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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녀오겠습니다  [3336]
· 설교 일자 : 2009년 07월 26일
· 본문 말씀 : 에베소서 4장 17-24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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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17-24절)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무슨 설교제목이 그러냐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한 적이 언제입니까? 이미 몇십년 전에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그 기억이 아득할 것입니다. 가정교육이 그렇고 그런 집에서는, 아이가 학교에 가는지 오는지도 잘 모를 것이고, 학교 다녀오겠다는 인사도 없이 그냥 쑥 학교에 가버리는 아이도 있을 것입니다. 저희 집 큰 아들이 어렸을 적에, 한 번은 아침에 깨워서 학교를 보내는 데 일어나서 비몽사몽간에 밥을 먹고 학교를 가면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가야 하는 데, “안녕히 계세요!”그리고 인사하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 이 녀석아! 잠깨고 학교 가야지!” 그런 적이 있습니다. 지지난 주에 폭우가 쏟아지던 아침에 “정말 학교가기 싫은 아이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학교에 가야 합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학교 가는 것을 싫어하고, 결석하기 시작하면 공부와 멀어지고, 공부하고만 멀어지는 게 아니라 공부 아닌 다른 것, 좋지 않은 것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이 학교라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나는 학교 졸업한지가 벌써 오래되었는데 느닷없이 이 세상이 학교라고 한다면 내가 학생이란 말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학교입니다. 우리들은 학생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학교일까요?

  우리가 이 땅위에서 살면서, 이 땅위의 삶만이 전부가 아니고, 그 후에 영원한 삶이 있으며, 지금의 삶이 영생을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즉 이 땅위의 삶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한 예비학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고, 우리가 학생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관혼상제의 의식 중에 상례와 제례 때, “학생(學生)”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아십니까? 장례 때, 빈소에 “학생부군신위”라고 써서 영정 사진 아래에 놓지요. 기독교는 그렇게 안 씁니다. 어떤 사람이 같이 조문 온 사람에게 물었답니다. 왜 ‘학생부군신위’라고 써 놓느냐고, 왜 ‘학생’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랬더니 대답하는 말이, “이제 공동묘지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학생이라고 그러는 게 아니냐고 하더랍니다. ‘학생’이라는 말은 ‘유학생(幼學生)’이란 말의 줄임말이랍니다. 유학생이란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儒生)이라는 말이고,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으나 지식의 깊이나 세상을 보는 경륜만은 뛰어난 아까운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별세한 남자에게 좋게 높여주는 추서입니다. 이 표현처럼,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사람들이 정말 실력있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떠나는 것 맞습니까? 차라리 이 세상에 학생으로 왔다가 간다는 뜻이 더 맞지 않을까요?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는 1882년에 그때까지 거의 소멸해 버린 유슬이라는 무도를 찾아내어 각 유파 중에서 좋은 것은 택하고 위험한 것은 제외했습니다. 그는 여기에다 새로운 기술을 첨가함으로써 정신수양과 육체단련을 목적으로 하는 오늘의 유도를 완성했습니다. 유도는 오늘날 일본 경찰의 기본 무술이 되었으며, 동양 무술로는 처음으로 국제 올림픽 대회의 정식종목이 되었습니다. 가노 지고로는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향상된 기술을 배우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전역의 운동계와 사교계 및 정치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죽기 직전, 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도의 대가가 자신의 학생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학생들이 스승의 유언을 들으려고 모여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묻을 때 내 몸에 검은 띠를 매지 마라. 반드시 하얀 띠를 매어 묻어야 한다.” 유도나 무도에서 하얀 띠는 초보자가 매는 띠입니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 배울 것이 많은 견습생을 상징하는 색깔의 띠입니다. 그는 검은 띠의 유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배웠고, 땅에 묻힐 때에도 배우는 사람, 학생이고자 했습니다. 학생으로 살다가 학생으로 죽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이론의 습득이고, 둘째는 실천의 습득이고, 셋째는 배우겠다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그렇습니다. 늘 배우겠다는 간절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배우기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배우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이 땅의 삶은 학생의 삶입니다. 우리들은 인생수업을 통해서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학생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어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고 배우는 것을 그만두면 실력 없는 교수가 됩니다. 초, 중, 고등학교 교사가 배우는 것을 그만두면 학생들이 압니다. 실력 없고 잘못 가르친다고. 부모가 됐든, 사장이 됐든, 목사가 됐든, 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항상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기를 중단하는 그 순간부터 무디어지고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젊었다, 늙었다하는 말은 단지 나이가 적다 많다, 몸이 싱싱하다, 노화되어 가고 있다는 신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배우기를 그친 사람,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곧 늙은이요, 더 변화하고 성장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늙어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발전을 위해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늙은 사람이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곧 젊은이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계속 배우고 성장하는 젊은이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학문이 많고, 얼마나 다양한 분야가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것을 평생 배우려고 해도 다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꼭 배워야 할 것, 누구나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여행을 가려면 여행 가려고 하는 나라의 역사, 문화, 지리, 대중교통 이용법, 식사예절, 간단한 인사법, 물건을 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행 시 주의해야 할 점 등을 미리 배워 준비하여야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가는 여행도 그렇게 준비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할 천국을 위해 준비하고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시작하면서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에 바울이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을 적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 영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이라는 학교에서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법칙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라고 하셨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다가 갈 영원한 세상에 대한 소망을 배워야 하고, 그곳에서 누릴 영광의 기업에 대해 배워야 하고, 그것을 믿으면서 사는 법,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에서 함께 살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믿고, 성령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천국의 원리를 배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에 배우려는 우리들에게 온유와 겸손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길게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배운 대로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배운 대로 실천하고,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벗어 버릴 것은 벗어 버려야 새 것을 입습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새 것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말씀을 하시거나 진리의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귀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모두 귀로 똑같이 말씀을 들어도, 귀를 막고 있는 그 무엇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듣고 배우려고 해도 뭔가 꽉 막고 있으면 배울 수가 없으니, 막고 있는 그것을 제거해야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바르게 배우려면 우리의 이해와 경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와 경험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일반 학문을 배우는 데는 먼저 설명을 듣거나 읽고서 이해가 되어야 자기 지식이나 학문으로 습득이 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기억이 잘 안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내용이나 이론이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꼭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면 그냥 이해하면 되지 믿을 필요까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여러분이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일들만 일어납니까?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뒝벌을 아십니까? 뒝벌(bumblebee)은 몸집은 크고 무게와 모양에 비해 날개는 아주 작은 벌입니다. 현재까지의 공기 역학법칙에 의하면 뒝벌이 나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땅에서 뜨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그렇게 말하든 말든 뒝벌은 좌우지간 날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므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으니 이 세상에서 살지 않겠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인정할 수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난 주에 이어령 박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이야 말로 자신의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딸 이민아 변호사가 갑상선암에 걸리고, 두 번이나 재발이 되었고, 암이 치료 된 후에 고도근시로 인해 망막이 찢어져서 시력을 잃어버릴 상황에까지 처했습니다. 둘째 손자가 자폐증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박사는 자신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상황 파악은 할 수 있었지만, 딸과 손자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딸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암을 치유 받고, 시력을 되찾고, 손자까지도 치유를 받는 것을 이어령 교수가 보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만을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까 믿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서 7장 9절 하반절에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해되는 것만 붙잡고 선다고 굳게 서는 것이 아니라,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즉 이해가 되니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이해가 됩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이해가 되고, 믿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거니까 믿으면 믿어집니다.
  우리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이해력에 갇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을 배우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이해력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경험하는 일을 배우지 못하는 불행스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자신의 경험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험은 좋은 것이지만 경험에만 묶여 있으면, 오히려 그 경험이 자신을 경험의 감옥에 갇히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불통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경험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살아보고 경험한 것이 많으니까 자기가 경험한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다 해 보았는데 그건...” “내 경험으로 봐서는 안 돼!” “내 경험이 맞아!”
물론 경험이란 소중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을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 너머에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같은 나라에 살아도 시대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고, 사람에 따라 경험이 조금씩 다른데 내 경험만 맞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맞지 않다고 한다면, 자신의 경험이라는 감옥에 갇혀 이해의 폭이 좁아지고, 경험 밖의 세계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내 경험만 고집하는 사람을 늙은이라고 말하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늘 마음을 열고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하는 사람을 진정한 젊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젊은이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마음과 자세를 열어야 합니다. 봐야만 믿을 수 있고, 자기가 경험해야만 믿을 수 있다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믿음을 배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늘 새롭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새로운 진리의 말씀이 그러 한가 실천하며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더 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새사람을 입기를 원하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히 배웁니다.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다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겸손히 배웁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죄인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허망한 것을 행하려 하지 않는 사람, 총명이 어두워지거나, 무지해지거나, 마음이 굳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감각이 없어 자신이 방탕한 일에 빠지길 원치 않는 사람,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지 않으려는 사람,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바르게 배우고, 배운 것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기 위해 언제나 겸손히 배웁니다. 날마다 배우려고 겸손히 자신을 낮춥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분, 겸손히 배우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에게 배우려 할 때, 자존심을 내세우고, 체면을 앞세우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를 가르치려고 할 때,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면 몹시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지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고 해?” “어쭈, 많이 컸구만. 이젠 나를 가르치네.” 상대방이 전에는 나보다 못했는데, 이제는 나에게 충고를 하고, 가르치려고 한다고 느낄 때 몹시 자존심 상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몹시 자존심 상할만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
  갈라디아서 2장 11절 이하에는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오니까 음식 먹던 것을 멈추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하니까 같이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바나바도 그렇게 했나 봅니다. 그것에 대해서 바울이 베드로가 모순되는 행동을 했다고 책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이 그런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 안에서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본국에서 온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베드로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 그 자리를 슬그머니 떴습니다. 그때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그것에 대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의 책망을 들은 베드로가 바울에게 대해 괴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감히 내가 누군데? 예수님의 12제자 중 수제자인데? 나한테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수 있어? 지가 복음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구! 올챙이적 생각 못하네! 야, 많이 컸다!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핍박하고 잡아 죽이던 사람이 이제 좀 열심히 예수님 믿는 다구 나한테 감히?!?!”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바울에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바울의 책망을 귀 기울여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의 일생을 보면 그는 겸손한 배움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성격이 좀 급하고, 단순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일생을 보면 늘 겸손한 자세로 배우고 또 배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를 ‘학문 없는 범인’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로써 열심히 듣고 보고 배웠습니다. 예수님께 대답을 잘 해서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대답을 잘못하여 굉장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실수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그때 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후에 그는 초대교회 사도의 지도자로써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쓴 것을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겸손히 배우는 자세로 자기 발전이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혈기왕성한 사람이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써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허물과 실수와 부족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겸손한 자세, 겸손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언제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를 용납하고, 존경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 배움의 자세를 가진 베드로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베드로전서 5장 5,6절에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일지라도 그에게서 내가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보다 공부를 덜 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서 내가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보다 신앙생활을 한지가 얼마 안 되었어도, 그가 초신자일지라도 내가 배워야 할 신앙의 자세, 내가 잃어버린 순수한 신앙자세, 내가 무디어져 느끼지 못하는 생생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고백들을 배워야 합니다. 배우려는 마음만 있으면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부터로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써 너무 게을러서 배우려고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너무 교만해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봐야 합니다. “나는 평생 배우려는 사람인가?” “나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인가?”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가?”
  우리가 바르게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천국에서 누릴 영생의 삶을 배워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올 때에 하나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고 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은 마치 자녀가 저녁에 귀가하여 부모님에게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듯 하나님께 인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학교을 마치고, 천국을 준비하는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광야 같은 인생이라는 광야학교를 잘 다녀왔다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회복하고 왔다고 말씀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인생 학교에 가는 학생의 자세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천국 예비학교에 가는 학생의 자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배우고 변화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07월 26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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