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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짐의 은혜  [3643]
· 설교 일자 : 2009년 08월 30일
· 본문 말씀 : 창세기 32장 24-3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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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짐의 은혜 (창세기 32장 24-32절)
  한 성도가 죽어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늘나라 문지기가 그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짓더니 그를 천국으로 보내주었습니다. 화려한 천국 도성의 모습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자신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자주 보았던 목사님이 보였습니다. 반가워서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 어느 교회 아무개입니다. 목사님을 천국에서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목사님도 반갑게 그를 맞아 주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그 성도에게 천국의 모습이 사라지며 자신이 지옥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자기 바뀐 주위의 모습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악한 죄인들, 음란한 모습들이 그의 주위에 펼쳐졌습니다. 갑자기 그의 오른쪽에서 이상하고 흉측한 괴물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놀라 비명을 지르는 순간 또 갑자기 푸른 초원과 맑은 시냇가가 펼쳐진 천국으로 그가 이동되어 왔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하려는 순간 또 지옥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러한 이동이 몇 차례나 계속되었습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하늘나라 문지기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예요. 이렇게 순간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다니다니요.” 문지기가 대답했습니다. “이게 바로 한국의 리모콘 신자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징벌이오.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리듯이 마음에 안 들면 목사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고, 쉽게 바꿔버리는 것에 대한 징벌이오.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게 한 것이오. 그래도 이 정도는 약과요. 마우스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벌은 더 정신이 없지. 거의 초 단위로 옮겨 다녀야 하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너무도 조급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자마자 금방 진리를 깨닫고, 금방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고, 금방 신앙이 성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쉽게 믿어지지 않으면 쉽게 신앙을 바꾸고 포기하고 교회를 떠나갑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평생 동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과 사람들과 시기들을 통해서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만지시고, 다듬으시고, 변화되게 하시고, 시간을 갖고 성장케 하십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야곱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야곱의 인생을 보면 우리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우리를 어떻게 훈련시키시는 지, 우리에게 어떤 손길과 사랑과 은혜를 주시는 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의 여정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오거나, 그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깨달음과 체험을 하게 하거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집에서 도망 나온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사닥다리와 천사의 모습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벧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브니엘 사건입니다.

  야곱의 인생의 여정에는 벧엘 사건과 브니엘 사건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외삼촌 집에 도망 간 야곱은 그곳에서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됩니다. 라헬과 결혼 하는 조건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7년간 일하였습니다. 드디어 결혼 첫날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첫날밤을 치른 여인이 라헬이 아니라 라헬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외삼촌 라반은 딸이 둘이었는데 순서상 언니인 레아가 먼저 가야한다고 억지를 부렸고 라헬을 얻기 위해서 다시 7년을 일해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야곱은 자신보다 사기술이 더 능한 외삼촌에게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자신이 형 인양 분장을 하고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이제 야곱은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였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언니가 동생 인양 몰래 들어와 신혼첫날밤을 보냈으니 얼마나 허탈하고 황당하고 놀랐겠습니까?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야곱은 어떻게 레아를 몰라볼 수 있었을까? 그 당시야 밤이 되면 온 천지가 깜깜해서 얼굴을 몰라 볼 수도 있겠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밤새도록 서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냥 잠만 잔 것입니다. 그러니 몰랐겠지요. 아니면 레아나 라헬이 자매니까 목소리가 너무도 비슷해서 밤에는 구별이 안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여하튼 야곱은 자기가 그렇게 당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안 속을 것 같고 안 당할 것 같은 약삭빠른 야곱이 외삼촌에게 당했습니다.
  그 당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잠간!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그 때가 좋았겠다!’라고 혼자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부인을 여럿 둘 수 있으니 좋았겠다고 생각합니까? 정말 좋을까요? 한 명의 부인도 모시고 살기 힘들 텐데 둘, 아니 여럿을 모시고 행복할 수 있을까요? 28일 대구에서, 밤늦게 술 마시고 들어오는 33살 난 부인에게 32살 남편이 잔소리를 했더니 흉기로 남편을 찌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 부인을 몇 씩 두고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40을 넘길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그렇고, 인류 역사에도 그렇고, 우리나라 역사에도 그렇고, 한 가정에 부인이 여럿인 가정에는 항상 고통을 겪는 불행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남편 혼자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 부인들과 자녀들은 상처받고 불행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사랑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다시 7년의 노동을 약속하고 결국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14년을 외삼촌을 위해 무임금 노동을 하였습니다. 노동착취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대단하지요? 요즘엔 젊은 남녀들이 너무도 쉽게 만나고, 너무도 쉽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너무도 쉽게 사랑이 변질되고, 너무도 쉽게 헤어지는 세태인데, 야곱은 천연기념물일 될 사람이고, 야곱의 라헬 사랑은 상상하기 힘든 순애보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 내용이 창세기 29장 내용입니다.
  창세기 30장에는 열심히 일한 야곱이 외삼촌에게 재산을 분배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교묘하게 외삼촌을 속입니다. 양과 염소들이 새끼를 낳으면 점 없고 아롱지지 않은 고품종의 것은 다 외삼촌이 가지고, 자기는 점 있고 아롱진 것만 가지겠다고 말합니다. 이 제안을 외삼촌이 받아들이자 야곱은 미리 계획한 대로 새끼를 밸 때에 점 있고 아롱진 새끼들이 더 많이 태어나게 하여 다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야곱의 인간적인 수완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엿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을 야곱보다 더 까다롭고 욕심이 많고 삐뚤어진 사람에게 붙이셨습니다. 라반은 야곱보다 한 수 더 위의 사람입니다. 라반은 야곱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하였습니다. 야곱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모든 노동력과 이익을 빨대를 꽂아 빨아 먹듯 쏙쏙 빼앗아 갔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 있는 20년의 기간 동안 거짓과 속임을 당하며, 서로 잔재주 싸움에서 밀고 밀리는 각축전을 벌이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가장 가증한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가 조금씩 변화된 것은 바로 이 고된 훈련 덕택입니다. 라반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달리고, 속임 당하고, 빼앗기고, 야곱이 마치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에는 자신의 모습 대신 라반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라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다듬어지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장장이가 철을 불에 달구어 꺼내어 두드리듯이 이곳저곳을 두드려 인간 야곱을 만드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게 비양심적인 야곱을 훌륭한 도구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행하셨던 훈련을 주목한다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 를 곧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들에게 이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천국 백성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우리들을 두드리고, 다듬고, 훈련시키어 새롭게 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시듯 나를 그렇게 훈련시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더 이상 외삼촌 집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들과 상의하여 라반의 집에서 도망합니다. 타향살이 20년 만에 고향 땅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야곱을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가 사백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그를 맞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싸우려는 것이 아니면 400명이나 되는 부하를 왜 거느리고 올까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가뜩이나 형에게 죄의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야곱은 과거에 행했던 인간적인 수완과 기교를 가지고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음모를 꾸밉니다. 형을 다시 속이는 방법보다는 달래는 방법을 택합니다. 종들과 염소, 양, 소, 낙타를 두 떼로 나누어 한 떼 550마리를 에서에게 예물로 준비하여 보냅니다. 종과 가축 550마리의 예물을 방패삼아 보낸 것을 에서가 쳐 죽이면, 자신은 나머지 한 떼를 데리고 도망하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가축 맨 뒤에는 레아와 그녀가 낳은 자녀들을 세우고, 그 뒤에는 사랑하는 라헬과 낳은 요셉을 맨 뒤에 두었습니다. 물론 자기는 가장 뒤에 서 있다가 에서의 분노가 풀리지 않은 것을 보면 가장 뒤에서 가장 먼저 줄행랑을 칠 계획이었습니다. 야곱은 머리가 빨랐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 머리를 더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욕심 많은 야곱이 자신의 몸의 절반이나 내주는 것 같은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보면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을 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러한 인간적인 수완이 자신의 마음을 결코 평안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면 복수심에 불타 있는 에서에게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야곱은 얍복강 가에 홀로 남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또 다시 홀로 있습니다. 고향 땅을 도망쳐 올 때에 광야 한 복판에서 홀로 쪼그리고 고독한 밤을 지낼 때처럼 홀로 남아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상황 앞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에 중요한 사건과 일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홀로 만나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뒤에서 도와줄 수는 있지만, 위하여 기도해 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나 홀로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외롭지만, 비록 고독하지만, 홀로 아무 것도 가리거나 꾸미거나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진실하게 직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날 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 밤이 새도록 매어달렸습니다. 본문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하나님의 사자와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씨름을 했다는 말은 단순히 우리나라 전통씨름경기만을 연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씨름을 시작한 것은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요, 협작꾼이요, 잔머리 굴리는 지렁이같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적인 수완과 자기 능력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야곱을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이 시작되자 하나님과 대면하여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졸라댑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는, 야곱이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야곱은 단순한 씨름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건져달라는 기도입니다. 26절에 보면, 밤새도록 씨름을 하는데 결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새려하니 하나님의 사자가 나를 좀 놔라! 그럽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나의 이 위기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이 씨름을 못 끝냅니다.’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못 놓습니다.’ ‘기도 응답을 해주시지 않으면 기도를 끝낼 수 없습니다.’ 끈질긴 야곱의 기도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하소연을 하여 마침내 억울함을 푼 과부의 비유 말씀을 하셨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의 딸을 위해 끈질기게 요청하여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구약에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에 대한 아브라함의 끈질긴 간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의 거듭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배워야 하는 것은 야곱이 위기 상황에서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자기 수완이나 능력이나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당면한 위기 상황이, 자신이 꼼 수를 쓰고, 자기 지혜를 동원하고, 자신의 경험과 경력과 능력으로 돌려막기를 하고, 자기 신념과 집념과 고집으로 뭘 하려고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만 붙잡았습니다. 그런 뜻에서 강준민 목사는 [잡초 같은 인생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발버둥치지 말고 매달리라.”고 했습니다. 물에 빠졌을 때 혼자 발버둥쳐야 점점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니 몸에 힘을 빼고 구조원이 던져주는 튜브에 매달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혼자 발버둥치는 것보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인생에 안식이 있고, 복이 있습니다. 혼자 애쓰지 말고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것이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씨름하십시오.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신앙의 자세,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야곱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을 결코 놓칠 수 없다는 신앙에까지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길이 있다! 하나님께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잃으면 다른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니면 말지 뭐! 하나님 아니면 부처님도 있고, 공자님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거고, 이거 아니면 저거고, 뭐 이런 신앙의 자세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신앙에는 여러분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손을 내미십시오.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일에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가진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그 사람의 신앙이 결정됩니다.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집중하느냐?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느냐,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느냐,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갈망하고 원하느냐,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느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제발 주일예배에 빠지지 마십시오. 예배 시간에 늦지 마십시오. 거래처 사람에게도 그렇게 늦습니까? 자신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칠 사람을 만날 때에도 그렇게 늦습니까? 예배를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배시간에 딴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집중이 안 되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의 문제를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께 위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하나님의 뜻과 새 힘을 공급받지 못한 채 또 일주일을 살아간다면 그 삶이 어떤 삶이 될지 훤히 보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예배에 성공한 사람이 삶에도 성공합니다. 예배를 소흘히 여기는 사람은 신앙도 소홀하고, 삶도 소홀합니다. 예배를 구경꾼처럼 보는 사람은 다른 일에도 구경꾼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붙잡아 여러분의 삶에 안식과 은혜가 넘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굴복하려 들지 않자 야곱의 허벅다리를 치셨습니다. 야곱은 평생 다리를 절며 다녀야 했습니다. 야곱이 스스로 깨뜨리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깨뜨리셨습니다. 야곱에게 표식을 남겼습니다. 야곱에게는 깨어짐의 흔적이 다리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깨뜨리신 사건입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부서뜨려 다시 만드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서뜨려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토기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깨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껍질로 단단하게 되어있는 두꺼운 자아가 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자존심이라는 덩어리가 깨어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기 의로 굳어진 교만이 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자아가 깨져야,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깨져야, 자존심 덩어리가 깨져야, 자기 의가 깨져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집니다. 솔직해집니다. 겸손해집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스며들어 옵니다. 내가 깨어져야 온유해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내가 깨져야 십자가를 품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품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메마르고 거친지 아십니까? 깨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깨어지지 않으니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깨어지지 않으니까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통해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가 깨어지지 않으니까 신앙이 자라지 않고 제자리에서 헛바퀴를 돕니다. 내가 깨어지지 않으니까 생명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 차 있는 나, 자존심, 이기적인 생각, 내가 뭔가를 했다는 자기 의, 나의 욕심, 너무도 많은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기 위해서 시련과 고통을 주십니다. 문제를 만나게 하고, 위기를 만나게 하기도 하십니다. 어떤 때는 병을, 어떤 때는 경제적 어려움을, 어떤 때는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위기를 만나게 하셔서 내 스스로 깨어지지 못하는 부분이 깨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 자아가 깨어지면, “이제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말하든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하실까가 나에게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면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지 않는다면 저의 삶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만 잃지 않는다면 내 삶은 괜찮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고, 칭찬 받고, 상급을 받고, 영화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고 하나님께서 오직 영광 받으시면 좋습니다.” 야곱은 이런 삶의 자세로 바뀌어져 갔습니다. 이것이 깨어짐의 은혜입니다. 깨어질 때는 고통스럽지만, 깨어짐의 손길을 경험하고 깨어지고 나면 자유가 있습니다. 진실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영적 성숙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씨름하는 자세, 기도하는 자세, 하나님만을 붙잡는 자세를 다 보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자아와 자존심과 삶의 방식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야곱으로 하여금 그동안 자신의 삶의 모습에 직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대답합니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여러분, 야곱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뜻을 아시지요? ‘발뒤꿈치를 잡은 자’   야곱이라는 그 이름 속에 솔직하지 못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그의 삶을 보면, 항상 계획을 세우고, 뒤에서 조종하고, 은밀한 수단을 쓰고, 교활한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거짓과 속임수와 욕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보존하신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남의 발뒤꿈치나 잡고 사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살도록 인생을 바꿔주셨습니다. 새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후,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브니엘 사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떠난 뒤, 얍복강 가에 새롭게 동이 터 올라 아침 햇살 비취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 길을 절룩거리며 걸어갑니다. 그는 평생 얍복강의 씨름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체험한 깨뜨림의 하나님 은혜를 인생의 걸음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뜨리는 손길을 뻗으실 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깨뜨림의 은혜를 체험하며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의 손길로 새롭게 변화되고 훈련되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08월 30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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