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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삶의 방식  [3755]
· 설교 일자 : 2010년 02월 28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5장 5-8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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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삶의 방식 (요한복음 15장 5-8절)
  내일은 3.1절 독립운동 기념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에 의해 침탈당하였을 때, 기독교가 앞장서서 독립을 부르짖으며 총 궐기했던 날입니다. 3.1절을 앞두고 김연아 선수가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동계올림픽 피겨여자싱글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입니다. 지난 24일 쇼트프로그램 경기 때, 제 큰 아들이 고속도로휴게소에서 보니까, 국민들이 휴게소 텔레비전 앞에 다 모여서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점프를 할 때는, 보고 있는 국민들이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같이 뛰었다가 김연아 선수가 빙판에 착지하면 같이 ‘으흠~’하면서 같이 행동하더랍니다. 이런 온 국민들의 응원을 힘입어 26일 프리스케이팅 경기까지 합산하여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습니다. 3.1절을 맞으면서, 요즘도 지속적으로 독도를 계속 넘보는 시대착오적인 일본을 누르고 딴 금메달이라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제 아내에게 “우리도 김연아 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아유~ 김연아 같은 딸이 되려면, 김연아 부모처럼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데... 당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더군요. 김연아 선수에게는 김연아 부모가 있으니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 때문에 각 가정의 딸과 엄마 사이가 많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엄마들이 “아유, 저 김연아는 피겨도 잘 하고, 얼굴도 예쁘고, 광고도 많이 찍어서 돈도 잘 벌고, 성격도 좋다는데...” 그러면서 옆에 있는 딸을 힐끔 보면서 “휴~ ”하고 한 숨을 쉰답니다. 그러면 딸들이 엄마한테 불만스럽게 “엄마는 왜 날 처다 보는데, 김연아 하고 왜 비교하는데!” 그러면서 사이가 안 좋아진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저희 큰 아들이 자기는 딸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야, 이 녀석아! 수영의 여름 소년 박태환 선수 나오면, 아들인 네 신세도 비슷해져...” 그랬습니다. 물론 그렇게 비교해서는 안 되겠지요.
  여하튼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일본은 금메달을 하나도 못 따는 수치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36년 식민지국가였지만, 이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정도가 아니라 당당히 일본을 능가하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부산시찰 목사부부선교 수련회 장소인 필리핀은 스페인에게 300년 지배당하였고, 그 후 미국에게 50여년 지배를 당하였다가 독립하였다가, 다시 일본에게 3년 지배를 당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식민지 생활을 36년간 했고, 필리핀은 360년 이상 식민지 지배를 당했습니다만, 식민지 경험이 있는 독립 국가로써 우리나라와 필리핀의 지금의 모습은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나라가 6.25전쟁을 겪을 때만 해도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고,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파병한 유엔참전국입니다. 필리핀은 현재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조금 더 많습니다. 지금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식민지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카톨맄이 87%라는데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이라면 필리핀 국민들의 의식과 삶의 방식이 왜 변화가 없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옛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죄의 종으로, 불행의 노예로,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면 삶에 변화와 발전과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와 복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네 종류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네 가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살펴봄으로 우리들의 신앙과 삶을 바르게 하고자 합니다.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을 살아가는 네 가지 방식 중의 첫 번째 방식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믿는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은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는 분명하게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름은 걸쳐 있지만, 실제로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 말씀에,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나뭇가지가 시들고 메말라 죽어가듯, 영적 생명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본문 말씀 5절 하반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는 말씀처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제 바로 밑의 여동생이고, 목사이자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신옥수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영적인 부분이 강했습니다. 저희 집 앞 양옆 길에,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아카시아 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카시아 꽃이 피는 때이면 그 향기가 바람에 날려 저희 집에도 그윽하였습니다.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5학년 때인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지가 부러져 꽃잎이 사람들의 발에 짖 밟히고 나뭇잎이 시들은 가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와 저희 어머니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엄마, 이것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이 아카시아 가지처럼 시들고 사람들에게 짖 밟히게 되는 거지요?” 동생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부러져 떨어진 가지를 보면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15장의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 말씀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러더니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본인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과 떨어져 살아감으로, 가지가 나무줄기에서 부러지든지, 떨어져서 결국 시들어 말라 비틀어져 결국 태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 자기 방법으로, 자기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그저 인격수양을 위해서,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싶어서,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저 여가선용하는 정도의 교회생활을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삶에 예수님의 정신도 없고, 예수님의 진리도 없고, 예수님의 복음도 없고. 예수님의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거의 뇌사상태처럼 겨우 연명합니다.
  이번 필리핀 선교 수련회를 주님 은혜 가운데 잘 다녀왔습니다. 필리핀선교현장을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필리핀은 72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그중 중간 지역 섬의 두마게띠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부산시찰 출신이고 평양노회 소속인 박윤식 선교사의 사역지에 갔었습니다. 박선교사는 햇수로 약 9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선교후원 교회가 후원이 중지되는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어려움을 잘 견디고 지금은 성공적으로, 아주 열심히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현지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에는 그들의 찬양과 열정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길어져도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참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배 시간이 한 시간만 넘어도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는 우리나라 교인들의 모습이 자꾸 비교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은 1521년 포르투갈 탐험가 마젤란이 필리핀에 들어와 포르투갈이 필리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지만 나중에는 스페인에게 식민지 생활을 300여년 했습니다. 카토맄 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필리핀에는 도시 중앙에 시청이 있으면 그 앞에 공원이 있고, 그리고 카토맄교회가 반드시 있었습니다. 전 국민의 87%가 카토릭 신자들이고, 개신교가 4.5% 그리고 모슬램이 5%, 그 외는 토속신앙입니다. 그런데 87%가 카토릭 신자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성당에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가 불교신자들이 사월초파일에 절에 한번 갔다 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집 문 위에 예수님 성화와 마리아 성화가 그려져 있는 집이 많이 있었습니다. 선교사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신앙심이 깊어서라기보다 그냥 부적과 같이 그림을 붙여 놓은 것이랍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 같고, 성경적인 활동을 하는 것 같고,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 건물이 있고, 87%의 카토릭 신자들이 있지만, 진정으로 복음적인 신앙과 정신, 그리고 자세가 없기 때문에 신앙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생명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방식으로 사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에는 첫 번째 삶의 방식이, 즉 자기 노력으로 사는 것이 무력함을 경험한 후, 정반대 극단으로 치우쳐 전혀 아무 것도 안하기로 결심하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는 뒷짐 지고 있는 삶입니다. 우리의 노력은 헛된 것이며, 단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는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믿는 신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신앙 방식은 마치 감나무 아래 누워서 다 익은 홍시감이 자기가 누워 벌리고 있는 입안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삶의 방식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주님, 도와주십시오.”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예수님께 대한 부분적인 의뢰입니다. 어느 부분까지는 자신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구합니다. 이 방식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 살아가다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 생기면 그 때에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위기 상황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 힘으로 살다가 위기 상황이 닥치면 그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면,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 알아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님하고 나하고 잘 협력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입니다. 부분적인 의뢰입니다. 필요에 따라 믿기도 하고, 내가 알아서 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내 힘으로 잘 해보려고 하는 방식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 번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기로 말하면 스위치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전기 코드를 꼽았다 뽑았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 필리핀을 오가는 비행기 편은 저가 항공에다가, 규모가 작은 비행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기내에서 물 한 잔도 서비스가 없고, 물을 마시려면 우리나라 돈으로 2천원을 주고 물 한 병을 사먹어야 했습니다. 그건 그렇다하더라도, 갈 때는 순항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행시간이 4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는 편에는 1시간 반 정도 비행시간을 남겨 두고는 계속 난기류를 만났는지 비행기가 흔들리고 위 아래로 급하게 떨어지면서 탑승객들은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에서 컵라면을 사서 먹던 신혼여행부부는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칠 때 컵라면이 쏟아져서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어린이와 멀미에 약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위생봉투를 사용하여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감사하게도 멀미 종합세트인 제 아내는 퀴미테를 붙이고 위생봉투를 사용하지 않는 놀라운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비행기가 불안하게 흔들릴 때,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기억나는 세계 각국의 비행기 사고 사건들, 영화에서 본 비행기 사고도 떠올랐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평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지만 이렇게 위기 상황을 만나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방식의 삶의 방식입니다. “아이쿠 하나님, 이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앞으로는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 “주님, 이번 일만 잘 되게 해주시면 제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붙잡다가 일이 해결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삶이 반복되는 경우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 처럼 반복하는 삶입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가실 때였습니다. 그 때에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쳐서 배가 가라앉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빠져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잠에서 깬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조용하라고 하시고, 바다에게 고요하라, 잠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어째서 너희는 이토록 겁이 많으냐?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의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지속적이지 않고 필요할 때에만 도움을 구하는 믿음으로만 나타납니다.
  이렇게 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아가는 온전한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과 풍성함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했는데, 신앙의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세 번째 삶의 방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사는 방식이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복음의 원리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삶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네 번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방식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 네 번째 삶의 방식이 오늘 본문 포도나무 비유 말씀의 삶입니다.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네 번째 삶의 방법은 예수님 안에서 사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 꼭 붙어있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께로부터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말씀과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주 안에서”라는 표현이 200 여 곳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신의 삶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나무줄기에 가지가 붙어있게 하는 접착제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십니다. 도슨 트로트맨이라는 분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수레바퀴 예화를 만들어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중심축으로 설명했습니다. 여러분, 수레바퀴 아시지요? 수레가 굴러가려면 바퀴가 두 개 또는 네 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 바퀴가 굴러가려면, 그 바퀴를 돌아가도록 힘을 공급해주는 축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수레바퀴의 축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능력을 공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수레바퀴는 네 개의 살로 이루어진 바퀴로, 힘이 축으로부터 나와 바퀴의 살들을 통해 바퀴 테에 전달되어 테를 돌리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능력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와서 말씀, 기도, 교제, 증거와 같은 수단들을 통해 전달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레바퀴 예화에서 바퀴의 살들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바퀴가 돌아가는 데 있어서 바퀴의 살들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퀴를 움직이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 능력은 축입니다. 우리는 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다시 설명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필요한 능력과 은혜를 공급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나 기도, 교제 자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필요한 능력과 은혜를 공급하는 근원이요 중심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들에게 전달하시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성도가 서로 교제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는 일입니다.
  바퀴가 축을 벗어나서는 굴러갈 수 없듯이, 포도나무 가지도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지 않으면, 예수님과 떨어져 있으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허무한 인생,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 열매 없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복음적인 삶의 방식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 말씀이 네 번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앙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인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그는 위기를 만났을 때나 문제가 꼬일 때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면서 ‘내 삶을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삶을 다스려주십시오.’ ‘내 삶을 주관하여 주십시오.’ ‘내 삶을 보호하여 주십시오.’ 간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는, “주님, 제가 이 어려운 상황을 이길 수 있도록 지혜와 능력을 주십시오. 저는 이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셔야만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오는 비행기편에 벌어졌던 상황을 다시 말씀드리려 합니다. 비행기가 난기류 속을 불안하게 비행하는 가운데, 제 마음 한 편으로는 ‘목사들이 이렇게 많이 탔는데 하나님께서 평양노회 부산시찰 교회들을 위해서도 별일을 없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나를 불러 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눈을 감고 ‘만약 내가 비행기 사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할 일을 다했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모두 다 주님의 일이라는 확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달려있다는 전적 의뢰,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는 순종하면 된다는 믿음,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고 계시니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결국 나는 영생할 것이라는 소망, 이런 일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향한 사랑, 또한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지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만약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래서 만약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손과 발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내가 말을 하고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고, 내가 주님께 붙어 있지 않고,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면,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위대해 보이고,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고, 인류를 위해 굉장한 업적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땅에서 그런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는 합당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사랑과 지혜와 힘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이 됩니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이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과 우리는 포도나무와 그 포도나무의 가지의 관계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구걸하지 마라. 필요한 것을 주안에게 알리는 관리처럼, 주인에게 문제를 알리면 즉시 해결된다는 것을 아는 관리처럼 와라! 내가 네게 공급하기를 갈망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걸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쉽고 필요할 때 하나님께 구걸하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집의 자녀가 하나님 안에, 주님 안에 있으므로, 필요한 것을 공급 받으면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풍성함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0년 02월 2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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