 못 미치니까 그들은 가차 없이 질책하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도 부인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을 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많이 안 읽는 것, 기도를 안 하는 것, 헌금을 드리지 않는 것, 예배에 빠지는 것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뭐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판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조차도 행하지 않는 온갖 추악하고 더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안 그런 척 하면서 할 짓을 다하니 기가 막힌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소금입니다.
  교우 여러분, 소금이 소금의 맛을 내듯,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맛을 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듯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의 맛을 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을 책임지는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1월 01일
신문수 목사

List of Articles
주일예배 설교
 영원한 청년
· 일시  2012년 05월 20일
· 말씀  여호수아 14장 6-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큰 복음에 올인하라 !
· 일시  2012년 05월 13일
· 말씀  마태복음 13장 44~46절
· 설교  정지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가정의 회복
· 일시  2012년 05월 06일
· 말씀  에베소서 5장 31-6장 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 일시  2012년 04월 29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숯불 위의 생선과 떡
· 일시  2012년 04월 22일
· 말씀  요한복음 21장 1-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문들을 닫은 제자들
· 일시  2012년 04월 15일
· 말씀  요한복음 20장 19-2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내가 주님을 뵈었어요
· 일시  2012년 04월 08일
· 말씀  요한 20장 11-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 일시  2012년 04월 06일
· 말씀  베드로전서 1장 18~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침묵하신 예수님
· 일시  2012년 04월 01일
· 말씀  이사야 53장 7-9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모든 믿는 자에게
· 일시  2012년 05월 01일
· 말씀  로마서 1장 16-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십자가를 참으사
· 일시  2012년 03월 18일
· 말씀  히브리서 12장 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누가 크냐?
· 일시  2012년 03월 11일
· 말씀  누가복음 22장 24-30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일시  2012년 03월 04일
· 말씀  고린도전서 2장 1-5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만약
· 일시  2012년 02월 26일
· 말씀  요한복음 11장 17-4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
· 일시  2012년 02월 19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넬료의 열심
· 일시  2012년 02월 12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24-3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고넬료의 가정
· 일시  2012년 02월 05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그가 경건하여
· 일시  2012년 01월 29일
· 말씀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빛 (ii)
· 일시  2012년 01월 22일
· 말씀  마태복음 15장 14-16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빛 (i)
· 일시  2012년 01월 15일
· 말씀  마태복음 5장 14-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소금 (ii)
· 일시  2012년 01월 08일
· 말씀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우리는 세상의 소금 (i)
· 일시  2012년 01월 01일
· 말씀  마태복음 5장 13절 말씀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빛이 있으라
· 일시  2011년 12월 31일
· 말씀  창세기 1장 1~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소통하러 오신 하나님
· 일시  2011년 12월 25일
· 말씀  마태복음 2장 1-12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