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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켜져 있습니까?  [3366]
· 설교 일자 : 2010년 10월 17일
· 본문 말씀 : 디모데전서 1장 18-20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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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켜져 있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 18-20절)
  6급 공무원인 차씨는 김모씨와 6년 동안 내연관계로 지내다 지난 4월께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차씨는 김씨가 한모씨와 사귀면서 자신을 피하는 것에 화가 나 지난 7월 김씨의 집으로 쳐들어갔습니다. 마침 김씨와 한씨가 같이 있는 모습에 격분한 차씨는 준비했던 도끼를 한씨와 김씨에게 휘두르고 불을 지르겠다며 휘발유를 뿌렸습니다. 차씨의 ‘도끼 만행’으로 한씨는 머리에, 김씨는 손가락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런 범죄로 기소된 차씨는 법정에서 당시 술에 취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고 해명하며 심신미약 상태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차씨는 지난 13일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았습니다. 이런 도끼만행은 1960년대 고재봉이라는 사람과  1976년에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이 차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천안함 전사자인 고(故) 신선준 상사의 어머니가 이혼한 뒤 연락이 끊겼다가 27년 만에 나타나 신 상사의 군인사망보상금 2억원 중 1억원, 군인보험금 1억원 중 5000만원을 받아갔다고 합니다. 또 고 정범구 병장의 친아버지는 정병장이 2살 때 이혼하고 잠적했다가 군인사망보상금의 절반인 1억원을 몰래 찾아갔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프랑스 사상가 루소는 자신에게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하나의 동물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은 양심을 잃어버린 인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양심의 기능을 잃어버리면 인간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사회질서를 지탱하는데 세 가지 필요한 것이 있는 데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양심이요, 셋째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양심이 바르지 않다면 선한 법도 악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악법이 됩니다. 참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양심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양심을 주셨습니다. 양심은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양심의 상태가 아닙니다. 온전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양심은 온전한 양심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양심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 영향 받은 양심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부정한 짓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년 말에 불우이웃돕기를 했습니다. 그는 불우이웃을 도운 것 때문에 부정한 짓을 한 것을 잊고 양심의 가책을 못 느낍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굉장히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도둑도 자신이 양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도 양심이 있지, 나는 도둑질은 하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양심이 온전한 양심입니까? 문화에 따라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는 것도 다릅니다. 몽골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면 자기 아내를 하룻밤 빌려준답니다. 또 식인종들은 사람을 잡아먹으면서도 전혀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양심에 거리낌을 못 느끼는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속에서 양심이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양심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는 ‘약한 양심’을 말씀합니다. 디도서 1장 15절에,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고 말씀하면서 ‘더러워진 양심’을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9절에는 집사의 자격을 말하면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3절에는 ‘청결한 양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는 ‘악한 양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에는 “화인 맞은 양심”을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 21절에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사도 바울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교우 여러분,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왜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할까요? 이 말씀 속에는 양심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진 양심, 악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깨끗한 양심, 온전한 양심, 선한 양심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양심은 우리를 교훈합니다. 다윗은 시편 16편 7절에,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선한 양심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교훈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여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교훈합니다. 한 경직 목사님의 글 중에, 인간이 어두운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두 가지 등불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성의 등불이요, 다른 하나는 양심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너희는 이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이성의 등불을 밝히라는 뜻이고, 또한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씀은 양심의 등불을 밝히라는 뜻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인간이 걸어갈 삶의 길은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아서 때로는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그 때에 이 양심이란 등불이 있어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을 가리켜 줍니다. 교훈합니다. 선한 양심의 등불이 켜져 있어야 우리의 삶이 교훈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 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맹인이 길을 가는데 자기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마찬가지 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자기를 못보고 부딪칠까 하는 생각에 등불을 켜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쳐서 이마가 상했습니다. 맹인은 화가 나서 “나는 맹인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당신은 눈 뜬 사람인데 이 등불을 보고도 왜 들이 받습니까?”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부딪친 쪽에서 하는 말이 “여보세요,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진지 오래 되었소!”라고 하더랍니다. 맹인은 자기 등불이 꺼져 있는 줄 모르고 들고 다닌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등불은 꺼져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이라는 등불이 꺼져있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내 양심의 등불이 다 꺼져가는 줄 모르고 내 양심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말입니다. 선한 양심만이 빛을 제대로 비추는 등불입니다.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파수견입니다. 감시견입니다. 도둑이 접근했을 때, 낯선 사람이 기웃거릴 때 짖어대는 개처럼 우리가 잘못을 범하려고 하거나 죄를 짓게 될 때 경고해주는 헌신적인 파수견이 양심입니다. 그런데 집을 잘 지키고 감시와 파수 역할을 해야 하는 개가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거나 도둑을 봐도 짖지 않거나 잠이나 자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 이야기를 아십니까? 아주 영리하고 잘 생긴 세퍼트 개가 보신탕집에 팔려가기 위해서 개장수 차에 실렸습니다. 트럭 철망 안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먼저 타고 있던 똥개가 세퍼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영리하고 잘 생긴 세퍼트인데 왜 보신탕집으로 팔려 가냐?” 그랬더니 세퍼트가 하는 말이, “아니, 담 넘어오려고 하는 놈도 도둑이고, 집 안에서 자고 있는 우리 주인도 도둑인데, 언제 짖어야 할지 누구를 짖어야 할지 헛갈려서 안 짖었더니, 주인이 집도 못 지킨다고 팔아버렸어. 이거야, 주인하고 말이 통해야 이 억울함을 풀지...”그러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을 풍자한 재미있는 유머입니다만, 여러분, 실제로 여러분 안에 여러분의 인격과 마음을 지키라고 세워둔 양심이라는 파수견이 짖어야 할 때에 짖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양심이라는 파수견이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르든 말든, 악한 일을 하든 말든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잠들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선한 양심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죄를 지었을 때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사건을 아시지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시험코자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시더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양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사도 베드로가 성령 강림 사건 후에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그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구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설교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그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들의 양심이 반응을 한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양심에 전해 질 때 가책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가책을 느껴야 할 때 느끼는 양심이 건강한 양심입니다.
   2000년 12월 20일, 롯데 백화점 영등포점에는 백화점에서 충동적으로 옷을 훔친 20대 여성에게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옷값 9만 5000원을 전해졌습니다. 명문 S대 대학원생 김모씨(24살)는 1년 전 1999년 12월 초, 이 백화점 3층 숙녀복 매장에서 혼잡한 틈을 타 9만 5000원 상당의 스커트 및 니트 상의를 훔쳤습니다. 이후 김씨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죄책감을 갖게 되었고, 1년 만에 친구를 통해 훔친 옷값을 백화점 측에 전달한 것입니다. 전해준 친구는 “옷을 훔친 친구가 죄책감 때문에 차마 나타나지는 못했지만 백화점에 자신의 신상을 모두 밝히라고 했고, 진정으로 과거 행동을 뉘우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백화점 측은 김씨에게 편지를 보내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라”고 전하고 9만 5000원은 불우이웃돕기에 쓰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되면서 성경 말씀이 그의 양심을 흔들어 깨워 청결한 양심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라는 글을 연재했던 이 규태씨가 20여년 전 미국을 여행했을 때 일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오클라호마의 변두리에서 한국 부인의 방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분은 꼬깃꼬깃한 1백 20불의 미화를 꺼내며 이 돈 가지면 조그마한 교회의 커튼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한국의 어느 교회건 어려운 교회하나 선택해서 커튼 값으로 헌금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품 팔아 어렵게 먹고 산다는 이 중년부인은 늙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유언을 들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 어머니는 일제 때 평양의 한 변두리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했었답니다. 교회 돈으로 그 교회의 커튼 만드는 일을 맡았는데 커튼을 다 만들고 나니 자투리가 좀 남았던 것 같습니다. 문득 어린 딸내미가 앞치마 만들어달라고 졸라대던 일이 떠올라 어머니는 그 자투리로 앞치마를 해 입혔습니다. 입히고 나서부터 교회 돈으로 산 교회의 커튼 천을 유용한 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평생 가슴에 응어리져 있었던 것 같으며 임종에서 닮아빠지도록 꼬깃꼬깃 아껴둔 그 커튼 값을 내놓고야 숨을 거두셨다면서 그 앞치마의 주인공인 중년 부인이 눈물을 닦는 것이었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정도 가지고 무슨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냐고 생각합니까?
  어떤 교회는 주방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아예 자기들이 봉사한 것의 대가로 음식을 더 만들어가지고 나눠서 가지고 갔답니다. 식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아예 먼저 자기들 몫을 따로 봉지 봉지에 싸서 놓았답니다. 그 교회에서 그게 문제가 되어서 시끄러워지자 음식 남은 것은 원가를 계산해서 돈 내고 사가는 것으로 정했다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을 갖고 봉사해야 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판단력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마음의 청결 여부에 따라 양심의 상태가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상태에 따라서 양심의 상태가 나뉘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에서 말하는 더럽혀진 양심, 악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은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양심을 말하는 것일까요? 특별한 사람만이 그런 양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양심의 타락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양심이 교훈을 할 때, 그 교훈을 계속하여 거부하면 양심이 둔해져서 그 역할을 바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잘못한 것, 죄 지은 것을 뉘우치면 청결해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더럽혀진 상태가 됩니다. 양심이 타락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큰 욕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황금흑사심이라는 말이 있지요? 누런 금이 선비의 마음을 검게 만든다는 뜻의 말입니다. 탐욕과 격한 감정과 정욕, 권력욕, 명예욕은 양심을 약화시킵니다. 그렇게 죄가 쌓이고 쌓이면, 욕심이 커지고 커지면 악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이 됩니다.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화인이란 불도장입니다. 뜨거운 인두와 같은 것으로 몸을 지지는 것입니다. 몸에 화인을 맞으면 피부의 감각이 둔하여져서 덮고 찬 것을 잘 분간하지 못하게 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은 죄를 짓고서도 죄를 지은 줄 모릅니다. 죄를 짓고서도 회개할 줄 모릅니다. 이런 마음은 이미 은혜 안에서 벗어나 저주 아래로 진입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하는 말씀은 양심의 창조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나가는 믿음안에서 우러나오는 착한 양심을 찾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양심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참회하는 신앙 양심으로 돌아갈 때만이 우리 영혼은 깨끗해지고 새로워지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병들고 때 묻고 더러워진 것은 고치고 씻어 깨끗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 험하고 유혹 많은 세상길을 가는 동안 넘어지고 실족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가 크든 작든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은혜 안에 있다는 징조입니다. 더럽혀진 양심을 청결한 양심, 선한 양심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6편 2절에 하나님께 자신의 뜻과 양심을 단련하여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서 단련한다는 뜻은 제련소에서 광산에서 캐낸 광물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도 100%의 철이나 금을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연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양심을 더럽히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더럽혀진 양심, 악한 양심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온전한 양심으로 회복시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선한 양심을 갖고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19절에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말씀하기 전에, 18절에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신앙의 싸움, 영적 싸움을 육군의 싸움에 은유하여 자주 말씀했는데, 19절에서는 해군의 싸움으로 바꾸어 표현하였습니다. 바다 위에서 싸우는 해군이 전쟁에서 패하여 파선하게 되듯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지 않으려면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선한 양심은 선한 싸움과 선한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0절에, 믿음과 선한 양심을 거부하여 믿음이 파선된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후메네오라는 사람과 알렉산더라는 사람입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자신들의 불경스러운 삶을 방어하기 위해 고의로 선한 양심을 거부하였습니다. 후메네오는 부활이 지나갔다고 가르치며 거짓 교훈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을 통해 그들을 교회의 공동체에서 추방했다는 뜻과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깨닫도록 징계했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양심에 거스려 죄를 범하므로 믿음이 파선된 사람들입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견고하게 붙들고 그 믿음대로 살면 선한 양심을 갖게 됩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에게 갑옷과 같습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이 우리를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지켜주며, 영적이고 도덕적인 쇠락의 곁길로 이탈하지 않게 보호해 줍니다. 깨끗하고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여러분의 양심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선과 악의 차이를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절 이하에,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면서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2절에,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에 거하십니다. 영적인 부분에 양심이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에 증거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진리를 분별하고 진리가 내 안에서 증거되는 곳이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이 흐려지면 영분별이 안 되는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으시면 양심의 기능이 죽어버려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갖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삶이란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심리적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상황과 사건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양심과 영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선한 양심을 갖고 살기 위해 성령충만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은 양심에 진리가 비취어질 때 오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깨닫게 되어 기쁨으로 그 진리를 행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심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삽니다. 빛의 자녀의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을 갈망하고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우리의 양심은 더욱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게 되고 우리 영혼 또한 기쁘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은혜! 은혜! 용서! 용서! 하니까 양심에 어긋난 일을 행하고서도 또 용서받을 수 있느니까 양심의 경고를 무시하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신앙인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서도 전혀 가책을 못 느끼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이 되어, 신앙의 ‘신’자의 ‘ㅅ’자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신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양심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더럽혀진 양심, 악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우 여러분, 양심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십시오. 양심의 파수견이 잠들지 않게 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이 세상 속에 빛을 비추고 세상에 소망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0년 10월 1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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