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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같이  [4816]
· 설교 일자 : 2013년 05월 05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18장 1-7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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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같이 (마태복음 18장 1-7절)
  요즘 어린아이가 뭘 하나 잘 하면 신동이 났다고 보도하고, 화제의 인물로 집중이 됩니다. 놀라운 재능을 타고 나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어린아이를 보면 빨리 재능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좀 징그러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한 아이가 텔레비전에 트로트 신동이라고 하며 출연했습니다. 10살도 안 된 아이인데, “쿵짝 쿵짝 쿵짜자작작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네~”하면서 어른들의 트로트 노래를 구성지게 제법 감정을 넣어서 목소리도 잘 꺾어가면서 잘 부릅니다. 그런데 글쎄요.... 트로트 가사가 사실 아이들이 부르기에는 안 맞지 않습니까? 아직 어린아이인데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것인지요.
  요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어린이집 교사, 원장이 아이들을 폭행했다는 뉴스도 들리고, 여기저기서 어린이에게 성추행, 성폭행했다는 사건도 발생하고,  폭행, 가출, 학교 폭력, 자살, 살인 등의 사건이 고등학생들에게서 중학생에게로, 이제는 더 아래로 내려가 초등학생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책임일까요?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어떤 대상으로 생각하는지 심각한 문제를 느끼게 됩니다. 단순히 어린애들로, 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약한 존재들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함부로 대해도 되고, 나쁜 짓을 해도 저항할 수 없는 존재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맑은 눈을 하고 천사와도 같은 표정을 한 수많은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마치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어린이들을 보며 앞으로 그들이 세상 속에서 어른들의 말과 행동에 의해 더럽혀질 것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약자였고 무시당하고 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어린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다가올 나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묻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제자들의 관심은 천국에서는 누가 서열이 높으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서열이 높은 큰 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든지 적은 자가 되든지 하려면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같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 중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힘없고, 보호 받아야 하고, 불쌍한 존재로만 보시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의 부속물로 여기지 않으셨고, 아직 미완성의 존재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3절, 4절에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를 무시했고,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그런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어떻게 되라는 것일까요? 어린아이들처럼 유치해져라, 나약한 존재가 되라, 미숙한 자가 되라는 뜻입니까?  

  어린아이는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지합니다. 전적으로 부모를 믿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이것을 신뢰성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 속에는 어른들에게 어린아이의 신뢰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먼 가차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처음에는 차창 밖이 즐거웠고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동네와 풍경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오래 되어 감에 따라 지루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하여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모자를 얼른 벗겨 뒤로 감추면서 바람에 모자가 날라 갔다고 했습니다. 갑작스런 사건에 어린 아이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 아빠가 주문을 외우면 네 모자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수리수리 마수리 말발타 살발타....” 여러분, 오랜만에 들어보는 추억의 주문이지요? 아버지는 그 사이에 얼른 아이의 모자를 꺼내 놓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주문이 끝나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다시 돌아온 모자를 보고 대단히 즐거워했습니다. 얼마쯤 가던 어린이는 갑자기 앞에 앉아 있는 아저씨의 가방을 창밖으로 냅다 집어 던졌습니다. 깜짝 놀란 아저씨가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빠가 주문만 외우면 아저씨 가방도 돌아올 거예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는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전적으로 믿고 신뢰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어른이 어린이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31편은 젖뗀 아이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풀핏 주석에서는 이 시를 한마디로 “가장 복 받은 영혼의 상태”를 노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옆에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데도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쌔근쌔근 잠을 잘 자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는 것, 믿고 맡기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며 안식하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젖 뗀 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안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영혼의 자세는 정말 복 받은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런 신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들은 공연한 근심과 걱정으로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장경동 목사님의 부흥회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 중에, 사람들은 문제가 생겨 잠 못 자고 걱정하다가 새벽 2시 되어서 “에이~ 잠이나 자자” 그러고 자는 사람이 있는데, 그럴 거면 일찍부터 고민걱정하지 말고 일찍부터 자지 왜 그 시간까지 고민 걱정하다가 자느냐고 뭐라 하더군요. 또 힘이 더 좋은 사람은 밤새 잠 못 자고 꼬박 샌다고 합니다. 걱정해서 해결도 못하면서...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능력이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런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해결해 주시옵소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기도해 놓고 기도를 마치고 나면 다시 그 문제를 주섬주섬 싸 가지고 가면서 다시 걱정합니다. 해결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다시 더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들어와 기도하기 전보다 더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두통도 심해지고, 혈압도 더 오르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기도를 한 사람인지, 기도를 안 한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부모인 여러분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고 매일 불안과 고민과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학교에 다니는 여러분의 자녀가 매일 저녁 잠자리에서 ‘우리 부모가 내 학비를 대줄까? 안 대줄까?’ 하고 고민하며 잠을 못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부모인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니가 내 자식이면 내가 학비를 어떻게 벌어다 주는 지 너도 알고 밤 잠 못자며 고민하고 괴로워해야 당연하지.’ 그러겠습니까? 아무 걱정 없이 잠을 쿨쿨 잘 자고 있는 자녀를 마구 흔들어 깨우면서 ‘잠이 와?’ ‘너는 학비 걱정도 안 되냐? 부모에게 다 맡기고 잠 만 잘 자고 있느냐?’ 그러면서 자고 있는 자녀에게 신경질을 내고 화를 낼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부모를 믿고 잘 자고 있는 자녀를 보면서 오히려 ‘나를 믿고 저렇게 편안히 잠자는 내 아들 딸에게 실망을 줄 수 없지...’ 이런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사람도 그런 생각을 갖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더 하시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때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마태복음 6장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들도 먹이시고, 백합화도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옷보다 더 아름답게 입히시며, 들의 들풀들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 일까 보냐?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믿고 신뢰하여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단순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단순성입니다. 우리가 단순성을 회복해야 어린아이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성은 순수함, 솔직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순수하지 않으면 단순성을 가질 수 없고,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 순수할 수 없습니다. 솔직함이 있어야 마음의 단순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에릭 번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세 가지의 성격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어버이 기능으로, 권위적이고 양육적인 기능입니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기능입니다. 두 번째는 어른 기능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기능입니다. 세 번째는 어린이 기능으로, 인간에게 단순성과 순수성과 솔직함과 생동감을 주고, 인간 본연의 맛을 나게 하는 기능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어린이 기능은 울고 웃고 하는 놀이의 기능으로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소생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교회에 내적치유 세미나 강사로 오셨던 정태기 목사님이 미국에서 켄터키 주립병원에 근무할 때, 그 병원에 6명의 목사가 정신이상자로 입원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병명은 ‘어린이 상실증’이었답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웃고 싶을 때 웃지 못하고, 놀고 싶을 때 놀지 못하다가 어느 날 돌아버리는 병이 어린이 상실증이라고 합니다. 어린이 기능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온전한 인간성을 상실하여 버린 것입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어린이 기능, 즉 마음속에 살아서 뛰어 놀아야 할 어린이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고 지적했습니다. 현대인들이 점점 삭막하고 메말라가는 이유가 바로 어린이 기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른이 되면서 점점 웃음이 사라지고, 눈물도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아이들은 똥이라는 말만 꺼내도 까르르 웃습니다. 단순하고, 순수하고, 솔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성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단순, 순수함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단순하듯, 선함이 순수한 것이듯, 아름다움도 순수한 것이고, 사랑도 단순, 순수한 것이듯 천국에서 살 사람은 단순성, 순수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성은 복잡성의 반대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떨 때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냐하면, 생각이 많을 때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함께 자리 잡고, 여러 가지 생각이 서로 엉켜있으면 단순해지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단순하고 순수해야 평안합니다. 행복해집니다. 신앙은 단순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 일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배를 채워줄 그 어떤 음식도 해결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 소년이 자기도 배가 고플 텐데 자기의 도시락을 선뜻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도시락을 드렸다는 것은 자기가 먹을 것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아이의 단순성 때문입니다. 만약 어른들처럼 계산하고 따지고 술수를 부렸다면 자기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린 소년의 단순한 마음,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 소년의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예수님의 기도와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신앙생활하면서 너무 많은 생각 때문에, 너무 많은 계산 때문에, 너무 많은 복잡한 의도 때문에, 속에 숨기고 있는 욕망과 술수, 세속적인 수단과 방법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영성이 풍성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수함과 단순함, 그리고 솔직함에서 오는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때가 많이 묻었는지, 얼마나 교활하고 계산적인지, 얼마나 정치적이고 음흉한지, 얼마나 이중적이고 외식적인지, 하나님께 나와서도 단순하지 못하고 순수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하여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함, 솔직함, 단순함을 되찾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마태복음 18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겸손이요, 둘째는 용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겸손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한국이 낳은 훌륭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박윤선 박사는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배워야 하는 장점들이 있는데, 그 중에 어린이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겸손한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스스로 겸손하려고 해서 겸손한 것이 아니고, 겸손해야 하니까 겸손한 것도 아니고, 겸손하지 않은데 겸손하려고 노력해서 겸손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모르게 겸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배워야 할 것은,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겸손입니다. 아무리 유명하면 뭐하겠습니까? 그가 겸손하지 않다면.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많고 부자이면 뭐 하겠습니까? 그가 겸손하지 않다면, 아무리 신앙생활한지 오래 되었고, 봉사도 많이 하면 뭐 하겠습니까? 그가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다면.
  겸손은 천국 백성들에게 꼭 있어야 할 성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교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큰 죄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과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죄의 본질이고, 시작이고, 핵심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겸손은 천국 생활의 모습입니다.
  성 어거스틴에게 레이나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거스틴이 볼일이 있어서 이 제자 레이나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레이나!” 스승이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습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해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슬며시 부아가 났습니다. “이 녀석이...감히...” 그는 옆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었습니다. 순간, 그는 아차하고 뉘우쳤습니다.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보니 스승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밟고 서서 '교만한 어거스틴아, 교만한 어거스틴아, 교만한 어거스틴아' 이렇게 세 번 소리쳐다오.” 어거스틴은 그렇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 어거스틴이었지만 그의 내부에 이렇듯 무심결에 고개를 쳐드는 교만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는 가슴을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교만스러운 마음의 뿌리가 뻗어있는지 모릅니다. 지속적으로 교만의 가지가 자라고 있습니다. 수시로 교만스러운 생각의 싹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 고집과 편견과 집착과 욕망으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교만하다'라고 스스로 자기 평가를 내릴 때에 비로소 겸손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것을 내려놓습니다. 비웁니다. 나를 낮추어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게 합니다. 어거스틴은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릇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찬송을 부르면서도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교만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꼭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은 마치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네 종류의 밭 중에 좋은 땅과 같습니다.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위에 씨가 떨어져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져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둡니다.
  겸손한 마음이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다른 사람이 나에게 권면하고 충고하는 말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하게 나를 낮추어 찬송을 불러야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이 찬양이 됩니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내 안에 담겨지지 않습니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의 지혜가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를 통해 역사하지 않습니다. 나를 낮추지 않으면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어린아이들은 무조건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진정한 천국 백성이 되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까? 아니면 믿었다 말았다, 의심했다 신뢰했다 그렇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을 갖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정반대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내 경험대로 살려고 합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린이 날이자, 어린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며, 천국백성답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13년 05월 05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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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13년 04월 03일
· 말씀  (본문을 기재해 주세요)
· 설교  정지환 목사
   
주일예배 설교
 뿌리 깊은 나무
· 일시  2013년 06월 23일
· 말씀  골로새서 2장 6~7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이 복과 말씀을 주신 교회
· 일시  2013년 06월 16일
· 말씀  창세기 35장 9~15절
· 설교  정연원 목사
   
주일예배 설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 일시  2013년 06월 09일
· 말씀  시편 51편 16~19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 일시  2013년 06월 02일
· 말씀  잠언 27장 1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거짓이 없는 믿음
· 일시  2013년 05월 26일
· 말씀  디모데후서 1장 3~5절
· 설교  신문수 담임목사
   
주일예배 설교
 각 사람위에 임하신 성령님
· 일시  2013년 05월 19일
· 말씀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예수님이 계신 가정
· 일시  2013년 05월 12일
· 말씀  에베소서 6장 1-4절
· 설교  신문수 목사
   
주일예배 설교
 어린 아이와 같이
· 일시  2013년 05월 05일
· 말씀  마태복음 18장 1-7절
· 설교  신문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