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신앙의 힘 (창세기 45장 1~8절) |
중국 전설에 염라대왕 앞에 이승에서 세 청년이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염라대왕은 이승에서 온 사람을 심판하려고 명단을 보니 명단에도 없는 청년 세 명이 저승에 끌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염라대왕은 그 청년들에게,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잘못 왔구나! 그런데 여기까지 먼 길을 왔으니 내가 너희들을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 줄 것이고, 소원 하나씩 들어주겠다! 뭐든지 말해 봐라!” 그리하여 염라대왕은 세 젊은이에게 차례대로 소원을 물었습니다. 첫 번째 청년에게, “자네는 내가 뭘 해주면 좋겠나? 소원이 뭔가?” 첫 번째 청년은 “예, 저는 돈이나 많이 주십시오. 제가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돈이 최고입니다. 전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는 돈을 가지고 내려가라! 그리고 두 번째 청년, 자네는 소원이 뭔가? 내가 뭘 해주면 좋겠는가?” “예, 저는 돈 같은 거는 필요 없습니다. 권력이 필요합니다. 제가 살면서 보니까 권력 가지고 있으면 돈도, 사람도 저절로 내 것이 되더라구요.” “그래? 너는 권력을 가지고 가거라! 그리고 세 번째 청년, 너는 소원이 뭔가?” 세 번째 청년도 염라대왕에게 자기 소원을 말했습니다. “예, 저는 돈, 권력,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좋은 집 한 채 짓고, 최고의 미인을 아내로 삼아 좋은 음악 듣고, 좋은 음식 먹으면서 걱정 없는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랬더니 염라대왕이 이 세 번째 청년의 말을 듣고는 그 청년을 한 참 쳐다보더니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야! 이 놈아! 그런 곳이 있으면 내가 가서 살겠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이야기일까요? 여러분 가운데 ‘나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잘못 끌려갔다가 소원이 뭐냐고 물으셔서 소원을 이루어서 다시 이 땅에 와서 살아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이야기의 의도를 못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벽한 조건과 완전한 환경, 걱정 하나 없는 삶이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문제가 생기고, 아픈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고, 외로운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만나고, 뜻하지 않은 천재지변도 만나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만납니다. 억울한 일도 겪고, 답답한 일도 겪고, 수치스러운 일도 겪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온갖 역경과 어려운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삶은 그런 것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 어떻게 해결해 내느냐? 어떻게 극복하느냐? 에 따라 행복한 삶을 살기도 하고, 불행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성공한 인생이 되기도 하고, 실패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회복탄력성이란 마음의 근육의 힘을 말합니다. 오뚜기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그런 힘을 말합니다. 그 책에는 역경과 어려움을 만난 사람들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가지 문제와 과제들을 만난 사람들이 마음의 힘으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하고 회복해 나가느냐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45세의 나이에 미국 땅에서 차량 전복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이 상묵 교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비보이계의 최고의 댄서였는데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28세의 우 정훈 씨, 부산에서 고깃집을 하다가 망한 류 춘민씨, IMF때 노숙자였다가 두부공장을 경영하는 김 동남 사장 등 그들이 자신에게 찾아온 역경과 위기를 통해 어떻게 다시 회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책에서는 긍정심리학자들의 연구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긍정심리학은 심리학의 한 분야입니다. 그동안 심리학이 병적인 심리 상태를 치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긍정심리학은 정상적인 사람을 더욱더 고양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문입니다.
이 긍정심리학에서 최근 10여 년간 여러 가지 긍정성 증진 훈련 방법을 연구했는데, 그 훈련 방법 중에 단연 최고의 효과를 지닌 것으로 입증된 것이 바로 감사하기 훈련입니다. 특히 감사하기 훈련의 효과는 신경심장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감정이나 마음의 변화가 심장박동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에는 심장이 뇌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받아 수행하는 기관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신경심장학에서는, 심장은 마치 뇌처럼 일종의 지각 능력이 있는 기관이며, 뇌와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학습하고, 기억하고, 독자적으로 기능적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기관이라고 말합니다. 심장과 뇌는 서로 정보를 주고 밀접하게 주고받으며 상호 소통합니다. 두뇌의 판단에 따라 심장박동수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거꾸로 심장에서 보내는 특정한 신호가 감정이나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 박동과 감정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한 학자들은 심장박동수를 가장 이상적으로 유지시켜주는 긍정적 정서가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는데, 결론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편안한 휴식이나 심지어 수면 상태에 있을 때보다도 심장박동수의 변화주기를 더욱더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사람의 마음과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것은 긴장을 푸는 명상이나, 기분 좋은 일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긍정심리학이 지향하는 최선의 마음의 상태이며, 긍정성 향상을 위한 마음의 훈련을 한다면 감사하기 훈련이 최선이라는 뜻입니다.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훈련, 즉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강화시키는 훈련이 곧 감사하기 훈련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일반 학문인 긍정심리학에서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감사하는 생활, 감사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연구하여 발표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왜 그렇게 신앙의 위인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했는지를 더욱 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 신앙은 우리의 심장을 안정시키고, 뇌의 긍정성을 높이고, 긍정적 정서가 향상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고난과 역경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킵니다.
본문 말씀에는 회복탄력성 지수가 참으로 높았던 인물이 나옵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 애굽 궁중에서 만나는 장면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열일곱 살 때 꿈을 꾸었습니다. 꿈 꾼 이야기를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들이 요셉을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꿈 꾼 내용이 요셉의 부모와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한 나머지 형들에게 심부름 온 요셉을 애굽 상인들에게 은 20냥을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격으로 열일곱 살짜리 요셉은 졸지에 타국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당황하고 황당했을까요? 요셉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배신감, 미움, 분노, 증오심, 복수심? 그렇게 애굽에 팔려온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의 종으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10여 년 동안 생활하며 주인 보디발에게 신임을 얻었습니다. 성실함과 신실함을 인정받아 주인집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이 이십대 후반 청년이 되었을 때, 보디발 장군의 아내는 남편이 없을 때 계속적으로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청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력한 유혹을 요셉이 거절하자 그 여주인은 괴씸죄를 걸어서 요셉이 자신을 강간하려했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이 스물일곱 살입니다. 요셉의 인생이 참으로 기구하지 않습니까? 감옥에서도 요셉은 성실함이 인정되어 감옥 간수장이 요셉에게 감옥의 일을 다 맡길 정도였습니다. 그 감옥은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왕의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함께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두 사람이 각각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요셉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은 풀려나 복직되고, 떡 맡은 관원은 매달려 처형당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은 풀려난 뒤에 요셉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더 흐른 뒤, 요셉이 감옥 생활 3년이 되었을 때, 애굽의 왕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 어느 누구도 해석하지 못하게 되자 뒤늦게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하고서 왕에게 소개하여 드디어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왕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 주었고, 왕은 마침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을 하였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한 내용 그대로 7년간 풍년이 있었고, 그 뒤 7년 동안 흉년이 들기 시작하여 근동지역 모두 극심한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여러 나라에서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왔고, 야곱의 아들들, 즉 요셉의 형제들도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본문 말씀 앞 창세기 42,43, 44장의 내용은 생략하고, 그렇게 만나게 된 형들에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요셉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살아계십니까?" 형들은 놀라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팔아버린 동생이 애굽이라는 당시 가장 크고 강대한 나라의 총리가 되어 떡 서 있으니, 그야말로 ‘놀라고 자빠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애굽으로 유학을 떠나 소식이 끊기어서 생사를 알지 못하다가 그렇게 만나도 놀랄 일인데, 자신들이 시기하고 미워하여 노예 상인에게 팔아넘긴 동생을 애굽 궁정에서 그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놀라고 자빠질 일’을 넘어서서 ‘이제 죽었다!’는 생각과 함께 온 몸이 얼어붙었던지, 사시나무 떨듯 떨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가정하여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나쁜 짓을 했는데, 그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여러분이 그 앞에 서게 되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당할 보복에 어쩔 줄을 모를 것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때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내 앞 길이 어떻게 될까? 나는 이제 끝났다! 저 사람 손에 내 앞 길이 달렸구나!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형들에게 요셉이 말을 합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 나옵니다. 4-8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요셉의 마음을 느끼면서 읽어 보겠습다.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 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의 말에서 요셉의 표현에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을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라고 말했고, 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형들이 애굽에 팔았지만,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형들보다 먼저 애굽에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팔린 자가 아니라 보내진 자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 전체를 사람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철저히 믿었고, 자신의 삶에 벌어진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세 가지 신앙이 있습니다. 에벤에셀 신앙, 임마누엘 신앙, 여호와 이레 신앙입니다. 삶의 시제에 초점을 맞출 때 가져야 하는 신앙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가져야 할 신앙은 에벤에셀 신앙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말에 담긴 뜻은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과거를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믿습니다.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에벤에셀 신앙은 ‘현재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라는 임마누엘 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의 말입니다. 과거에도 도우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라는 단순한 고백만이 아니라 ‘지금 나와 동행하시고, 나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임마누엘 신앙은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에도 함께 하실 것이고, 지금까지 도우신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내 앞길도 예비하여 주실 것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 신앙입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의 말입니다.
요셉의 삶을 보면, 이 세 가지 신앙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에벤에셀 신앙, 임마누엘 신앙, 여호와 이레 신앙! 이 신앙은 신약성경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이 신앙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자신은 형들에 의해서 팔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애굽에 왔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을 통하여 요셉을 애굽에 먼저 보내셨습니다. 요셉은 바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 비록 자신이 종으로 팔려왔고, 종살이를 하고, 누명을 쓰고, 감옥의 죄수로 살게 되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으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고백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감사 신앙이며, 요셉의 회복탄력성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다윗에 광야에서 10여 년 동안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도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 찬양하는 시를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에서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풀무불에 던져질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건져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바벨론의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을 섬기지 말라는 왕의 명령에도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고 했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서 열매를 딸 수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자신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미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에베소 교회와 빌립보 교회와 골로새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주안에서 감사하라고,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서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믿고,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마침내 꿈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감사하는 고백이 된 것입니다.
우리 삶을 사람의 관점, 이 세상의 관점,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는 땅의 관점에서 보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물질세계에 모든 가치관을 두고, 소유에 집착하고, 욕심 부리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감사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못 마땅합니다. 모든 것이 불평거리입니다. 모든 것이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 인생만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선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보내셨다, 이 일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다. 이 역할을 지금 나만이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셨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계획과 뜻이 있으셔서 내가 겪는 일이고, 이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일을 해결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면 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런 감사 신앙으로 살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아주 작은 것도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것도 감사하지요, 아직 더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또 살다가 죽으면 영생을 얻었으니 감사하지요. 이 세상에 올 때, 알몸으로 태어나서 지금 보니까 가진 것도 많고, 누린 것도 많고, 경험한 것도 많아 감사하지요. 내 곁에 가족을 주시고, 친구를 주시고, 이웃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우들을 주셨으니 감사하지요.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어 감사하지요. 하나님을 믿으니 이 땅의 세계만 알고 살아가다가 하늘의 세계, 신령한 세계, 영원한 세계를 알게 되고, 그곳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니 감사하지요. 이것을 모르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양정교회 교인이 되어서 이렇게 신앙생활하니 감사하지요.
때론 우리가 감사하는 신앙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무엇인가 잠시 거두어 가실 때가 있습니다. 있다가 없어지면 있었던 것, 있었던 때가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 또 하나님께 감사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잖아요)”
감사 신앙은 행복을 깨뜨리는 불행한 것들, 불행한 일들을 행복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 신앙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친밀하게 만들며, 관계를 깨뜨리는 것에 대해 용서와 너그러움과 은혜를 베푸는 관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감사 신앙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고통스러운 경험, 상처들을 자신을 연단하고 성숙시키는 일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을 자신의 장점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했습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고통스러운 경험, 상처들에 묶여 매일 형들을 원망하고, 복수심에 불탔다면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성실함과 신실함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억울함과 분노,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탔다면 감옥의 간수장의 눈에 요셉이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매 형통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은 요셉의 마음 중심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고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가 임하고, 그로 말미암아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형통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 신앙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주위를 밝게 합니다.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역경과 어려움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 추수감사주일에 그저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끝나는 감사가 아니라 감사 신앙으로 살아서 심장도 튼튼해지고, 회복탄력성도 좋아지고, 감사 신앙의 힘이 여러분들의 삶속에 크게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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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01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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