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전도하는 교회 (요한복음 1장 43~51절) |
18세기에 실제로 있었던 등대지기 이야기입니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그날도 등대지기는 홀로 외로이 등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와서는 며칠째 굶어서 지금 죽을 지경이니 기름을 조금만 나누어 주면 팔아서 끼니를 때울 수 있겠다고 통사정을 했답니다. 할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마음씨 좋은 등대지기는 등대의 기름을 조금 덜어 주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친한 친구가 찾아와 급한 일이 있어서 어디를 가야 하는데 기름이 떨어져서 차가 움직일 수 없으니 기름을 조금만 꾸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는 아내가 찾아왔습니다. 아들의 등록금을 아직 못 냈는데 아버지가 되어서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이냐며 닦달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등대지기는 등대의 기름을 팔아서 돈을 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폭풍과 파도가 유난히 거세게 몰아친 매우 험하고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놀라운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어젯밤, 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이 침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배가 폭풍과 파도와 싸우며 거친 밤을 보내는 동안, 배가 안전한 항구로 피신하도록 빛을 비추어 인도해 주어야 할 등대가 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등대지기는 할머니에 대한 동정심, 친구에 대한 인정 때문에, 그리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등대의 기름을 다 써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등대의 불빛을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시간에는 기름이 없어서 등대에 불을 밝히지 못했고, 그로 인해 큰 배 한 척이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침몰한 것입니다.
식당이 음식을 요리하지 않으면 더 이상 식당이 아닙니다. 병원이 더 이상 환자를 치료하지 않으면 그곳은 병원이 아닙니다. 그냥 요양 건물이나 여관입니다. 불을 밝히지 못한 등대는 등대가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만약 교회가 만약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빵을 굽지 않아 더 이상 빵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빵집처럼, 교회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령 하나님의 강림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사역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세상 속에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다시 세상 속으로 가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셔서, 사람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구주이심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십자가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는 교회와 믿는 자들을 향해 세상 끝날 까지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사회적 역할도 해야 합니다. 환경문제도 신경 써야 합니다. 지역사회의 건강한 문화를 만드는 일에도 노력해야 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해야 합니다. 재외국인노동자들의 문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교인들을 관리하고 심방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서로 서로 교제하고 교회 안의 각 기관과 소그룹을 건강하게 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너무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교회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과제요, 지상 명령이요,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며 해야 할 최고의 사명, 가장 중요한 본질인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 즉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래서 다른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진정한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앞의 등대지기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그가 등대지기가 아니라면, 그래서 자기 집에 있는 기름을 그렇게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면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등대지기였고, 등대의 불을 밝혀야 할 기름을 그렇게 사용하여 등대 불을 켜지 못했기 때문에, 큰 배가 폭풍과 파도와 씨름하다가 항구를 찾지 못해 침몰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혼을 구원하고 죽음과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하는 일에 여러분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직접 전도를 하러 다니고 선교사로 파송되어 가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은 전도와 선교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의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자기가 잘 아는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쉽게 어울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선지자가 기록한 그 분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빌립과 나다나엘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빌립과 나다나엘이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면, 빌립의 말을 나다나엘이 들었을까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았다면,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왔을까요? 나다나엘이 알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지식으로는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립의 말을 듣고 그의 생각을 바꾸어 본 것입니다. 믿을 만한 빌립이 한 말이니 한번 속는 셈치고 그를 만나보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빌립과 나다나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좋은 것을 어떻게든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챙기려는 마음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에게 자기가 깨닫고, 만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것을 관계전도라고 말합니다. 거리에서 전도지나 전도 물품을 주면서, 또는 찬양을 하면서 하는 전도를 노방전도라고 합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하는 것을 축호전도, 방문전도라고 합니다. 노방전도나 방문전도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통계에 따르면,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75-90%였습니다. 그러니까 전도의 많은 결실을 보면, 낯선 사람을 접촉하는 것보다 친구, 이웃, 가까운 이들에게 사랑과 기도를 집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들에게 전도를 하는 것이니 만큼 말로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믿음을 갖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기고 사랑으로 행하고, 그리고 진심어린 말로 초청하여야 합니다. 한 번 복음을 전해서 즉각적인 회심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지속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그들이 복음을 들을 기회를 많이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서 한 사람을 책임지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보다 가능한 한 많은 크리스천을 소개해 주고, 비신자가 많은 크리스천을 알수록 교회 안으로 들어와 빨리 정착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노방전도나 방문전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고, 길 위에서,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놓은 영혼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삶 속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조건 없이 지속적으로 섬기고 돌보고 사랑을 베풀어 관계를 형성한 뒤 진심으로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그들의 마음이 열려 받아들일 것입니다.
식당이나 어떤 사업체를 거래하면서 섣불리 우리교회에 나오라고 말하는 것은 잘 생각해서 지혜롭게 말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내가 양정교회 교인으로서 그 사람의 물건을 많이 팔아주니까 당신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나에게 지불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다른 말로 어떤 불교도가 그 사람에게 물건을 많이 팔아주면서 우리 절에 나오라고 말할 때에 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물건을 팔아주는 것은 참으로 그 사람 입장에서는 고맙지만 크리스천들만 그 집 물건을 팔아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이 고마워서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지혜롭게 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건적이고 거래적인 관계로 전도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정말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마음으로 조건 없이 지속적으로 사랑을 베풀 때에 그의 마음이 열리고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형성이 되었을 때에 우리가 경험하고 누리고 있는 신앙의 기쁨과 생명의 진리와 영생의 삶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세계적인 정신과의사인 폴 트루니에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 서로 도와야 합니다.
교회 전체가 전도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되어 나온 사람들을 위해 관심을 갖고, 그들이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배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기도를 하실 것입니다. 그 기도 가운데 여러분이 예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그리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영적인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꼭 중요한 기도는 오늘 이 시간 새로 나온 분들, 새롭게 믿기 시작한 새가족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지고, 그 말씀을 통해 깨닫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목사를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함께 전도하는 교회의 교인들의 중요한 기도내용입니다. 이런 기도는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이며, 비신자와 새신자를 향한 모든 교인들의 관심과 영적인 노력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영혼을 구하는 일은 영적인 전투에 해당합니다. 전교인이 날마다 기도할 때에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대상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불러가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전체가 전도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좋은 평가가 나야 합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사는 어느 변호사가 출장을 갔습니다. 주일이 되었지만 마땅히 가볼 만한 교회를 찾던 중 교통 경찰관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가르쳐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 나오다보니 좀 더 가까운 거리에 교회가 몇 군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까운 교회를 놔두고 굳이 그 먼 교회를 찾아가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교통경찰관에게 다시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경찰관의 대답이 재미있었습니다. 사실 자기도 그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년간 같은 자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다보니까 그 교회 성도들의 얼굴이 가장 밝았다고 합니다. 결국 성도들의 얼굴이 전도지가 되었던 셈입니다.
2세기경에 활동한 아테네의 철학자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를 위한 변증서를 쓴 아리스티데스라는 사람이 로마 황제 하드리안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초대 교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만약 아리스티데스가 오늘 우리교회의 모습을 누구에게 보고한다면 뭐라고 보고할까요? “양정교회 교인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얼마나 서로 돕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기쁘게 사는지, 얼마나 얼굴이 밝고 행복해 보이는지...” 라고 말할까요? 이 지역에 사는 주민에게 누가 이 근처에 가 볼만한 교회를 묻는다면 그들이 양정교회를 소개할까요? 우리 교회의 지역사회 섬김사역들은 교회의 이미지를 좋게 할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화를 형성하고, 건강한 가치관을 형성하게 하고, 장기적인 선교 차원으로 나아가는 사역들입니다. 조건 없이, 지속적으로 지역을 섬겨 우리 교회가 지역에 꼭 필요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지쳐있습니다. 이기주의와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습니다. 보금자리어야 할 가정에서 마저 대화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서로 무관심하고, 서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없고, 웃을 수 있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현대인들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교회 중직자들이라면, 교회에 낮선 얼굴과 새가족들이 보이면 반갑게 인사부터 해야 합니다. 중직자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중직자이면서도 아직도 자기가 아는 사람, 자기와 가까운 사람하고만 인사하고, 처음 나온 사람, 새가족, 자기와 가깝지 않은 사람하고 반갑게 인사도 하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중직자로서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중직자는 계급이 아닙니다. 섬김의 직분입니다. 중직자가 되었으면서도 주일날 자기들끼리 몰려다닌다면, 중직자로서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장로, 안수집자, 권사직 모두 교회를 돌보고 교회를 위해 일하라고 세운 직분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교회입니까? 성경에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의 몸은 각 지체들인데, 교인들 모두가 교회의 지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섬기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몸이며 그 몸의 지체들인 교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최소한의 관심과 인사와 친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관심도, 인사도, 친절도, 섬김도 없고, 교회의 지체 중 일부분인 자기들끼리만 뭉쳐있다면, 그것은 근육이 뭉쳐있거나 피가 뭉쳐있거나 신체 한 부분이 뭉쳐져 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에 오십견이나 근육통이나 신체가 오그라진 펴지지 않는 병든 상태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 따라해 봅시다. “모든 교인들에게 목사에게 인사하듯 인사합시다. 모든 교인들에게 목사가 인사하듯 인사합시다.”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인사하십시오. 무슨 형상기억합금이 원형으로 되돌아가듯 본래로 다시 돌아가지 말고 지속적으로 인사하십시오. 무조건 주일날 보면 인사하십시오. 인사라도 자꾸 해야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관심이 생깁니다.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것은 건강한 공동체의 기본입니다. 기본이 안 되면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앉는 자리도 그렇습니다. 몇 년 전에 오후찬양예배 광고시간에 중직자들은 되도록 이면 끼리끼리 앉지 말고 흩어져서 새가족이나 평소에 가깝게 지내지 않던 교인들 옆에 앉으라고 광고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담임목사의 부탁을 마음에 새기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웬 주관이 그렇게 뚜렷한지, 웬 소신이 그렇게 변하지 않는지, 웬 행동이 초지일관하는지, 아직도 뭉쳐 다니며 앉는 분들이 있습니다. 흩어져 앉기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앉은 교우와 인사를 하면서 앉고, 관심을 갖고 앉아 예배를 함께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생각을 바꾸고 관심을 바꾸고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교인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같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같은 마음으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비신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어떻게 구할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함께 어떻게 해야 할까를 안타까워하고, 고민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한 생명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세상에 태어나 사람 구실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처음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아는 척도 안 하고, 신앙생활 초기에 외롭고 힘들었었다면, 여러분은 처음 교회 나와 여러분의 과거처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여러분이 겪은 것과 같은 과정을 겪지 않도록 그 분들을 나라도 꼭 돕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무례함과 무관심과 이기심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가 영혼 구원과 새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그런 교회는 머지않아 문 닫을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 1, 2기 알파코스사역은 온 교회가 함께 하는 전도사역입니다. 물론 알파코스에 귀한 손님으로 참석하는 게스트들 중에는 기존 교인들도 있고, 새신자들도 있고, 비신자들도 있습니다. 12주 동안,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만납니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갖고, 이야기를 듣고, 소그룹으로 나누어 대화합니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궁금한 질문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갑니다. 이를 위해서 섬김이들이 최선을 다해 섬기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비신자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교회의 모든 기관이, 구역이, 소그룹이 전도지향적 그룹으로 변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계모임이 아니고, 교회가 문화센타가 아니라면, 생명을 살려내는 일에,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더욱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구원 받게 했다면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내 생애에 한 사람만이라도 구원하자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구원하고자 하는 그 사람에게 조건없이 지속적으로 함께 하고, 섬기고, 사랑을 베풀어 예수님을 왜 믿는지, 예수님을 믿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혼자서 하려고 하니까 어렵고 힘들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함께 전도합시다. 함께 전도하는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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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3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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