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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당 시몬  [3606]
· 설교 일자 : 2010년 12월 19일
· 본문 말씀 : 사도행전 1장 12-14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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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당 시몬 (사도행전 1장 12-14절)
  로마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스라엘을 헬라화하려고 박해하였을 때,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안티오쿠스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카리이’(단검의 사람들)라는 무장 세력을 이루어 로마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로마인과 무슨 거래를 하거나 협정을 맺었다고 생각되는 유대인 동족도 암살하였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이 점점 반 로마적 저항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니까 팔레스틴 문제에 너무도 싫증이 나서 단번에 전면적인 결정을 지으려고 AD 70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공격했습니다. 완전히 포위된 예루살렘 주민들은 점점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로마군과 화해를 하여 보려는 사람들을 무장 세력들은 미칠 듯이 미워하였고,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로마인에 대한 엄청난 증오심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와의 전쟁 기간에 무장 세력을 이루어 로마인들에 대항해 끝까지 항거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유대의 요새인 맛사다로 가서 끝까지 로마에 대항하여 항전하였으며, 맛사다가 로마군에게 함락되려 하자,그들은 이방인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낫다 판단하였습니다. 유대인 율법은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각각 자기 아내들을 껴안고 자식들에게 입을 맞춘 다음 죽인 후에, 남자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으며, 최후에 2인이 남았을 때 한 명이 죽이고 남은 한 명은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들은 다른 건물을 모두 불에 태우면서도 식량창고만은 불태우지 않고 남겼습니다. 그것은 최후까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식량이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답니다. 맛사다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숨은 여자 두 명과 다섯 명의 아이들뿐이었으며, 로마군은 그 무서운 자살 광경에 겁을 먹고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피비린내 나는 마사다의 최후입니다. (마사다 사진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유대 종교 당파 중의 하나인 셀롯당, 즉 열심당입니다. 열심당은 유대 종교 당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강하게 드러난 종교 당파였습니다. 다른 종교 당파에 비해 제일 늦게 생긴 당파입니다. 열혈당이라고 번역하여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혁명당이라도 부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 분파라고 하기 보다는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는 자들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위하여 가지는 열심을 의미합니다.
  열심당이 출연하게 된 배경에는 로마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가 반란을 일으켜 병기고를 점령하여 휘하를 무장시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로마 군대는 이 폭동을 진압하고 유다의 일당을 섬멸하였습니다. 이 일로 AD 6년에 분봉왕 아켈라우스가 그의 자리에서 면직되고 로마인들이 유대 땅을 관리하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에게 호적 등록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는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하나의 조처였습니다. 이때 이것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특히 바리새파를 떠난 바리새인들 중에서 강한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열심당이 생겨나게 된 시초입니다. 그들은 본래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으나, 바리새인들이 정치에 수동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에 반발해 바리새파에서 떠나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이 열심당원들은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왜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했을까요? 왜 그들은 기다리던 메시야를 믿지 못했을까요? 열심당원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로마의 압제와 박해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평화스럽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던 것처럼, 메시야가 새 다윗 왕이 되어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야, 즉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가 되실 것을 기대했고,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나라를 구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어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헤롯당원들이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 받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 즉 로마 황제에게 세금 받치는 것을 반대하는 열심당원들의 주장에 일치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받치지 말라고 해야 체제를 부정하고 혁명을 일으키는 메시야가 될 텐데 그렇게 말씀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회 정치 혁명가가 아닙니다. 혁명이라는 말이 기존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의심없이 혁명적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회 질서를, 사회 가치들과 그 대표 기관들을 힘으로 왈칵 뒤엎어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사용하여 정세를 변화시키려고 했던 혁명가들의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반정부 운동을 벌이지 않으셨습니다. 혁명을 뛰어넘는 ‘철저한 혁명’을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실 변혁을 기다렸습니다. 폭력없이 기다려야 할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변화와 내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의 노선과 반대였기 때문에 열심당원들의 해방전선에는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 장애물이 될 뿐이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열심당의 차이점은 바리새인들은 메시야가 오실 때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것으로 믿고 있는 평화주의자로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인간의 힘과 계획으로 회복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열렬한 애국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택함 받은 백성이고,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땅, 곧 이스라엘의 땅이 더럽혀졌으며,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실추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 정치에 순종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로마 황제를 주(主)로 인정하고 그에게 세금을 납부한 사람은 십계명 가운데 첫 계명을 어긴 자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정치적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자기들의 의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는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로마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에게도 폭력을 겨누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자기들이 역사의 진행을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보다 앞서 갔습니다. 자신들이 판단하고 행동한 뒤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과 똑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폭력적인 행동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여기서 잠시 모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태어났을 때, 바로 왕은 히브리 민족의 수가 점차로 늘어나자 불안을 느끼고  히브리 민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하여 히브리 여인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곧 바로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들은 모세를 보고 죽이지 않고 살렸습니다. 갓난아기 모세는 어머니 품에서 석 달 동안 젖을 먹으며 자라다가 울음소리가 집 밖으로 들릴 즈음,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 가에 띄워 두었습니다. 그 때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발견하여 모세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웠습니다. 그렇게 40년 동안 모세는 바로의 궁궐에서 최고의 수준의 생활을 하고, 최고의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모세가 장성하여 한번은 자기 동족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족들의 비참함이란 듣던 것보다 훨씬 가혹했습니다. 흙벽돌을 빚는 손이 조금만 느리게 움직여도 당장 쇠사슬로 후려쳤고, 벽돌을 나르는 발걸음이 비틀거리면 채찍이 인정사정없이 날아왔습니다. 모세의 가슴속에는 동족을 향한 마음과 청년다운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그 때 어떤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에게 격렬한 분노가 솟구쳤습니다. 모세는 좌우를 살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를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그를 쳐 죽여 모래를 깊이 파서 구덩이에 묻어버렸습니다. 이튿날 다시 동족들에게 갔습니다. 그 때 동족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서 모세가 그 잘못한 사람에게 “왜 동족을 치느냐?”고 말하자, 그가 말하기를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로,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의 살인 사건이 다 들통이 나버렸습니다. 바로의 귀에 까지 이 소식이 알려지자 바로가 모세를 죽이고자 뒤 쫓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모세는 궁중생활 40년 동안, 최고의 학문과 경험, 그리고 군사 리더십, 전쟁 수행 능력을 배우고 검증받았습니다. 그는 궁중 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 바로의 딸 공주의양 아들이 되게 하신 뜻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족들의 현장에 나가 보니 바로 하나님께서 동족을 구해내라고 나를 보내셨구나 하고 강한 사명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방법으로 동족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수완과 능력으로 동족을 구해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동족을 향한 사랑, 동족을 구하고자하는 동족애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 동족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신약시대의 열심당원처럼, 직접 힘을 사용하여 동족을 구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40년간 광야로 가게 해서 모세의 힘을 빼셨습니다. 자기 힘, 자기 능력, 자기 경험, 자기 방법으로 뭔가를 하려는 것을 쏙 빼게 하셨습니다. 마치 김장 배추 절이듯이 힘을 빼게 하셨습니다. 40년이 지난 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김장 담기 딱 좋은 절인 배추가 되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고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목적이나 목표가 옳으면 방법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거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런 정신과 태도는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목적도, 수단도, 방법도,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합니다.
  지난 15일 밤, 범어사 천왕문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누가 방화를 한 것 같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제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화 범인이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끔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범죄를 행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서 부끄럽고 황당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불교에 대한 비판을 할 수는 있지만 절에 가서 불을 지르는 것은 범죄입니다. 거꾸로 생각을 해 보십시오. 불교도가 와서 교회에 불을 질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다른 종교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서 불을 지르는 사람과 같이 행동하는 신앙은 바로 열심당원들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3주간의 설교의 중심 초점은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맞추어야지 하나님을 우리의 뜻에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런 이런 것을 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와서 좀 도와 주셔야겠다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내 목적과 목표를 세워놓고 하나님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이용한다면, 그것은 바른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미신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미신과 우상은 곧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을 이용하고, 신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변화가 없고 신이 나를 도와주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업에 성공할 수 있도록 굿을 해서 귀신을 달래서라도, 부적을 써서 붙이고 다니는 방법으로라도 내 목적을 이루면 된다는 신앙이 미신이요,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앞서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뒤치다꺼리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무슨 요술 램프의 요정처럼 우리가 필요할 때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고, 인간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리고 돌보고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자기 힘과 방법으로 동족을 구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볼 때, 하나님은 모세를 하나님의 일에 채용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니셔티브라고 합니다. 주도권,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거친 표현으로 말하면 칼자루를 하나님께서 쥐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이시라는 것,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쏟고 계시고 만나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탉이 자기가 꼬끼오 하고 울지 않으면 아침 해도 떠오르지 않고, 세상도 깨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여명이 수탉의 눈을 헤집고 수탉을 깨우니까 수탉이 울기도 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실 때 우리도 옳게 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나로 하여금 일할 수 있도록 힘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본명이 시몬인 사람이 두 명이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언급된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신 시몬, 우리가 아는 베드로의 본명이 시몬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부르시는 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시몬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가나나인 시몬이라고-가나나인이란 아람어로 열심당원을 일컫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셀롯인 시몬이라고 부르는 시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셀롯인 시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셀롯인 시몬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열심당 출신이어서 이렇게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와 그가 열심당과 같은 열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서 셀롯이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셀롯인 시몬에 대해서는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이 없어서 우리는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열심당 시몬에 관한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후, 그는 애굽과 아프리카, 영국에까지 가서 전도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페르시야에서 전도할 때, 대적자들이 시몬을 잡아 신전으로 끌고 가서,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하든지, 죽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순교를 택했다고 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처음 따를 때에는 그가 열심당원에 소속되었었든지, 아니면 열심당과 무슨 연관이 있었든지 했지만 예수님을 3년간 따라 다녔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고서 무엇이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인가를 철저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때는 원수를 말살하는 것이 민족을 위한 일이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믿고 행동하려했지만, 용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원수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배운 뒤에는 자신의 신념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에 열심을 냈습니다. 다른 열심당원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했지만, 열심당 셀롯 시몬은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셀롯인 시몬, 열심당 시몬은 미움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마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열심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당 시몬은 예수님께로부터 원수 타도가 아닌 원수 사랑을! 보복이 아닌 무조건 용서를! 폭력 행사가 아닌 인내 자세를! 계급투쟁이 아닌 조화와 협력을! 증오와 복수의 칼이 아닌 화해와 축복을! 사랑으로 시작되는 혁명을 배웠습니다.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났고, 배웠습니다.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시면서 오직 사랑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오신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힘의 논리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열심당은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세주 예수님을 믿지 못했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사랑의 복음만이, 십자가의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진리를 더욱 확실히 붙잡고 예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0년 12월 19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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