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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4261]
· 설교 일자 : 2013년 01월 27일
· 본문 말씀 : 창세기 13장 1~13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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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창세기 13장 1~13절)

  여러분, 지난해에 이야기한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그 이야기 말고,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이야기의 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았습니다. 거북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토끼는 거북이를 사랑했답니다. 토끼는 거북이의 너무나 느리고 굼뜬 자신에 대해서 자책하며 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토끼는 어떻게 해서든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었습니다. "어이~ 느림보 거북아! 나랑 경주해보지 않을래? 너 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지만 말야~ 어때?" "토끼야, 내가 비록 느리지만... 너와 경주를 하겠어. 빠른 것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어!" 토끼는 기뻤습니다. 그리고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거북이는 토끼를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토끼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쫓아올까? 설마 포기하는 건 아닐까?' 앞서가는 토끼는 달리면서도 거북이만을 생각했습니다. 어느새 거리가 너무나 차이가 나버렸습니다. 토끼는 거북이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토끼는 길가에 누워 자는 척을 했습니다. 그 다음은 아시죠? 거북이는 길가에 잠든 토끼를 추월해서 경주에 이겼습니다. 잠든 척 누워있던 토끼는 이제 거북이가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을 생각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경주가 끝나고 사람들에게 거북이는 근면과 성실의 상징이 되었고, 토끼는 자만과 방심의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토끼는 그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토끼 자신의 희생으로 거북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더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한다면 분명 거북이에게 진 토끼가 한심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속의 숨은 이야기를 안다면 토끼를 자만과 방심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거북이를 치유해 준 힐링의 상징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숨겨진 그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보면, 빨간 신호등이 초록 신호등으로 바뀌면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앞 차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있으면 기다리다가 클락션을 빵빵 하고 누릅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으면 ‘앞차 운전자는 뭐하는 거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옆 차선으로 비켜 나와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 때에 보면, 앞차 앞에 또 다른 앞차가 문제가 생겨서 차가 서있는 바람에 앞차가 못 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눈이라는 것은 차 한 대 앞을 제대로 못 본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보려고 하지 말고,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는 그대로인 경우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다양한 관점과 성격, 성향, 관심과 요구를 가지고 나를 보기 때문에 나의 어떤 한 면, 어떤 한 사건을 가지고 각자 분석, 평가,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쉽게 말을 합니다. 어떤 경우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여러 교회에서 여러 종류의 교인들을 겪으면서 나 또한 보이는 데로만 보고 잘못 오해할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신앙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를 아는 동창, 직장 동료들로부터 들려오는 말이 교회에서와 다르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반대로 교회에서는 별로 봉사도 안 하고, 예배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가는 교인들을 보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나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보는 교인이지만 나중에 그를 아는 사람들, 이웃들, 직장 동료들을 통해 그가 삶의 현장에서 신앙인으로 살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런 때마다 내가 보는 대로가 전부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를 유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 설교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아 살던 롯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브람과 롯입니다. 아브람은 롯의 삼촌이고, 롯은 아브람의 조카입니다. 이 둘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그동안 고향, 친척, 부모의 집을 떠나온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 땅에도 내려갔다가 왔습니다. 애굽에 갔다가 재산이 더 증식이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아브람과 롯의 가축들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들이 벧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불어난 가축 수 때문에 함께 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 사이에 풀과 물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롯에게 서로 다투지 말고, 네가 먼저 떠나가 살 땅을 선택하면 자신은 그곳 말고 다른 곳에서 거주하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아브람의 제안에 따라 롯은 요단 들판이 펼쳐져 있는 동쪽을 택했습니다. 벧엘은 해발 800미터에 위치한 언덕이었기에 그곳에서 요단들의 남쪽 경계인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롯이 바라본 요단 들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더라.’고 표현되었을 정도로 좋아 보였습니다. 롯이 바라본 땅은 비옥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가축을 거느린 롯의 관심이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롯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왜 잘못된 선택일까요? 비옥한 땅, 풀과 물이 풍부한 땅은 자신의 가축을 먹이고 기르는데 얼마나 좋은 조건인데 왜 잘못된 선택이란 말입니까?
  그곳에서 벌어질 사건들과 결말을 보면 롯의 선택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 창세기 13장 다음 장인 14장에는, 소알 땅의 비옥함과 눈에 보이는 발달한 문명만을 보고 그곳을 선택한 롯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 포로로 잡혀 갑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나중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내린 하나님의 불 심판을 겪게 됩니다. 롯은 눈으로 보기에 좋아 보여 선택한 땅이 얼마 후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불로 다 타버릴 소돔과 고모라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롯은 결국 그가 그렇게 지키고 싶었고, 늘리고 싶었고, 누리고 싶었던 재물, 재산, 가축들을 모두 두고 떠나야 했고, 하나님의 심판의 유황불로 인해 연기와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되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롯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의 근거를 보이는 것에서부터 찾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존 필립스는 롯의 생애의 시점에서 그의 처한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롯은 헌신에 소극적이었고, 욕망은 세속적이었으며, 결정에 있어서는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였다.”
  롯은 보이는 것만 보고 선택하였습니다. 그의 선택은 극히 세속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정적 물 공급이 가져다 줄 안락만 생각했습니다. 롯이 선택한 물질적 풍요 가능성 안에는 그에 비례하여 악한 인간관계의 복잡한 역학이 얽혀있습니다. 그 안에 죄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롯은 이것을 보는 눈이 없어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습니다. 롯의 선택은 합리적인 것 같았지만 보이는 것에만 의존한 결정이었습니다. 롯의 내리막길은 보이는 것에 기초한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의 경우처럼 보암직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 안목의 정욕의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물질적인 욕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고, 보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보이는 것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은 탐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소탐대실, 즉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롯이 아브람에게 “어찌 삼촌을 떠나라고 하십니까?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잠간 이름이 거의 비슷한 룻을 생각해 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롯이 낳은 자손이 모압과 암몬인데, 룻은 모압의 자손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다시 모압 땅에서 유대 땅으로 가려고 하면서 과부가 된 며느리에게 자신을 떠나가라고 할 때, 룻은 시어머니에게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롯도 삼촌 아브람에게, “삼촌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삼촌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 친척, 혈육을 떠나 여기까지 온 제가 삼촌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롯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롯은 재물을 지키는 일에 집착함으로 삼촌과의 관계에서 예의도, 삶과 신앙의 환경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롯은 믿음보다 보이는 것, 현세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롯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히 여겼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려고 했다면, 롯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고향, 친척, 부모의 집을 떠났고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면, 그는 아브람처럼 가나안 땅을 선택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눈앞에 보이는 ‘별 볼 일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매력적인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고 지금 당장의 세상의 풍요를 선택했습니다. 믿음의 선택이 아니라 보이는 부귀영화를 선택하였습니다.
  믿음의 선택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 더 가치를 둔 선택은 그 다음 단계에서 보이는 것을 위해 더 타협하고 물러서고 소중한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들에게도 이런 롯의 모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롯처럼 십자가의 길보다는 영광의 길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은 일보다는 이익이 되는 일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을 향해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유익을 제시하며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선택한 롯의 마지막을 보고 경각심을 느껴야 합니다. 믿음이 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보이는 것의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통치를 보셨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시면서, 들의 백합화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시고 입히심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를 보시면서 맛있는 참새구이를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참새 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식사 전에 정결예식을 소홀히 여기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이 보고서 예수님께 공격하듯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 정결 전통을 우습게 알고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밖에서 너희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 위를 거쳐 장을 지나 변기의 물과 함께 버려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법이다. 그것은 곧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눈에 보이는 더러운 것보다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의 더러운 생각들이 더 심각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죄인으로 보이는 사람, 장애를 입은 사람, 병든 사람, 버림받은 사람을 보이는 데로 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의 소원대로, 그 중심의 믿음대로, 그 중심의 갈망대로 말씀을 주셨고, 기적을 행하셨고,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이 어린아이의 신앙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어른 단계의 신앙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신앙에도 철이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우리가 철이 들면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보이는 것 뒤에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어머니께서 짜장면을 시켜주시면서 어머니께서 자신은 짜장면을 안 좋아한다고 하실 때, 철이 들기 전에는 보이는 데로, 듣는 데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면, 어머니께서 짜장면을 안 좋아해서 안 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아들이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면서 눈물을 철철 흘렸습니다. 남들이 보면 그 아들은 어머니의 회초리가 너무 아파서 운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그 아들의 눈물은 그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회초리가 예전처럼 아프지 않아서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전처럼 힘 있게 내리치시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회초리를 맞으면서 이제는 젊은 어머니가 아닌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입니다.
  신앙에 철이 들기 시작할 때가 어느 때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뜰 때입니다.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이 떠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만을 보고, 좋아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지금 돈 많이 벌고, 지금 건강하고, 지금 만사형통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에 철이 들면, 환난 가운데에도 즐거워합니다. 지금 당장 보이는 것은 환난이지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만 보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중을 보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견딘 환난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길게 누릴 것에 비하면 지극히 가벼운 고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어려움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가벼운 짐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 즉 영원하고 영구적인 것은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거나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삶을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삶은 점수를 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운동을 즐기는 지, 너희 구두 색깔에 관한 것도 아니다. 너의 머리스타일에 대한 것도 아니고, 피부 색깔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네가 어디에 살며,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또 학교시절 성적이 어떠했는지, 돈이나 옷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삶은 네가 몇 명의 친구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네가 친구가 없어서 외톨이냐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너를 쉽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것도 아니다. 삶은 네가 누구를 사랑하느냐,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삶은 믿음과 행복과 사랑에 대한 것이다. 친구와의 우정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고, 마음속의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삶은 질투를 피하고, 무지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것에 대한 것이다. 삶은 네가 무슨 말을 했으며,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느냐에 대한 것이다. 삶은 어느 한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대한 것이다. ”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 삶의 가치를 가져다 줍니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에드 다이너는 ‘월드 폴’이라는 세계 여론 조사기관을 통해 세계의 소득 상위 40개국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39위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인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원인은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 돈을 중요시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액수를 보고서 직업을 선택하기 때문에 삶의 만족이 떨어지고 행복도가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만족할 만한 상황이나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두면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게 되고, 중심이 흔들리면 쓰러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사는 데 누가 그 비교를 감당하겠습니까? 돈 비교하고, 외모 비교하고, 학력 비교하고, 집 크기 비교하고, 자가용 승용차 종류 비교하고, 하고 다니는 모습 비교하고, 심지어는 교회에 와서도 직분 비교하고, 인기도 비교합니다. 그러니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본질에서 벗어나서 엉뚱한 것으로 신앙을 채우려고 하니, 어찌 그 영혼이 평안하며 안식을 누리겠습니까? 어찌 영혼의 만족을 얻겠습니까? 영혼의 목마름이 정수기 앞에서 서성거린다고 해결됩니까? 영혼의 굶주림이 어디 뷰페식당에 가서 채워집니까? 영혼의 평안과 안식이 비싼 침대 위에 눕는다고 얻어집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비교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자꾸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신경이 곤두서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인은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하나님께 어떻게 보이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이기 위해 봉사하지 않습니다. 보이기 위해 작은이들을 돌보고 사랑을 베풀지 않습니다. 보이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오직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성경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사는 신앙인에게는 지금 보다 나중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보다 저 세상이 더 중요합니다. 천국에 마음을 두고 삽니다. 우리가 천국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육체의 눈의 기능을 통해 천국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 즉 성령과 믿음으로 천국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만이,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뜬 신앙의 사람만이 소중한 것과 버릴 것, 보물과 쓰레기,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할 줄 알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지를 확실히 알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약속 받은 가나안 땅으로 함께 출발한 아브라함과 롯의 삶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둔 롯은 고통과 불행을 겪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보이는 것을 위해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3년 01월 27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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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12년 12월 30일
· 말씀  전도서 7장 15~18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은혜를 받은 자여
· 일시  2012년 12월 23일
· 말씀  누가복음 1장 26-38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양날 칼 같은 하나님의 말씀
· 일시  2012년 12월 09일
· 말씀  히브리서 4장 12-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언약의 사자
· 일시  2012년 12월 02일
· 말씀  말라기 3장 1-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괴로워하시는 하나님
· 일시  2012년 11월 25일
· 말씀  말라기 2장 17-3장 6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 일시  2012년 11월 18일
· 말씀  말라기 1장 6-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조건적 신앙과 무조건적 신앙
· 일시  2012년 11월 11일
· 말씀  말라기 1장 1-3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