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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 탓 탓  [3078]
· 설교 일자 : 2009년 10월 11일
· 본문 말씀 : 빌립보서 2장 14-15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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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툴 탓 탓 (빌립보서 2장 14-15절)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바로 옆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라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 와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는 헹구어 집으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인에게 말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그러자 안내원은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왜 빨래 비누까지 안 나오냐고 불평한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만족이 없습니다.
  여러분, 어느 때보다도 욕구를 잘 채우고 있는 사회지만, 또한 불만이 가장 많은 사회이기도 합니다.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만족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만스러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불만을 품고 불평하게 됩니다. 비교하는 버릇을 버리지 않는 한 불만, 불평은 계속될 것입니다. 불만은 불평으로 쏟아져 나오고, 불평은 다른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어 누구 탓, 누구 탓하며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강한 원망은 상대방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갖게 하고, 강한 분노는 증오심, 복수심으로 이어집니다. 불평은 불평으로 끝나지 않고 더 커집니다. 확대됩니다.
  교우 여러분, 불평은 전염병은 아니지만 전염성이 아주 강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불평을 잘하는 툴툴이와 함께 있으면 머지않아 쉽게 불평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불평은 바퀴벌레와 같습니다. 지구가 멸망해도 대한민국 아줌마와 바퀴벌레는 생존할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바퀴벌레는 번식도 잘하고, 얼마나 끈질긴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인류 역사 속에서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인간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들 중에는, 불평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마치 바퀴벌레가 끝까지 생존하듯,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원망이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온갖 부정적인 것이 나오기 때문에 따로 배우지 않아도 툴툴대며 불평하는 소리를 잘 합니다. 불만, 불평, 원망이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불평을 안 하고 꾹 참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는 공정하지 못해 보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다른 사람은 적당히 속이기도 하고,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고, 불법을 행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호화스럽게 거들먹거리면서 삽니다. 정말 봐주기 힘듭니다. 이 세상은 공평치 않다고 불평이 나오는 것을 참기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 속에서 빛들로 나타나려면, 모든 일에 불평과 원망과 다툼을 없이하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37편은 ‘불평이 많은 사람을 위한 시편’이라고 불리우는 시인데, 7,8절에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 성경은 우리 자신을 위해 불평을 멈추라고 말씀합니다. 불평하는 것은 오히려 악을 만들뿐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불평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불평은 하나님께서 주신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를 범하는 일입니다. 불평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이라도 다스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불평하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선한 일을 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부정적인 환경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모든 문제는 마침내 내게 행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려는 행복을 걷어차고 거절하는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에 죄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목적과 계획과 뜻을 가지고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고 중심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상황과 환경과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기 때문에 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툴툴쟁이, 투덜쟁이, 모세의 탓, 하나님 탓하며 툭하면 툴툴 탓 탓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다름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한다고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 그 때에 모세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실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지금 하는 원망은 우리들에게 하는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원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도무지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입을 여는 것은 원수가 침입하여 파멸시킬 수 있도록 성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불평하는 말을 하고 원망하는 말을 할 때, 원수 마귀는 쾌재를 부릅니다. 얼씨구나! 하고 우리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불평하도록 만든 후에 불을 지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까지도 잊게 합니다. 불평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자기의 부정적인 감정에 따라 말하고, 판단합니다. 그 결과 불평하는 사람은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게 되고, 점점 부정적이고 악해져서 불행과 실패와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불평과 원망이 불행과 실패를 만드는 사슬이요, 하나님께는 죄를 짓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과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선하신 손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계속되는 억울한 일들을 겪으면서 상황에 대해 불평하고 형들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원망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그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다윗도 사울 왕에게 광야에서 10년 동안 쫓기어 다니면서 불평하고 원망만 했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불평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는 고통스럽고도 불편한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복음을 전하는 데 많은 불편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평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또한 매도 수없이 맞고 돌에도 맞고 복음을 전하러 가는 중에 배가 난파되기도 하고 온갖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면서 일하는 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내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불평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빌립보서 4장 11-13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엘리자 에드문즈 휘윗 여사는 미국 필라텔피아 공립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살면서 세가지를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셋째는 하나님의 어린이들이었습니다. 1887년 겨울에 그의 학교에 성격이 삐뚤어진 문제 소년이 있었는데 어찌나 못됐든지 학교에서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휘윗 선생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지도하면 그도 달라지겠지 하고 그를 타일렀으나, 그 소년은 옆에 있던 큼직한 벽돌로 히윗 선생님의 등골을 사정없이 후려쳐서 척추뼈가 골절되어 으스러졌습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히윗 선생님은 쓰러져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급송되어 전신에 석고 붕대를 감고 병상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앞날이 암담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은 절대 선하신 분이시니 결코 나에게 악한 일이 임하게 하시지 않을거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에 기적으로 응답하셔서 그녀의 상처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런 회복 중에 그가 작사한 찬송가사가 370장(옛찬송 455장) 가사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1절,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2절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후렴)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녀에게 기적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6개월이 되자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허락을 받고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가 조심조심 걷게 되었습니다. 그 때 따스한 봄볕이 내리 쬐였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이 활짝 열려 그리스도의 은혜의 햇빛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메워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그 때 작사한 찬송 가사가 428장 (옛찬송 488장)입니다. “1절,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보다 이 빛 더 빛나네  4절, 내 영혼에 희락이 있고 큰 소망 넘치네 주 예수 복을 주시고 또 내려 주시네 (후렴) 주의 영광 빛난 광채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그는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쏟아내지 않고, 하나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찬양하였습니다.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쏟아내지 않고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기적 같은 치유와 회복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교우 여러분, 불평할 거 다하고, 원망할 거 다하고 언제 믿음의 삶을 살 것입니까?
  교우 여러분,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순간에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9일은 한글날이었습니다. 한글날에 맞추어 서울 세종로에 세종대왕상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축사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우리나라 문맹률은 1%이고, 전 세계에서 자기 나라 언어가 만들어진 것을 기념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더군요. 또 한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풍부한 표현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노란 색에 대해서, 노랗다, 샛노랗다, 누렇다, 누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노릇노릇하다, 노리탱탱하다, ... 외국말로는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말이 뛰어난 언어이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드신 것은 위대한 업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면서 한글로 좋은 말, 아름다운 말, 밝고 사랑스러운 말을 하라고 만들었지, 어둡고 부정적이고 더럽고 죽이는 말로 사용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 사용하는 언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용하는 말은 어떤 말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감사와 찬양이고, 흑암 나라의 언어는 불평과 원망이라고 합니다. 감사와 찬양은 아름다운 일을 더욱 아름답게 하지만, 불평과 원망은 그것을 깎아내립니다. 먹칠합니다. 더럽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말하든, 흑암나라의 언어로 말하든 둘 중의 하나의 말로 말합니다. 흑암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침에 자명종이 울리면, “아! 누가 저런 시끄럽고 몹쓸 기계를 만들었어!”라고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하여 툴툴대고, 비아냥거리고, 냉소적인 말을 하고, 누구 탓, 누구 탓이야 하며 온갖 부정적인 흑암의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흑암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백설공주가 더 좋습니까? 우거지가 더 좋습니까? 백설공주란 "백"방으로 "설"쳐대는 "공"포의 "주"둥이라는 말의 약자랍니다. 백설공주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도무지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는 온갖 부정적인 말, 즉 불평과 원망과 험담과 비방과 더러운 말과 죽이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서도 안 됩니다. 부정적인 것은 쉽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거지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겉보기에는 수수합니다. 우거지의 뜻은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미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긍정적입니다. 겸손합니다. 온유합니다. 기분을 좋게 해 줍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은 부드럽고 예쁘고 교양 있고 듣기 좋게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으로써 반드시 거칠고 더럽고 몰상식하고 악하게 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민수기 14장에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여 온 12명 중에 10명이 가나안 땅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살고 있던 거민들이 자기들보다 강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14장 1절 이하에,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0명의 정탐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에 대해 불평함으로써 민족 전체에 불만의 씨를 퍼뜨리고, 원망의 아우성 소리를 내게 했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1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6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악한 사람들에게 내가 언제까지 참으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광야에서 죽고 싶다고 했지. 너희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다.” 그리하여 출애굽 당시 세대는 광야에서 그들의 말대로 다 엎드러져 죽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우리의 말이 하나님께서 들으신대로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불평과 원망을 없이 하십시오. 그래야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납니다. 빛들로 나타난다는 말은 행복한 사람으로 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의 천사들의 행정착오로 어떤 남자가 때가 아닌데 죽어서 하늘나라로 불려갔습니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실수였다는 것이 밝혀져 다시 이 세상으로 돌려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실수한 천사들이 미안했던지, 소원 한 가지를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 소원을 말했습니다. “내 소원은 함께 살던 마누라 말고, 예쁘고 착하고 요리 잘하고 지혜롭고 낮에는 살림꾼, 밤에는 요부, 밖에서는 활동적이고 집 안에서는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자녀들에게는 가정교사처럼 잘 가르치고, 이웃 사람들하고는 사이좋게 지내고, 시부모에게 효성 지극하고, 시누이들하고 잘 지내는 여자와 결혼해서 살게 해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천사가 하는 말, “아니, 이 사람아! 그런 여자 있으면 내가 결혼해서 살지!” 그러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런 완벽한 아내는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완벽한 아내가 없는 것처럼, 완벽한 남편도 없습니다. 남편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있을 때 잘하십시오. 당신 남편이니까 당신 같은 아내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줄 아십시오. 아내에 대해 불평하지 마십시오. 있을 때 잘하십시오. 당신 아내이니까 당신 같은 남편과 결혼해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인 줄 아십시오.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서, 부족하고 연약한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돕고 서로 노력하고 서로 성숙해져 가는 것 아닙니까? 좋은 모습으로 변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지지리 못난 사람은 ‘나 원래 그래!’그러면서 고집불통으로 전혀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상대가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 이런 사람과, “이런 인간과” 살아야 하나... 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조금씩이라도 한꺼번에 안 되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하려고 노력할 때, 거기에서 숨통이 조금씩 열리게 됩니다. 불평이 사라지게 됩니다.
  불평은 불행으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여러분, 불행한 가정이 되고 싶습니까? 너무도 쉽습니다. 오늘 집에 가자마자 보이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마구 불평하십시오. 그러면 불평은 불평을 낳고 불평은 또 불평을 낳고 그래서 불평은 여러분의 가정에 불행으로 충만하게 채워줄 것입니다. 라이트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평과 잔소리 한 마디 한 마디는 당신 집안에 한 삽씩 한 삽씩 무덤을 파 들어간다.” 그러므로 여러분, 불평하지 마십시오. 불평하면 할수록 자신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내려갑니다. 가정이 무덤을 파고 내려갑니다. 교회에 불평하면 할수록 그의 믿음이 무덤을 파고 내려갑니다.

  여성 여러분, 요즘 화장이 잘 받습니까? 교우 여러분, 건강하십니까? 기쁨이 있습니까? 사람들과의 관계는 괜찮습니까?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습니까? 행복하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때문입니까?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툴툴거리는 투덜이는 아니십니까? 누구 탓, 누구 탓 하며 원망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툴툴 탓탓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불만이 생깁니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성숙과 인격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져야 발전이 있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불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죄악된 불만, 불평, 원망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과 감사와 찬양으로 채웁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도록 믿고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9년 10월 1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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