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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입니까? 의사입니까?  [2683]
· 설교 일자 : 2011년 04월 10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9장 9-13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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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입니까? 의사입니까? (마태복음 9장 9-13절)
  우리나라에는 옆집 의사가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병원에 있는 의사가 아니라 옆집, 이웃,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을 의사가 하는 말처럼 듣고, 그 말을 따라 치료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뭘 그리 용하다는 약이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카더라 처방’이 많습니다. ‘누가 그러는데 무엇 먹고 낫다 카더라’는 말을 말합니다. 지금은 덜 그렇습니다만, 옛날에는 암에 걸리면 여기저기 용하다는 약을 찾아서 헤매다가 병이 더 악화된 사람들도 꽤 많았습니다. 실제로 의사의 진단 없이 ‘누구는 이런 저런 약을 먹고서 낳았다 카더라.’는 말을 따라 몸에 좋다는 것을 이것저것 먹고 더 심각해지는 결과가 벌어진 것입니다. 암세포는 욕심세포이기 때문에 영양가 많은 것을 많이 먹으면 암세포를 더 키우는 일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아플 때, 원하는 것이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여러분이 찾는 것이 약입니까? 의사입니까? 물론 약으로 소화불량과 같은 가벼운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고 큰 병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의사의 처방, 의료전문가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오늘 설교는 마치 대한의사협회에서 나온 사람이 하는 말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실제로 본문 말씀 앞에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중풍병자, 열병에 걸린 사람, 귀신들린 사람들, 아픈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어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마태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9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10절 이하는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선 마태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당시 세리는 동족에게서 세금을 과하게 받아내어 로마에 갖다가 받치고 나머지는 자기 배를 불리며 살았기 때문에 로마의 앞잡이요, 민족적인 죄인으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사람들은 세리는 곧 죄인이고, 상종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라고 정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 방문해서 마태를 비롯해서 그의 친구인 세리들과 다른 많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기의 친구가 세리들이었으니 예수님께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 아마도 다른 세리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세리 친구들과 송별 식사일 수도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관습적인 문화 행동의 기준을 위반하셨습니다. 일반적인 관습에 의하면, 죄인들은 의인의 식탁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의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세리들과 죄인들과 접촉하는 것은 유대인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여겨 함께 식사하는 일이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율법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행동이 몹시 못 마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율법해석과 생활 규칙, 관습, 전통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불만과 조롱이 섞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귀도 밝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냐? 건강한 사람이냐? 병든 사람이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을 영적으로 병든 사람으로 비유하셨고, 바리새인을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정말 건강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영적인 치료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율법으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음식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시지 않고, 스스로 더럽고 죄 많은 사람인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병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찾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은 죄인들의 잘못과 죄를 보시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치료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잘 나서, 우리가 죄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치료가 필요하고,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져야 하고,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가 환자임을 깨닫고 우리를 또 용서해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우리 영혼의 상처와 아픈 곳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긍휼하신 손길을 사모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들어오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죄인이면서도 죄를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병든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병들었지만 치료하려고 하지 않고 함부로 몸을 굴리고, 함부로 건강을 헤치는 짓을 하면서 더욱 병을 키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간혹 교우들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꾸 아파서 부끄러워요.” 자신이 병을 얻게 된 것, 자신이 다치게 된 것이 부끄럽다고 말을 하십니다.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픈 것이나 다치게 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죄를 짓다가 병에 걸렸거나 죄 짓다가 다치게 된 것입니다. 교회 오다가 넘어져 다쳤다면 그게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질병에 걸린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질병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질병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고, 질병 때문에 더 믿음이 강해지고, 질병 때문에 건강할 때는 잘 몰랐던 아픈 사람들의 심정과 괴로움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듬으시고 훈련하시고 정금처럼 나오도록 연단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팀의 대표로 선택되어 훈련받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까?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모든 인생의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훈련시키시고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 하시려고 한다면 그것은 영광이요, 은혜요, 감사할 일입니다.
  

  그 식사 자리에 있는 세리 마태, 즉 예수님께로부터 나를 따르라고 부르심을 받은 마태는 예수님과 교제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흠을 찾고 예수님을 비판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구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마음에 들지 않는 선생으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의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만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단지 자기들보다 율법적으로 못한 선생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인정받기 위해 나온 사람,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존심을 앞세우는 사람,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더 나은 모습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더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 자신의 숨겨진 진실한 내면에 직면하지 않고 위선과 허상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의사를 만날 수 없듯이, 자신의 영혼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 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큰 범죄자가 아니기 때문에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지 점점 오래 돼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세례도 받고, 서리집사 직분도 받고, 권사도 되고, 안수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목사도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점점 흠도 티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분야에 자신이 전문가로써 자신이 점점 부족하고 모자라는 허점을 더 발견하게 된다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깨끗하고 성결하고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먹었던 그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인생을 자신만만하게 살아온 청년이었습니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젊은 사람이 그 정도가 되었으니 나름대로 얼마나 열심히 살았겠습니까? 얼마나 가능성이 있고, 비전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주위로부터 총망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한 내용을 보니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열심히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 관한 계명, 즉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 칭찬을 들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자격을 얻겠습니까?” 그의 물음에는 자신감이 배여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를 다 갖추었는데 한 가지 영생에 들어갈 자격만 갖추면 완벽한 스펙을 갖추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자기만큼 계명을 다 지킨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청년은 당당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지만, 겸손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 청년처럼 당당한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겸허한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평생을 신앙생활했다고 하더라도 교만하면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굉장한 체험을 하고, 중직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교만하면 주님과는 멀어집니다. 주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치료해주시는 의사가 되시지 않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그렇다면 남은 일은 하나뿐이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의 부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년은 인생 퀴즈의 답을 예수님께 원했습니다. 그러나 삶의 진리를 가르쳐 줄 스승을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약만을 원했습니다. 자신에게 영혼의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행위를 인정해주고 그에 대한 상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십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즉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솔직히 깨닫는 것이고,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로 코앞에 구주 예수님께서 계시는 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고 예수님의 답변을 들었지만, 그는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만 하면 나름대로 최상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었나 봅니다. 그는 영생을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그렇습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생이 영원한 생명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고백하신 말씀입니다.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 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약을 주시지 않으셨고,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의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는 목적은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잘 아는 어느 집에 아빠는 퇴근할 때 집에 들어가면서 과자를 사가지고 갔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아빠를 얼마나 반기는지 모르겠더랍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과자를 사가지고 갔더니 아이들이 아빠가 집에 들어가면 아빠~ 하면서 아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손을 먼저 쳐다보더랍니다. 그 다음에도 그렇고 그 다음에도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 아빠는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퇴근할 때 과자를 사갈 때도 있고, 그냥 빈손으로 들어가기도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아이들이 아빠가 퇴근하면 손을 먼저 바라보지 않고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더랍니다. 자녀가 부모가 주는 것으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가족관계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얻으려고 신을 찾고, 신을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미신을 섬기는 것이 그렇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그렇습니다. 잘못된 신앙이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내가 아프니까 약만 얻어서 병이 나으면 그냥 끝나는 것, 아프지 않은 이상은 다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과 교제하며,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풍성케 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살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달을 가리키는 데 달은 쳐다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느냐?”고 꾸짖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본질을 보지 않고 현상만 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알맹이를 채우지 않고 겉껍데기만 붙잡고 좋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본문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의 뜻이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나에게 병이나 고쳐 주시고, 빵 문제나 해결해 주시고, 승진, 건강, 사업 번창이나 주시면 그것이 신앙생활 목적의 전부인 줄 알고 신앙생활은 한다면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수많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셨고, 바람에 뛰노는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고,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 내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도 많았고,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스라엘 전체를 뒤 흔들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그냥 끝난 사람들은 그 뒤에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변화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나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내 삶에 만족한다면 예수님께 기대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내가 부족한 사람이고, 내 몸과 영혼이 치유가 필요한 환자요, 죄인이요, 연약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위대한 의사’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내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의사이십니다. 여러분의 병든 몸의 의사이십니다. 여러분의 구주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여정동안 여러분을 치료해서 건강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약이 아니라 의사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구원자이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삶과 영혼의 의사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온 마음으로 섬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4월 10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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