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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3315]
· 설교 일자 : 2011년 01월 16일
· 본문 말씀 : 사사기 18장 21-26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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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사사기 18장 21-26절)
  가뜩이나 구제역, 조류AI, 신종플루, 이 세 가지로 인해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축산농가는 거의 실신 상태이고, 이로 인한 불안이 사회 전반에 가득한데,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습니다. 요즘 제일 신나는 사람들은 신문, 방송사일 것 같습니다. 뉴스거리가 많으니까요.
  요사이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우리 사회를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좋게 표현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은 사회입니다. 망측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막장사회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막장이라는 말은 탄광의 갱도의 막다른 현장을 일컫는 말인데, 그 막장이 마치 비리와 불륜과 끔찍한 패륜적인 일이 일어나는 곳처럼 사용되고 있어서, 석탄공사 사장은 막장은 희망이고, 그곳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산업현장이기 때문에, 나쁜 의미로 막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일컫는 말로는 다른 말보다 “개판 사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전국에 있는 ‘개사모’ 즉 ‘개를 사랑하는 모임’에서 항의를 할까요?
  함바 게이트라고 불리우는 건설현장 함바 식당 브로커 유씨가 뿌린 돈이 500억에 달한다고 하고, 관계된 전 경찰청장 등 여기저기서 전국에 관련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새로운 장관이나 나라 중요한 책임자를 임명할 때마다 밝혀지는 그들의 행한 비리, 부정은 땀 흘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서민들의 힘을 쏙 빼 놓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경찰이 마약을 팔고, 검사가 뇌물을 받고, 검사가 사법연수생을 성추행했다고 문제가 제기되었고, 교사가 자기 제자와 성관계를 가졌다, 대학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했다, 중이 어땠다, 목사가 어땠다, 목사가 성추행을 했다, 폭행사건이 있었다... 참담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연일 이런 뉴스가 끊이질 않습니다. 요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사탄이 날 뛰는 죄악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때입니다. 사회 지도층이, 사회의 질서와 가치관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을 무너뜨리면 우리 사회는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개판이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사기의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깨닫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만 읽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뜻을 알려면, 사사기 17, 18장의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는 끝부분 17-21장까지 다섯 장에 가나안 정복 후 이스라엘의 사회가 어떤지를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건이 미가라는 사람의 집안의 타락입니다. 한 개인의 타락이 또 다른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한 집단의 총체적 타락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미가라는 사람이야기가 17장에 시작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 미가가 아니라 그냥 이름만 똑같은 사람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 같은 이가 누구냐?’라는 뜻의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름과 정반대의 삶을 살며 이름값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은 돈 1,100개를 훔쳤습니다. 은 1100개는 무게가 약 12. 7kg이니까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상당히 부자였나 봅니다. 이 엄청난 돈을 도둑맞고도 타격을 입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훔쳐간 줄 모르고 아들이 듣는 자리에서 훔친 사람을 저주했습니다. 그러자 미가는 그 저주가 자신에게 임할까 두려워 은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돈을 훔친 자가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미 선포된 저주를 돌리려고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아들이 저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돌려받은 은 돈 1,100세겔을 여호와께 거룩하게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주가 취소되리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미가가 돈을 훔친 것은 하나님의 십계명중 8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를 우롱한 행위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에게 20퍼센트를 더해 배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막에 가서 제사장을 통해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미가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돌려준 것이 아니라 저주가 임할까 봐 두려워 돌려주었습니다. 또한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 미가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축복을 빌어 주고 돌려받은 돈을 여호와께 바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돈을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 들여 놓지 않고 아들 미가에게 주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아들이 돌려준 1,100세겔을 모두 여호와께 바친다고 해 놓고서는 실제로 900세겔을 빼고 200세겔만 내 놓았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일을 이렇게 마음대로 바꾸는 것을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사기 17장 6절에,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록한 것처럼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미가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말의 뜻은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살았다, 자기 자신의 욕심과 생각과 판단이 기준이 되어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미가는 개인 산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배당을 개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산당을 관리하게 했는데, 그 후에 유다의 베들레헴에서 잠시 이주해 와 미가의 집 근처에 살고 있던 레위 청년이 있었습니다. 미가는 그 청년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온 레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연봉 은 10세겔과 옷 한 벌과 숙식 제공을 할테니 자기 집 개인 제사장으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레위 청년은 쾌히 승낙을 하였습니다.
  미가가 이 레위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은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제사장은 레위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론의 후손만 될 수 있었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제사장직은 전통에 따라 오직 제사장들만이 줄 수 있습니다. 미가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는데도 레위 청년에게 제사장직을 주었습니다. 이것 또한 미가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레위 청년은 돈에 팔려 한 개인 산당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역하게 될 산당이 여호와를 섬기는 곳이 아니라 우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우상숭배의 터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 산당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레위 청년은 돈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자입니다. 돈 때문에 미가의 영적 타락을 묵인 하였습니다. 함께 휩쓸려갔습니다. 미가는 이렇게 일이 이루어진 것에 대해 매우 만족했습니다. 레위 사람을 고용함으로써 자신의 개인 산당이 어느 정도 종교적인 정당성을 얻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7장 13절에,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구색을 맞추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여기까지 17장의 미가와 미가의 주변 사람들의 영적 타락은 18장에서 벌어지는 영적 타락의 배경이 됩니다. 18장에는 단 지파의 만행과 배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의 정찰대가 에브라임 산간지방을 돌아보다가 미가의 집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미가 집에 묵는 동안 미가의 개인 산당에서 사역하던 레위 청년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레위 청년은 자신이 고용된 제사장이라고 밝혔습니다. 미가의 집에서 하루 쉰 단 지파의 정찰대는 길을 떠나 라이스라는 곳에 도착하여 그곳을 정찰 한 것을 동족들에게 돌아가 그 땅이 매우 좋고, 넓은 땅이며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단 지파 사람들 600명은 군사를 일으켜 라이스 정복의 길을 나섰습니다. 군사들이 미가의 집에 도착하자 전에 정탐 왔던 사람들이 주도하여 그 집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 등 우상들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 제사장이 항의하자, 그들은 이 집에서 제사장 하는 것보다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레위 사람은 그 제안을 좋게 받아들여 단 사람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단 사람들과 제사장은 절도죄뿐만 아니라 배신까지 저질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배은망덕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은 기회주의자였던 것입니다.
  단 지파 군대가 미가의 우상들과 제사장을 훔쳐 떠난 뒤 이 일을 뒤늦게 알게 된 미가가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쫓아갔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미가가 그들에게 다다르자 단 지파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쫓아 왔냐는 식으로 반응했습니다. 단 지파 군대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자기 동족의 것을 훔치고 빼앗고 시치미까지 땠습니다. 기가 막힌 미가가 “내가 만든 내 신들을 다 훔쳐 가고도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냐? 이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항의 하듯 물었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에게 조용히 하라고 더 이상 시끄럽게 굴면 당신과 당신 가족까지 다친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미가는 수적으로 약세인 것을 알고서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가는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우상들도 빼앗기고 어른으로 모시면서 동시에 아들처럼 아껴 주었던 제사장에게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미가는 레위 사람을 제사장으로 모셨으니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그가 받은 것은 재산 몰수와 배신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미가 집안의 이야기, 젊은 제사장, 단 지파의 이야기는 당시 온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왜 이런 사건을 기록하였을까요? 이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고, 타락한 사회의 단면이었습니다.  누구도 양심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남에 대한 배려와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배신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주의자들로 가득합니다. 돈 따라 양심을 팔았습니다. 개판이라는 말은 당시 사회의 모습에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미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고 권고하시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미가가 여호와 하나님을 숭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복을 받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도 이런 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복이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였던 것입니다.
  미가는 움켜쥐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통 돈 생각, 물질 생각, 소유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며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런 것을 기복적인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미가의 신앙은 그야말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자기에게서부터 출발한 신앙입니다. 물질의 복을 얻고자 하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렇게 기복적인 신앙은 신앙의 출발과 목적이 잘못된 신앙입니다. 기복적인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복을 받기 위해서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비유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효도를 하는 자식과 부모의 재산에서 사업 자금을 얻어가기 위해서,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서 부모에게 잘 하는 자식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둘 다 비슷한 것 같아도 결정적일 때 드러납니다. 돈이 없어지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는 것은 내 것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은 복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을 사회에 유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잘 사용하라고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소유권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용권과 관리권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생명의 소유권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생명은 여러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주가 여러분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대로 죽고 살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 건강, 재능, 기술, 지혜, 시간, 능력 등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관리하여 인생의 목적을 이루도록 관리권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삶의 관리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숨 쉬고 사는 동안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을 사용하다가 심장 박동이 멈추고, 숨이 멈추어지면 모두 다 반납하고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죽어서 염할 때 입는 베옷 한 벌 수의도 못 가지고 갑니다. 땅 속에서 다 썩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시고 맡겨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했는지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발견해야 하고, 그것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든, 시간이든, 건강이든, 돈이든, 물질이든, 재능이든, 지혜이든, 기술이든, 은사이든지, 그 무엇이든지 잘 사용해야 합니다. 움켜쥔다고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시편 39편 6절에, 재물을 쌓으나 누가 그것을 가져갈지 모르는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6장 19-2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교우 여러분, 죽은 후에 자식들 싸움 붙이지 말고, 죽기 전 아직 정신이 초롱초롱 할 때, 재산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미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움켜쥐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움켜졌습니까?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어머니 돈도 훔쳤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재물을 모으고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겠다고 개인 산당을 세우고, 마음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온갖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처럼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내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내게 남은 것은 허탈뿐이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빌려 주신 것이니 그분께서 도로 가져가신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가시가 많은 세상에서 가시에 찔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업에 손해를 보기도 하고, 기대가 어긋나기도 하고, 친구에게 속기도 합니다. 질병과 죽음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세상 것을 너무 꽉 잡지 말고 갖지 않은 것처럼 느슨하게 잡으십시오.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 떠내려갈 것으로 여기십시오. 언젠가는 없어질 세상 것을 우상으로 삼기 마십시오.”
  여러분, 운동을 해 본 사람은 아실 것입니다. 탁구도, 배드민턴, 테니스, 골프, 야구 등 손에 쥐고 하는 운동의 중요한 공통점은 너무 꽉 쥐고 하면 잘 할 수 없습니다. 꽉 쥐면 쥔 손이 쥐가 나든지, 꽉 쥔 것 때문에 부드럽거나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꽉 쥐면 몸이 긴장되거나 경직되어 공이 제대로 안 맞습니다. 맞아도 원하는 데로 공이 날라 가지 않습니다. 탁구를 예를 든다면, 탁구 라켓을 부드럽게 쥐어야 손목 스냅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커트볼을 칠 때도, 드라이브를 걸 때에도, 스매싱을 할 때에도, 부드럽게 쥐고 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꽉 쥔 손에 힘이 빠져야 하는 데 그것이 잘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자꾸 손에 힘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움켜쥐려고만 하고 손을 펴지 않으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지만 고통스러워집니다. 움켜쥐고만 있으면 만족을 얻고, 인생이 성공할 것 같지만 정반대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움켜쥐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것을 움켜쥐려고, 움켜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더 움켜쥐려고만 하고, 정욕을 채우기 위해 끌어당기니까 부정과 비리와 불륜과 패륜과 폭력과 추악하고 경악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욕망에 끌리는 대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니까 사회는 점점 더 개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사기시대의 타락한 이스라엘 사회가 그랬습니다. 사사기를 읽다보면 매우 암울하고 참담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와 반역,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의 회개, 하나님의 구원, 이스라엘의 범죄와 반역,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의 회개, 하나님의 구원... 이렇게 똑같은 일이 계속 돌아갑니다. 똑같은 일들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답답하고 안타깝고 암울하고 참담함을 느끼게 됩니다. 사사기는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은 삶이 어떻게 타락해가고, 무너져가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상황이 어렵다 못해 혹독하고, 영적으로 몰락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견디어 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리와 불륜과 패륜, 추악함과 실망이 난무하는 우리가 현실만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참으로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들이 다시 새롭게 되고, 다시 밝고 건강한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고, 자기 욕심, 자기 탐욕, 자기 정욕대로 살고, 움켜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불행해집니다. 우리 사회는 무너집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주님 앞에 바르게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1월 16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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