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움 (에베소서 6장 10-13절) |
해운대구 센텀시티에 있는 모 백화점이 지난 3일 개점을 했습니다. 그런데 백화점 문이 열리자 쇼핑객들은 앞 다퉈 6층 란제리 매장으로 올라갔고, 좁은 통로로 고객 200-300백 명이 한꺼번에 몰리자 붉은 속옷이 가득 들어찬 란제리 매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습니다. 손님 이 모(54) 씨는 아침 8시부터 정문에서 기다렸다면서 "남편 건강, 큰아들 취직 등 바라는 것이 많은데, 우리 같은 서민들은 붉은 속옷 한 장 사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 좋지 않냐"고 말했답니다. '붉은색'은 사실 한국인보다는 중국인이 선호하는 색깔인데, 중국 사람들이 쇼핑 온 것도 아니고 웬일입니까? 이런 일은, 같은 영남권이라도 대구에서는 빨간 속옷에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지만, 부산 사람들은 크게 새로 지은 점포가 개점하는 날 빨간 속옷을 사면 여자는 아들을 얻고 남자는 사업 행운이 따른다는 지역 속설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랍니다.
여성 속옷 유명브랜드 3사는 지난 3일 하루에만 각각 1억원씩 모두 3억원 어치를, 1, 2일 이틀간 진행한 사전 개점행사에서도 각각 5천만원 어치씩 팔았습니다. 이렇게 사흘간 3사의 붉은색 속옷 매출만 4억5천만 원에 이르렀습니다. 백화점 관계자는 "센텀시티점의 붉은색 속옷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전국 점포에서 붉은색 속옷 물량을 모두 부산으로 집결시키는 바람에 수도권 점포에서는 빨간 속옷을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밝혔습니다.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참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광경입니다. 그러니까 속옷 한 장에 만원으로 계산을 해도 약 4만5천장이 팔렸습니다. 지금 부산에는 빨간 빤스를 4만5천명이 입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복덩어리 빤스가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빨간 빤스를 사면 복이 오긴 옵니다. 그것을 산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판 백화점이 돈을 많이 벌었으니 복을 가져다 준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운을 얻기 위해서 속옷 사는 정도는 재미있는 일 아니냐고 말하시겠습니까? 빨간 속옷 팔아주어서 내수부진에 빠진 경제를 살리는 일에 일조하지 않았느냐고 말하겠습니까? 뭐 그런 일가지고 그러느냐고, 속옷 사려다가 사람이 깔려죽은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하시겠습니까? 지금 단순히 빨간 속옷에 관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정월대보름 창녕 화왕산에서 억새풀 태우기를 하다가 참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이런 속설, 미신, 점, 사주팔자, 토정비결, 타로점 등 이런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통문화라는 명목 하에 우매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솝 우화 중에 ‘낙타와 주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낙타와 주인이 사막에서 밤을 지내야했습니다. 그런데 사막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갑기 때문에, 천막 속 주인에게 낙타가 추워서 죽겠으니 머리만 천막 안에 들여놓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주인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낙타는 그래도 추우니 발 한쪽만 들여놓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주인이 허락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후에 몸통을 더 들여놓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주인이 또 허락해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낙타는 도저히 추워서 천막 안으로 다 들어가서 자야겠다고 합니다. 주인이 또 허락해주었습니다. 낙타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니 천막은 비좁고 낙타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낙타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둘이 함께 자기에는 천막이 너무 좁으니 주인이 밖에 나가서 주무시지요.” 그래서 주인은 밖으로 쫓겨난 이야기입니다. 이솝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 하려고 한 것일까요?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타락시킨 결정적인 결과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미혹 받는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진리 아닌 것에 미혹되고, 복의 근원이 아닌 것에 미혹되고,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에 미혹되어 점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고 쉽게 여기고, 쉽게 미혹되고, 쉽게 넘겨주어 마침내 다 빼앗기는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한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라고,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라고 에베소서 곳곳에서 말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속임수나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마음이 허망한 것으로 행하지 않기 위해서 강건해져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은 에베소서를 끝맺는 부분의 말씀입니다. 우릴ㄹ 미혹하며 사로잡으려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다는 것, 그 존재를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의 배후세력을 간파하여 그것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것을 오늘 12절 말씀에는 “우리의 씨름은...”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의 경기장에서의 씨름을 떠올리면서 이 표현을 썼습니다. 로마의 경기장에서 이루어지는 씨름은 상대방의 머리와 어깨를 힘으로 눌러 땅에 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사가 달려있는 경기로 어깨와 머리가 땅에 닿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씨름은 그냥 무슨 샅바를 쥐고 하는 우리나라 전통운동인 씨름이 아닙니다. 싸움입니다. 그것도 닭싸움과 같은 경기가 아니라 생사가 달린 싸움입니다. 그러니 그 의미에서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마냥 편한 세상이 아닙니다. 마냥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싸움입니다. 악의 세력과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는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적을 이길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탄을 바로 알려고 한다고 해서 사탄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영적 전투 조직의 지도자인 윌리엄 쿠무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수 사탄은 종종 우리의 무지를 이용합니다. 여러분을 파멸시키려고, 결심하고,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원수와 싸우고 있는 당신이 만일 깨어있지 않는다면, 당신은 보이지 않는 사탄과의 싸움이 진행 중인지 조차 알지 못할 것이고, 원수는 그 무지를 이용하여 전쟁터 한 가운데서 당신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적을 알지 못하면 적은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쉽게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는 말씀에서 ‘혈과 육’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적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적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은 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입니다.
우리들의 적은 교회 안에 있는 다른 교인이 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싸움만 하려고 합니다. 싸울 대상을 찾아다니는 사람처럼 시비를 걸고, 험담을 하고, 상처를 주고, 공격을 합니다. 이런 교인을 일컬어 ‘묵은 닭’이라고 말합니다. [묵은 닭과 묵은 교인]이란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글을 쓰신 분은 해운대 반여동에 있는 김양규 한의원 원장이신 김양규 장로님이신 것 같습니다. “묵은 닭은 질기다. 교인도 마찬가지다. 은혜 받고 몇 년 지나고 나면,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않고, 눈만 껌뻑껌뻑 해대는 질긴 교인으로 점점 변해져간다. 묵은 닭은 싸움을 잘한다. 오래된 교인도 곧잘 싸움질을 한다. 갈수록 순한 양이 되어야 할 교인들이 자칫하면, 갈수록 거친 닭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한다는 일들이... 보이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시비를 걸고... 그러면서 점점 무서운 싸움닭으로 변모되어져 간다. 하지만, 본인은 전혀 모른다. 무서운 교인들을 본다. 눈이 높아 웬만한 사람들은 눈에 안차는 사람들이다. 귀가 높아 웬만한 설교는 귀에 안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높아 웬만한 충격에는 미동도 않는 사람들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앙의 경륜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얼음처럼 차와지고,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밴댕이 속처럼 좁아져가는 사람들이다. 모태신앙 교인은 자칫 묵은 교인이 될 수 있다. 교회생활은 익숙하지만 아무런 감동이나 감화, 변화가 없는 사람. 묵은 교인의 특징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말씀 앞에 매일 깨어지지 않으면, 나 역시 묵디 묵은 묵은 교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묵은 닭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싸움닭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뿐만 아니라, 싸움의 대상이 아닌 사람들과 싸우는 싸움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애꿎은 싸움으로 우리의 힘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싸움으로 마귀가 좋아할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싸움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일인지, 마귀가 좋아할 일인지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2절에는 우리의 싸움이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움의 적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악의 최고 우두머리입니다. 군대로 말하면 사탄은 사단장이고, 우리가 마귀, 귀신, 악영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사탄의 부하들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소대장이 있고, 중대장이 있고, 대대장, 연대장이 있듯이 군대 조직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역할도 구분되어 있습니다. 군대에서도 병과에 따라, 주특기에 따라 구별되듯 귀신, 악영들도 하는 일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은 파괴와 파멸을 목적으로 활동합니다. 본래 악의 존재이고, 거짓말쟁이로서 속이는 자이며, 유혹하고 시험하고 우리를 고발하고, 다툼을 일으킵니다.
사탄은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떼어 놓습니다. 사탄이 제일 우선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사람과 사람 사이도 나뉘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고, 죄 지은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에 빠지게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하여 멸망의 자리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사탄이 하는 일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또한 의심을 갖게 합니다. 의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잇는 믿음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의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탄은 우리의 혈기와 죄의 본성을 자극하여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하고, 시기질투하고, 분노하고, 상처주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게 합니다. 싸우게 합니다. 폭력을 휘두르게 합니다. 살인하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과 떼어놓고 파괴적인 행위를 하도록 미혹합니다. 사탄은 가인을 미혹하여 가인의 마음속을 휘저어서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게 했습니다. 사탄은 아간의 마음을 미혹하여 여리고성을 함락한 후에 탐욕을 부려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의 원인이 되게 했습니다. 사탄은 베드로의 마음도 미혹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만류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가롯 유다의 마음속에 들어가 스승을 배반하게 하고, 결국 목매달아 자살케 하였습니다. 사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을 미혹하여 탐욕과 거짓으로 헌금케 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세상문화를 통해서도 활동합니다. 아주 교묘하고, 교활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폭력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어른들이 보면 좀 덜하지만 어린이들이 보면서 자라게 될 때, 사탄은 그것을 이용하여 어린이들 마음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끔찍한 행동들을 서슴없이 행하게 합니다. 여러분, 1988년 10월 24일, 매사추세츠 주에서 18세 소녀를 칼로 난자해 살해한 19세의 소년이 <후라이데이 더 썰틴스>라는 영화를 보고 살인을 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를 죽이는 느낌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1989년 4월. 뉴욕시 센트럴 파크에서 여인을 윤간하고, 폭행하여 거의 죽음까지 몰고 간 10대들 중 13세 청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텔레비전에서, 영화에서, 컴퓨터 게임에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보다가 그냥 그렇게 자기도 해 보는 것입니다. 가상과 실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영화와 현실을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세상문화를 통해서 인간을 파멸시키는 간계입니다.
이렇게 사탄은 오늘도 이 세상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묘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미혹합니다. 간교한 계획을 가지고, 보이지 않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서서히 점점 더 우리에게 젖어 들어오고, 점령해 들어옵니다. 특히 요즘에는 사이비 종교들이나 이단들을 통해서 활동합니다. 교우 여러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을 먼저 공격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탄에 대해 저항하고, 마귀를 대적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라고 말씀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머리 위에다 둥지를 틀지 못하게는 할 수 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사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을 수는 있지만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탄이 우리 주위를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사탄이 마음속에 들어와 집짓고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사탄은 그 특성상 우리를 공격할 것이지만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정복당하고,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기로 한 사람은 미워하는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진실을 선택한 사람은 거짓과 맞서 싸워 진실을 지켜야 합니다. 빛을 선택한 사람은 어둠과 싸워야 하고, 선을 선택한 사람은 악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선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사탄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사탄이 기를 쓰고 도로 찾기 위해서 발악을 하겠지요. 그리스도의 편에 선 사람은 사탄과 그 추종 세력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탄세력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싸움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말씀은 성도들을 향해 강해지라고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싸움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도움과 능력이 옵니다. 주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악의 세력과 계속해서 싸울 수 있고,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와 도움을 얻어서 능히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사탄과 맞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지만, 주님 안에서 싸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을 주실 때 싸울 수 있습니다.
이 싸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싸움 장비를 주십니다.
강해지기 위해서 주님의 능력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 즉 하나님의 싸움장비로 무장하라고 말씀합니다. 11절 말씀,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이 갑주는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무기도 없이 전투에 나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전투 장비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무기를 공급해주십니다. 그 장비를 착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싸움을 위하여 반드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 영적인 우리의 싸움에는 하나님의 갑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그냥 몸싸움이고, 총칼 싸움이면 거기에 맞는 장비를 갖추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이요,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사탄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를 착용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최후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13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 말씀에서, “모든 일를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는 뜻은 승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고대 전투 후에 여전히 서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승자들이 서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까지 서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최후 승리자로 서있어야 합니다. 악한 것들을 능히 대적하여 승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싸움은 승리를 이루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승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승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사탄에게서 승리를 빼앗는 일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 승리를 지키는 일을 하면 됩니다.
처음 믿는 초신자들 가운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때문에 뒤로 물러가면 사탄은 여러분을 더욱 만만하게 볼 것입니다. 쥐고 흔들 것입니다. 종처럼 부려먹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사탄에게 돌아가지 마십시오. 사탄의 공격에 도망하거나 항복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싸움은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승리해 놓으신 전쟁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여러분을 덮어 보호해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끝까지 싸워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 3장에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이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실 것이고,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 하셨습니다. 끝까지 이기는 사람은 흰 옷을 입을 것이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이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끝까지 이기는 사람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영광을 얻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 승리의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최후 승리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말을 하려고 할 때, 어떤 생각을 할 때, 어떤 행동을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아니면 마귀가 좋아할까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크리스천이 아니라 강건한 크리스천이 되시기 바랍니다. 뒤로 물러가는 신앙인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악의 세력에게 패배하는 성도가 아니라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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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08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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