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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3700]
· 설교 일자 : 2009년 12월 27일
· 본문 말씀 : 역대하 32장 24-33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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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역대하 32장 24-33절)
  어느 날 한 국도에서 경찰이 속도위반 차량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한 차만이 너무 느리게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의 차량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차를 불러 세웠더니, 할머니 네 분이 타고 있었는데, 한분은 운전하시고 나머지 세분은 뒤 좌석에 앉아 다리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운전자 할머니는 경찰에게 “늙은이를 왜 잡는 건가?” 경찰, “여기서는 그렇게 느리게 달리면 안 됩니다.” 할머니, “이상하다... 분명 이길 처음 부분에 20이라고 써 있던데.. 그래서 20km 속력으로 왔는데 뭐가 잘못 됐어?” 경찰, “아! 그건 국도 표시에요.. 여기가 20번 국도거든요..” 운전하시는 할머니는 도로 표지판에 몇 번 국도라고 써져 있는 숫자를 속도제한 숫자로 본 것입니다. 할머니가 “아 ~ 그래 거참 미안혀... 내가 왕초보 운전이라 그래...” 그런데 경찰이 보니 뒤 좌석에 앉은 할머니들이 얼굴이 창백하고 손발을 부들부들 떨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근데 뒤에 할머니들은 왜 손발을 부들부들 떠시나요?” 할머니 한 분이 대답하시기를, “좀 전에 우리가 210번 국도를 타고 왔거든...”
  여러분, 이 이야기는 유머이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운전을 하려면 교통법규나 도로표지판을 제대로 알고 운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행동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힘들어진다는 것, 잘못된 목표를 향해 괜한 열심을 내고, 죄짓는 일에는 마구 달려 과속하지 말자는 것, 정말로 중요한 것, 꼭 해야 할 일에는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여러분은 한 해 동안 어땠습니까? 잘 달려왔습니까? 인생운전을 잘 한 한해였습니까?

  교우 여러분, 올 한 해도 다사다난했습니다. 특히 신종 플루로 인해 온 나라, 아니 전 세계가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겨내셨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계까지 어수선한 한 해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해 동안 우리의 시선이 자꾸 갔던 곳들, 우리가 귀를 쫑긋 세웠던 말들, 우리의 발자국들이, 우리의 생각들이 머물렀던 곳들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봅니다. 우리가 그렇게 욕심 부리고 큰소리내고 화를 냈던 일들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왜 허탄한 일에 분주했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우리가 내 뱉은 말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는지, 우리가 한 손짓들, 우리가 한 몸짓들이 무엇을 만들어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또한 우리가 흘린 땀방울들이 어디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어 자라고 있을까? 하고 기대해 봅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고 간구한 기도가 어떻게 응답받았는지, 우리가 전한 복음이 어떻게 열매를 맺어가고 있고,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한 그 무엇이, 그것이 말이든, 봉사든, 전도든, 사랑의 섬김이든, 기도든, 헌금이든, 신앙의 실천들이 어떤 결과를 맺었을지 기대하며 기다리며 2009년 마지막 주일을 맞습니다.

  오늘은 남 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시간, 히스기야의 삶을 통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히스기야는 선왕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조상 다윗 왕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 우상들을 부수고, 산당들을 제거했습니다. 열심히 나라를 다스렸고, 앗수르라는 신흥 강대국의 공격을 자주 받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충고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심으로 히스기야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도 나라를 잘 지켜나갔습니다. 특히 앗수르와의 전쟁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자 히스기야 왕과 유다 왕국은 주변 나라들로부터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이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찾아와 바치고, 선물을 줄 정도였습니다. 이 내용이 본문 앞 2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다가 히스기야가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24절 내용입니다.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을 향하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시고 생명을 구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히스기야가 삼일 만에 성전에 올라갈 정도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고, 15년 생명을 더 연장해 주실 것과 앗수르로부터 유다왕국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죽을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에는 자세한 기록이 나오지 않았지만, 열왕기서에는, 히스기야가 병이 나은 후에, 바벨론 왕의 사신이 왔을 때에, 자기 보물고의 금과 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바벨론과의 동맹관계를 맺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들이 왔을 때에 시험에 넘어졌다고 31절에 말씀합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본문 25절에,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해져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며,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을 때에는 처음 믿음, 처음 사랑, 처음 은혜를 기억하며 그때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밖에 없다고,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라고,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하나님께만이 삶의 주권이 있다고 고백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 낫고 난 뒤에는,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 온 평온 속에서는 마음이 해이해졌습니다. 기도의 끈이 느슨해졌습니다. 갈망이 간절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하나님을 뒤로 하고 자기 자신이 앞섰습니다. 히스기야 같은 사람이 그렇게 교만해 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그가 교만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이 ‘히스기야도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히스기야처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철저히 경험한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잊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에게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마음이 쉽게 해이해지고, 쉽게 믿음이 흩어지고, 쉽게 은혜를 잊지 않습니까?

  우리는 히스기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묵상자료집의 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께서 큰 참나무도 만드셨고, 아주 작은 손길이 필요한 아네모네도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지금도 큰 일을 행하시기도 하고, 아주 작은 일도 행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에게 일어난 큰일들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주 작은 일들, 그 작은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고 놀랍고 능력이 넘치는 일들을 행하실 뿐만 아니라 작고 섬세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적인 일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작고 보잘것없는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들이 이어지고 연속되어 하루를 만들고, 한 달을 살게 하고, 일 년을 살게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모든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범사에 감사드릴 때,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감사드릴 때, 우리의 믿음의 눈은 더욱 밝아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임을 감사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감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과거로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슬픔과 고난이, 과거에 행한 실수와 실패와 어리석음이 신앙 안에서 새롭게 리모델링됩니다. 믿음 안에서 재편집됩니다. 은혜 안에서 재활용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그것들이 교훈이 되고, 지혜가 되고, 믿음의 반석이 되고, 성장의 사다리차가 되어 우리를 성장의 위단계로 올려줍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마무리하고 매듭을 짓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다짐입니다. 감사로 한 해를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자기가 무엇을 하였음으로 그것을 다른 사람앞에 드러내고 싶을 때, 자기가 무엇을 하였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여 으시대고 자랑할 때, 자기가 무엇을 하였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잊을 때, 교만이 시작됩니다. 교만이 자라게 됩니다. 교만이 우리들의 목을 곧게 만듭니다. 교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합니다. 비방하게 합니다.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합니다. 교만이 여러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합니다.
  히스기야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니까 교만해졌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결국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지면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에게 본받을 점은 재난을 겪으면서 빨리 깨닫고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는 점입니다. 26절,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우리들도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 죄를 지은 것, 실수한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좋습니다. 돌이킬 것은 지체하지 말고 빨리 돌이키는 것이 좋습니다. 회개할 것은 빨리 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역대기서를 통해 수많은 왕들의 사적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왕들 중에 하나님께 정직하게 행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책임을 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잘 하는 것 같다가도 변하고, 회개하고 돌이켰다가도 다시 악하여진 왕들이 있습니다. 그런 왕들이 처음에 잘 하다가도 끝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보면, 항상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를 잊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고서,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섬기고, 그 방법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그것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가 꼬였습니다. 근본이 흔들렸습니다. 히스기야도 빨리 회개하고 돌이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왕들처럼 똑같은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다른 것에 기웃거리고, 다른 것으로 인생의 성공, 사업의 성공, 가정의 화목을 이루려고 한 적은 없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처럼 살지는 않았습니까?

  지난 월요일 21일에 제가 집에 있는데,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내가 문가로 가서 누구냐고 물으니까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나갔습니다. 역시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겠더군요.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젊은 남자 한 사람, 그 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여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이죠?”라고 묻자 젊은 남자가 하는 말이, 자기들은 강원도에서 수도하는 사람인데, 우리 집에 있는 기운이 너무 좋아서 좀 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초인종을 눌렀다고 했습니다. 순간 제 속으로 “기운 좋은 게 당연하지. 예수 믿는 집이고, 목사 집인데...” 그리고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서 “됐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았습니다. 아마도 그 들은 아파트 전체 집을 다 눌러대면서 똑 같은 말로 현혹할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고 집안으로 그들을 들이면, 그들은 이 집은 다 좋은데 한두 가지만 어떻게 하면 액이 떠나고, 나쁜 기운을 막을 수 있다고 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불운을 겪게 될지 모른다고 엄포를 놓고 불안을 조성하겠지요. 그러고 난 뒤,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고 하면서, 부적을 팔든지, 굿을 하라고 하든지, 액땜을 위해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든지, 자기들의 가지고 온 무슨 물건을 팔겠지요. 그것도 고가에 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에 혹하고 넘어가니까 그러고 다니겠지요?
점점 더 사람들을 미혹하는 방법이 다양해져가고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의 중심을 잃으면 미혹됩니다. 지난 금년 3월 초에 해운대에 있는 모 백화점 개업 행사에서 빨간 속옷을 사느라 난리법석이 되었던 사건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지난 12월 17일에 롯데 백화점 광복점이 개장했는데, 부산. 경남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개업 점포에서 붉은색 속옷을 사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은 이번에도 위력을 발휘해 울산, 창원, 경남 지역에서부터 수많은 고객들이 원정까지 왔다고 합니다. 롯데측은 이번에 빨간 속옷을 35억 원 어치, 총 11만장을 준비했는데, 20억 원 어치가 팔렸답니다. 여러분들은 그날 그곳에서 빨간 빤스 산 사람 없지요? 그 날, 75살 난 김모씨는 8층 속옷 매장에서 혼잡한 틈을 타 빨간색 남녀 속옷 10점(45만원 상당)을 훔치다가 들켜 경찰에 입건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행운을 훔치려다 불행의 쇠고랑을 찼습니다.
  아마도 부산 시내에 빨간 빤스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이런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왜 슬프냐구요? 안타깝고 부끄럽고 개탄스러워 슬픕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빨간 빤스가 무슨 행운과 복을 줄 수 있다고..., 그렇게 생명줄이 아닌 지푸라기,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으려고 해야 하는지, 그런 인생을 보니 슬픕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에 화까지 납니다. 여러분 가운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재미있는 일로 그냥 봐 주면 안 되냐’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교우들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화가 납니다. 여러분,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 지 아십니까? 그렇게 한 발 한 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그 결과 점점 더 미신과 주술과 사주팔자와 악령에 의해 조종되는 점과 굿에, 우상에 빠집니다. 그런 것 좋아하면 이단과 사이비종교에 넘어갑니다. 지난 광주하늘마음수련원에서 일어난 수련원 장악을 위한 해괴망칙한 사건은 교주 이승헌의 단학서원 수련원입니다. 이승헌은 보건범죄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위반, 교육법 위반, 음란공연죄 실형을 선고 받은 자입니다. 뇌호흡한다고?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허탄한 것에 빠져, 이단과 사이비에 빠져 패가망신 가산탕진 인생파탄이 일어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역대기를 보니까, 자기가 전쟁해서 이긴 나라를 정복하고서, 그 나라의 우상을 가져와 섬기는 왕도 있었습니다. 유다 왕 아마샤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는 나라의 백성들도 못 지켜주는 그런 신을 섬기느냐고 경고하셨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지요. 전쟁에서 이기게 하지도 못하는 그 나라의 우상이 무슨 매력이 있고, 무슨 능력이 있어 보인다고 그렇게 합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미신, 주술, 부적, 점성술, 기, 무당에 빠지는 것이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판단하지도 않고, 앞뒤를 분별하지도 않고 빠집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1장 21절 이하에 있는 말씀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미혹됩니다. 해결해주지 못하는 존재와 허상을 붙잡고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으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이시오, 반석이시오 구원의 뿔이시오 산성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송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라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하나님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32절, 33절은 히스기야의 생애 마감에 관한 글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끝까지 잘 마무리를 잘 해야겠다는 깨달음과 다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히스기야의 기록이지, 우리가 죽은 뒤의 기록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으려는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이점이 히스기야와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히스기야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살아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닙니다. 호흡이 끝나고, 심장 박동이 멈추고, 혈액 순환이 더 이상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와 마음과 생각과 신앙이 있습니다. 이 점이 분명히 우리가 지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비록 잘은 못 산 것 같을지라도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새해를 계획하고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이 송년주일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고 기대하시는 모습입니다.

  돌아보며 후회만하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없습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성장이 없습니다. 후회의 비탈길로 내려가는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책과 낙심과 절망뿐입니다. 신앙인은 후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후회의 비탈길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날개를 움직여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날개를 펴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힘차게 날개짓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날개에 힘을 주십니다. 우리의 날개짓이 힘 있는 날개짓이 되도록 기도의 근육과 믿음의 근육에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하나님의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각도와 방향을 잡게 해 주실 것입니다. 겸손의 자세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낮추고, 감사의 자세로 우리의 눈과 입술과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면, 비록 우리의 등 위에 온갖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허물과 실수와 실패와 죄악이 있었을지라도, 실망과 낙심과 절망과 포기가 있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회복하게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2009년의 남은 날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2009년 12월 2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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