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 (시편 7편 8-17절) |
폭염, 열대야, 그리고 올림픽 경기 중계로 안해 잠을 설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고, 감격적입니다. 이 작은 나라가 수십억, 수억 명의 인구에서 뽑은 선수들과 당당히 겨루어 이기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대단한 나라입니다. 정치인들만 잘 하면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2012년 런던 올림픽은 유례없는 판정 번복, 오심, 편파 판정등으로 얼룩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런던올림픽을 런던오심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박태환 선수의 400미터 자유형 예선에서 실격 판정과 번복, 유도 남자 66kg급 조준호 선수에 대한 판정 번복에 이어 펜싱에서 1초를 남겨 두고, 1초만 지나면 우리나라 신아람 선수가 결승에 진출하여 금메달을 놓고 경기를 하게 되는 상황에 시계가 멈추어 버려 상대 선수가 계속 공격을 수차례나 해도 1초가 흐르지 않아 결국 공격을 당해 패배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져 온 국민과 세계 언론이 시끄럽습니다. 우리나라 선수이면서 또 하필이면 신씨 성을 가진 선수가 그런 일을 당해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우리 교회 오르간 반주자인 정아람 선생은 이름이 똑같으니 어떻겠습니까? 세계 언론은 이번 펜싱 오심 사건이 “가장 논쟁거리 될 사건”이라고 했고, 세계 올림픽 역사상 5대 오심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심판진들의 경기 운영과 결과에 대한 잘못된 처리가 스포츠정신이 사라지게 하고, 특히 우리나라 선수들이 그동안 오직 올림픽만을 위해 준비한 시간과 핏방울 같은 땀이 허무하게 되어 버린 것 같아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속이 터집니다. 선수 당사자들은 억울한 마음에 얼마나 가슴을 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들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이 탔는데, 다른 사람이 지독한 방귀를 꼈습니다. 몹시 고통스럽지만 낯선 사람이라서 뭐라 할 수도 없고 참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가 안 그런 척 딴전을 부립니다. 속이 뒤집어 집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먼저 내렸습니다. 그리고 먼저 내린 자의 방귀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탑니다. 막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타고 있는 사람을 아래위로 쳐다봅니다. 억울한 시튜에이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억울함으로부터 시작하여, 크고 치명적인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은 이런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억울한 일로 상처를 잔뜩 받습니다. 평생직장에서 일하고 퇴직 한 뒤, 그 퇴직금을 노린 사기꾼들에 의해 퇴직금을 날린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디어로 제출한 작품이 회사 상관에 의해 송두리째 빼앗기고,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할 때, 우리는 가슴을 치며 씩씩 거립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공사장에 나가 땀 흘려 일했는데 업주가 부도를 내고 도망가서 한 푼도 못 받는 일도 생깁니다. 나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했는데, 술수를 부리고 아첨하고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승진하는 사람이 있고, 나는 승진에서 제외될 때, 속상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왕따를 당하고, 불의가 판을 치고, 세상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상식과 법과 정의가 통하지 않을 때 고통스럽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 당하고, 고난당하고, 핍박이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남들에게 보이는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봉사하는 사람은 알아주고, 묵묵히 봉사하고, 진실하게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인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는 괴롭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다른 게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시편 7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신복 베냐민 지파의 구시라는 사람의 공격을 당하면서 억울하고 부당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사울 왕에게 오해를 받고, 시기를 당하고, 죽이려는 공격을 당하며 억울하게 쫓기는 세월이 10년이나 됩니다. 그러나 그는 10년이라는 세월의 고통 중에서 늘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 편에 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심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다윗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누구나 억울한 일을 겪고 부당한 고통을 당할 수 있는 세상을 살면서 어떤 신앙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결단코자 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정당한 경기, 멋진 승부가 이루어지려면 심판이 중요합니다. 심판에 따라 경기가 재미없는 경기가 되기도 하고, 선수들의 실력을 200% 발휘하는 경기가 되기도 하고, 또는 경기를 준비한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허탈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정치 못한 심판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잘못된 오심으로 인한 피해를 당한 선수들은 엄청난 슬픔과 분노와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판이 중요합니다.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한 뒤 부당하게 해고된 김경호 교수는 교수지위 확인소송에 패소하고 항소심마저 정당한 사유 없이 기각되자, 담당판사를 찾아가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며 석궁으로 위협하기에 이릅니다. 격렬한 몸싸움, 담당판사의 피 묻은 셔츠, 복부 2cm의 자상, 부러진 화살을 수거했다는 증언… 곧이어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사법부는 김경호의 행위를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테러’로 규정, 피의자를 엄중 처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피의자 김경호가 실제로 화살을 쏜 일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하면서, 속전속결로 진행될 것 같았던 재판은 난항을 거듭합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법정, 엇갈리는 진술! 결정적인 증거 ‘부러진 화살’은 행방이 묘연한데… 상식 없는 세상에 원칙으로 맞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끝났습니다. 딸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 회복 중이었는데, 가해 차량 운전자가 복잡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사를 매수하여 죽게 되고,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재판에 대해 분노하여 딸의 명예회복과 권력과 돈으로 진실을 왜곡, 은폐하려는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해 나가는 형사이며, 아빠인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 등에 이런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재로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만큼 억울한 일을 당한 경험들이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운동경기에서는 공정한 심판이 있어야 하고, 법정에서는 공정한 재판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다윗은 자신의 억울하고 부당한 고통 속에서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운동 경기의 심판은 사람인지라 실수하여 오심하기도 합니다. 돈에 매수되어 경기 운영이 어처구니없을 수도 있습니다. 법정의 재판부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역사와 우리 개인의 삶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재판장이시라는 사상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역사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의 공정하고 의로운 재판이 없다면, 인간 세상은 불법 투성이의 죄악의 역사를 만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윤리는 문란해서 힘이 센 자가 이기고, 가진 자가 정의가 되고, 돈이나 힘이나 권력이 양심과 윤리와 선과 공의를 모두 무너뜨릴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이라면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온통 억울한 일, 불의한 일, 부정한 일들이 자행이 되어도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인간 세상은 악의 구렁텅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셔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의로우신 재판장이십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 10절에,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칼을 갈고, 활을 이미 당기어 준비하셨고, 진노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다윗은 어떤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호소합니까? 다윗은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재판하실 때에 우리의 무엇을 중요하게 보시고 판단하실까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십니다.(9절)
다윗은 먼저 의로우신 하나님께,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심판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다윗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당한 고통을 당하면서 자신의 삶에 죄가 없는지 점검하는 기회를 가지면서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만일 그런 곤욕, 억울함을 치를 만한 실수와 잘못이 있으면, 자기는 불평, 불만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만일 그런 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원수가 자기 생명을 짓밟고 자기 영광을 진토에 굴러 떨어지게 해도 아무 대꾸도 반항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먼저 자신을 살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재정 중 공금 유용과 횡령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양심과 결백을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드러난 사실은 그가 결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금을 횡령도 하고, 유용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유용과 횡령한 돈을 반환하고, 자기 가족과 함께 간다온다는 말도 못하고 그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양심을 바르게 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외모를 보지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느낄 때를 보면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보고,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겉모양만을 보고 평가하고, 판단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16잘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의로운 심판을 하십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심판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시고 심판하십니다. 겉으로는 그렇듯 해도 속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먼저 아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나의 겉만 보고 억울하게 비방하고 부당하게 대할지라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위로 받고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판결을 받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지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동기를 보시고 자세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면서 결론처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자들에게 주님께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7장 24절 이하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 집을 반석위에 짓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의미 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동기와 자세를 다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지, 아니면 자기의 뜻과 자기 욕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정확히 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살고 있는지를 분명히 구별하여 보십니다.
두 사람이 주인이 준 설계도를 따라 집을 짓습니다. 한 사람은 집을 지으면서 기쁘고 즐겁게 집을 지었습니다. 그 집에 누가 살까? 다 지어진 집을 보시면 주인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면서 기대하면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은 집을 짓는 내내 힘이 든다고 짜증내고, 주인이 왜 집을 지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면서 집을 지었습니다. 두 종이 지은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설계도대로 잘 지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두 집 다 나무랄 데 없이 잘 지은 집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두 종이 지은 집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구석구석에 함께 쌓여진 그 무엇을 보았습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으로 지었느냐? 짜증과 불평으로 지었느냐를 다 알고 계시고, 심판하십니다. 결과는 같을 지라도 어떤 마음의 자세로 행했느냐를 보십니다.
사람들은 결과만을 보지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과정을 보시고 방법을 보십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는데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습니다. 그 부부는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거액을 헌금을 드렸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재산이 많아도 하나님께 인색하여 사람들에게는 만 원짜리 식사, 십만 원짜리 식사도 잘 사면서 주일 헌금은 만 원짜리 헌금할 때는 덜덜 떨고, 천 원짜리 한 장으로 헌금하는 사람도 많은데 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헌금 액수로 보면 칭찬 받아야 마땅하고,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야 할 텐데, 헌금을 드리고서는 즉사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고, 사도들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헌금 속에 거짓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렙돈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5만원이라고 한다면 두 렙돈은 800원이 채 안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헌금을 하였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과 방법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꿩 잡는 게 매라고. 결과만 좋으면 시작과 과정은 좀 잘못되었더라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작과 과정과 방법이 잘못 되었으면, 결과가 좋아 보여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어떠하든, 방법이야 잘못되든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재판장 하나님 앞에서는 책망 받고 심판 받을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둘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심어 놓고 선을 거두기 기대하지 말고, 거짓을 심어 놓고 진실을 거둘 것을 기대하지 말고, 진노 받을 짓을 하고서 칭찬과 상급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선을 심은 사람은 반드시 선을 거둘 것이고, 의를 심은 사람은 반드시 영광을 거둘 것이며, 생명을 심은 사람은 반드시 영생을 거둘 것을 믿고 소망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유도 80kg 급 김 재범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가 결승전에서 이기고 난 후 매트에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으고 “주여!”하고 외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리고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올리면서 입으로 중얼중얼 하는데, 입모양을 보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4년 전 중국 베이징 올림픽 때에 은메달을 땄습니다. 이번 런던 올림픽 결승전 상대 선수인 독일의 비쇼프 선수에게 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일의 비쇼프 선수가 김 재범 선수에게 져서 은메달을 따고, 김 재범 선수는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지난 3일 금요일 아침 방송시간에 전화로 연결된 인터뷰에서, 결승전이 끝나고 비쇼프 선수가 김 재범 선수에게 축하하면서, 비쇼프 선수가 자기에게 4년 전에는 자기가 이겨서 금메달을 땄고 김 선수가 져서 은메달을 땄고, 이번에는 김 선수가 이겨서 금메달을 땄고, 자기가 져서 은메달을 땄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묻더랍니다. 그에 대해 김 재범 선수는 자신은 4년 전에 은메달을 땄을 때에도 기뻤고, 이번에도 기쁘기 때문에 자신은 진 적이 없었다고 대답했답니다. 사실은 분명히 4년 전에 비쇼프 선수에게 졌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것으로 경기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이길 것을 꿈꾸었기에 졌다고 생각을 안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제 경기에서 졌다고 영원히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억울한 일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낙심할 일을 당해도 오늘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내일이 있고, 세상이 나에게 행하는 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고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양심과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여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본을 보이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분노할 일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큼 억울하고 답답하고 분노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고소한 죄목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는 세 가지 죄목입니다. 이 죄목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한 죄목입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난 뒤,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미혹한 적이 없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고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줄일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들이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치던 무리들은 온데간데없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칩니다. 3년 동안 따라다니며 훈련 받은 제자들이 다 주를 버리고 도망 가버렸습니다.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마저 주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체포당하신 예수님을 가죽 끈에 쇳조각과 동물의 뼛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서른아홉번의 매질을 합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허연 뼈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손으로 때립니다. 침을 뱉습니다. 모욕을 줍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론도, 아무런 반항도, 어떤 능력이나 기적도 행하지 않고 무리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끝났다면, 억울한 죽음, 분노할 죽음입니다.
그러나 3일 뒤, 죽음은 부활로 바뀌었습니다. 패배하는 것 같았지만 승리하셨습니다. 억울한 고난과 죽음은 인류의 대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치욕을 받으시고 멸시를 받으신 것은 영광으로 바뀌었습니다. 분노할 만한 그 사건은 곧 사랑과 희생과 은혜의 사건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대적당했지만, 이제는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이며, 복음의 진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로 모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바라보고, 소망하며, 믿고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언제나 잊지 말고, 놓치지 말아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억울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거나 누명을 쓰거나 부당한 대우를 당하거나 불의한 일로 고통을 당할 때, 정말로 억울한 일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비난이 사실은 아닌지, 내가 잘못한 것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보복을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들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방패 되시는 하나님께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십니다. 겉모양을 보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심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위보다 마음의 동기와 자세를 보시고 심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과만 보지 않고 과정과 방법을 보시고 심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지를 보십니다. 이 믿음으로 이 세상의 삶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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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8월 05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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