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쓰나미 (디모데후서 3장 1-5절) |
이번 일본 동북부 지역의 대지진 참사는 "우상 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간 데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의 인터뷰 내용과 "일본이 우상과 일왕을 섬긴 죄에 하나님이 '요것 봐라' 하고 흔드는 것"이라고 강남교회 김성광 목사님의 말이 사회적인 공분을 샀습니다. 2004년 서남아시아 쓰나미 때에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님도 비슷한 말을 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우리교회에서만 파장이 있다가 말겠지만, 개신교 지도자로 통하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말들이기에 사회적 파장은 매우 컸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 목사님들의 말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그런 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일 계속되는 일본 대재앙 참사 보도를 보면서, 그 처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진이 15미터 높이의 쓰나미를 일으키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재산과 삶의 터전이 사라졌습니다. 겨우 목숨을 구한 이들도 날씨와 식량과 식수의 부족, 추위와 싸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원자력발전소에 타격을 주어 핵 물질 오염과 피해의 공포 속에 전 세계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과 재난을 겪게 되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하고 강한 의문을 갖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고통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죄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라는 쉽고 단순한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 이하에 보면,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예배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 제물의 피에 섞은 일을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당시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을 당한 일을 전한 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다 지방을 다스린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냉혹한 사람인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오직 경멸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그런 보잘것없는 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는 자기 신세가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고, 진급의 가능성마저 포기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수로를 건설하기 위해 성전 금고의 돈을 강제로 가져가기도 했고, 황제의 상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가져옴으로 유대인들을 모욕하기도 했습니다. 갈릴리가 빌라도의 관할 구역은 아니었지만 일부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함으로써 그에게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그들을 죽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사건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악에 대한 교훈의 소재로 활용하셨습니다.
유대교 신학은 개인의 고난을 개인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지시에 의해 살해당한 이 사람들이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의 고통과 재난은 죄의 형벌이라는 인과응보적 관념이 꽉 찬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빌라도에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 중에 가장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이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가장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남의 사건이 아니다. 너희에게도 연관된 것임을 알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토록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작 궁금해 하는 그들 자신이 아직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고통과 재난의 문제가 “누가 왜 어떻게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지금 어떻게 서 있느냐,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느냐”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의도에 의해 당한 고통과 재난이든지, 우연히 또는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 당하는 고통과 재난이든지,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고통과 재난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상의 질병이나 고통, 재난과 불행을 단순히 죄악에 대한 징벌로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질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 주실 때에, 네 병이 나았다는 말씀대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심으로 질병의 원인이 죄 때문임을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가 저렇게 된 것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밝히는 것보다 날 때부터 맹인이라는 고통 속에 있는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주목해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싸우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고통을 주는 세력, 사망의 세력인 사탄에 대해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해 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단죄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죄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고통이 오게 되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십니까?”라는 고통 속에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겪는 고통과 고난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고, 고통과 재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깊고 오묘하며 쉽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광대하심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고, 아직도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하는 모습은 마치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기가 병풍의 수를 놓는 엄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수를 놓는 뒤쪽, 즉 실밥으로 뒤엉킨 쪽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그 병풍에 수를 다 놓은 후, 아이가 일어서서 병풍의 수를 놓은 앞면을 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그림을 온전히 보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는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세상 끝날에나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고통의 시작은 에덴동산에서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고통은 없었습니다. 슬픔도 없었습니다. 괴로움도 없었습니다. 근심 걱정도, 불안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은 땀을 흘려 수고해야 했고, 이것은 단순한 땀이 아니라 힘든 것, 고통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와는 임신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땀 흘려 수고하였지만 땅이 돌려주는 것이 열매만이 아니라 헛수고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뜻합니다.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삶은 고통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고통의 땅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의 바다 위를 항해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번 일본 지진과 쓰나미가 삶의 현장을 덮치는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다. 우리 인생에 고통이라는 것이 쓰나미처럼 언제 어떤 원인에 의해 닥쳐올지 모르는 일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 누가 고통을 겪을지 모릅니다. 고통의 쓰나미가 언제 누구에게 덮쳐올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고통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속에서 고통의 쓰나미를 겪으면서 우리가 아직 영원한 집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문제가 얽혀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완전한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고통, 마음의 고통, 영혼의 고통이 이 지구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왜 이런 고통의 쓰나미들이 우리들에게 밀려들어오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가장 쉬운 답은 우리는 더 이상 선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의 쓰나미들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집,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고통과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대답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8절에는, 천국에는 다시 저주가 없다고 했습니다. 천국에는 홍수, 태풍, 토네이도, 지진, 쓰나미, 기근도 가뭄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공해나 오염이나 원전 사고로 핵과 같은 유해물질로 인한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애나 정신질환이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나 사망이나 슬픔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들은 아직 영원한 집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향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천국을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린도후서 4장 17,18절에,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겪는 시간은 영원한 나라의 시간에는 잠간 하품하는 정도의 시간일 것입니다. 잠간 눈 깜짝하는 정도의 시간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지금은 힘들지만 영원한 나라에 가면 고통은 사라집니다. 또한 천국에서의 기쁨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의 고통은 잊혀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면 고통은 사라지는데 그런데 아직 우리는 고통의 땅에서 살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언제 고통의 쓰나미가 닥쳐 올지 모르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먼저 인생의 고통 중에 우리가 없앨 수 없는 고통과 없앨 수 있는 고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없앨 수 없는 고통이란 겪어내야만 하는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산모의 해산하는 고통, 희생의 고통, 이별하는 고통, 죽음의 고통들입니다. 어머니도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태어나는 아이도 엄마 뱃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고통을 겪고 태어나야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들이 성장하면 부모는 그 자녀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고통을 겪어야 자녀들이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죽음의 고통을 겪어내야 합니다. 희생의 고통도 그렇습니다. 제가 잘 아는 선배 목사님의 사모님은 첫 아들을 임신했을 때, 맹장염에 걸렸습니다. 수술하려면 마취를 해야 하는 데 마취를 하게 되면 태아에게 치명적인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의사는 태아를 포기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모님은 마취하지 않고 수술하기로 결정을 하고 어금니를 깨물면서 맨살을 수술하도록 하여 뱃속의 아이를 위해 고통을 견디어 냈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뱃속의 아이를 위한 희생의 고통을 겪어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목적을 바로 알고 겪어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고통의 쓰나미를 겪어내야 할 때,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을 밀어내고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고, 곧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인간이 되기를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인생이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고 바르게 알고 있다면, 고통을 느끼는 것을 훨씬 줄일 수 있습니다.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없앨 수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모습들이 나타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고통을 주고받는 고통의 원인이 되고, 고통 하는 때를 만들 것임을 뜻합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말세에 나타날 우리들의 잘못된 모습을 바꾸고 고치고 없애면 그만큼 고통을 줄이고 없앨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여러분, 사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고통보다 인간 서로간의 이기심, 무관심, 악의가 빚어내는 고통이 더 참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불치병으로 죽은 자식에 대한 슬픔을 참아낼 수 있는 부모라고 할지라도 음주운전자에 의한 사고로 자식이 죽는다면, 그리고 그가 전혀 미안해하거나 음주운전이 얼마나 잘못된 행위인지를 깨닫지 않는다면 자식 잃은 슬픔과 고통은 더욱 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자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바꿔 나가기 바랍니다.
서로에게 고통을 덜어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고통과 고난을 어떤 자세로 맞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의 내용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지난주에는 성우 배한성 씨의 인생 이야기와 가수 남진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한성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 가난했기 때문에, 남진씨는 가수로 대뷰해서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자신들이 있게 되었다고 가난과 고난을 감사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대중들 앞에 나와 자신의 과거를 말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오늘의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그 고통과 고난이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승리하고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고난에 대해 괴로워하고 불평하고 그 고통에 짖 눌려 포기한 사람들은 인생을 어둡게 살고 있거나 인생을 포기하고 자살하여 이 세상에서 밝고 승리한 모습으로 찾아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The 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마침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 모든 사람이 무슨 고난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 똑같은 미풍이 불지만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거룩한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긴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고통이라는 쓰나미가 닥칠 때 어떻게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인생에 고통의 쓰나미가 닥쳐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고통의 훈련과 연단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고, 고통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는 고통으로만 여겨서, 고통을 통해서 교훈과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음에 닥쳐오는 고통의 쓰나미를 만날 때, 아무런 대책 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 연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일본 사람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번 일본 대재앙을 겪는 일본 국민들의 시민의식에 대해 세계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지난 2005년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상처 입은 미국인들은 피해 지역에서 발생한 약탈과 방화, 총격전, 성폭행 등 무법과 혼란의 인간의 행위에 또 한 번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국민들은 얼마나 침착한 지, 부서진 슈퍼마켓에 있는 물건을 훔쳐가거나 약탈해가는 강도짓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식수를 배급받은 과정, 급식을 받는 과정에서 새치기를 하거나 약탈하는 행위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수백 명이 차례로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일부 남아 있는 신호등에서 시민들은 파란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건너는 모습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본인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대해 전문가들은 분석하기를, 첫째는 질서 교육과 훈련에 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혼란에 직면했을 때, 덩달아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는 질서를 지키는 게 전체로서는 이득이라는 것을 보육원에서부터 교육을 받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도록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이를테면 줄 서는 게 흐트러지면 결국 자신이 손해라는 점, 질서를 지키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걸 몸으로 배워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지진, 태풍과 같은 재해가 자주 일어나니까 상시적인 재해 대비 교육이 높은 시민의식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태풍과 지진, 화산폭발의 위험에 대비해 재해 대비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쓰나미 경보 시스템도 우리보다 훨씬 빠르고 잘 되어 있고, 대피 요령도 훨씬 잘 알고 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통과 재난에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우리 인생살이에도 그들을 통해서 깨닫고 배워야 할 점이 이 부분입니다. 그들은 고통과 재난을 겪을 때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고통과 재난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고통과 재난에 대한 소화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고서 그것을 소화시키는 소화력이 약한 사람은 위에 염증이 있거나 위 무력증세가 있거나 위장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고통에 대한 소화력을 키워야 합니다. 고통의 쓰나미가 넘어와 고통을 삼켜야 하는데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여 밤낮으로 꺽꺽대고 괴로워만 하고 있다면 자기만 힘들 뿐입니다. 고통을 삼켜야 한다면 소화해 내야 합니다.
일본 소식 뉴스를 보니까, 구십 몇 세 된 할아버지가 옥상 위로 대피했다가 내려오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칠레 쓰나미 때도 견디어냈으니까 다시 일어서자고 말하더군요. 지진과 쓰나미의 고통에 대해 맵집이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 맵집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매를 견디어 내는 힘이나 정도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복싱선수나 격투기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서 이 맵집을 강하게 키웁니다. 그래서 고통을 견디어내는 힘을 기릅니다. 우리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고 한다면, 그래서 어차피 고통의 쓰나미를 만나야만 한다면, 고통에 대한 맵집을 키워서 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고통에 대해서 저항력, 면역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것에는 항체가 생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 그거! 내가 전에 겪어 보았는데 견딜 만 해!” “그 고통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던데!” 신앙안에서 고통에 대한 저항력, 면역력을 키워야 합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에 대해서 지난번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으니 이번에도 힘주실 거야!”
하나님께 고통을 들고 나아가 하나님께 토하며 기도하여 위로를 받고,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겨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코케 하시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이겨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으라고 하신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위로와 능력과 희망을 받아 면역력을 키워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은 고통의 세상에서 고통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때의 징조 중에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일어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렀습니다. 죄 있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겪어야 할 고통을 신앙으로 잘 이겨내야 합니다. 고통이라는 쓰나미를 만나도 하나님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희망을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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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3월 20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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