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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어가라  [3140]
· 설교 일자 : 2011년 05월 29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5장 1~9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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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어가라 (요한복음 5장 1~9절)

  여러분, 요즘 사는 것이 신 납니까? 사는 것이 즐겁습니까? 그렇다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숨기려고 하거나, 나만 사는 게 힘든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합니다. 좋은 일이 있다가도 나쁜 일이 찾아오기도 하고, 즐거운 일이 있다가도 괴로운 일이 찾아옵니다. 신나는 일이 있다가도 기운 빠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는데,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감사할 줄 모르고 행복한 줄 모르고 지나쳐버리고, 나쁜 일이 있을 때에는 나에게만 나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여 더 괴롭고 불행스럽게만 느낀다면, 그런 사람은 삶에 대한 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고치지 않는 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이 생각지 않는 일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습니다. 사면이 다 막혀서 옴짝 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발버둥을 쳐 보지만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지쳐옵니다.  발버둥 칠수록 더욱 지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땅이 껴져라 한 숨을 내쉽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이 자꾸만 의욕을 저하시키고, 열정을 식게 하여 주저앉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 때문에 주저앉게 되기도 합니다. 뭔가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데 자꾸만 사람이 장애물이 됩니다. 사람이 방해를 합니다. 사람이 상처를 줍니다. 사람이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 주저앉아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와 실패가 반복되면서 낙심하여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또는 자기 습관 때문에 주저앉아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하던 자기 습관이 바꾸어지지 않아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스스로 어쩌지 못해 주저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그제 같고 또 그렇게 내일도 어제 같을 것 같아 모든 의욕과 열정과 기대가 사라집니다. 목표를 잃어버려 주저앉게 되고, 꿈이 사라져 주저앉아 버리고, 소망을 잃어버려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야할 힘까지 같이 다 잃어버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와 같은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병을 앓은 지 38년이 되었습니다. 말이 38년이지 3개월 8일도 아니고, 3년 8개월도 아닙니다. 38년입니다. 그의 나이가 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인생의 절반 이상, 아니 그 이상이 드러누워 있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같이 연못가에 누워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날이 궂은 날을 빼고는 거의 연못가에 누워 있다가 저녁이 되어 가족들이 들 것으로 자신을 들으러오면 집에 가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습니다. 너무도 오래된 병인지라 이제는 연못가에 누워있는 것이 너무도 익숙합니다. 매일 같이 연못에 찾아오는 자기와 같은 병자들과도 가까워져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 나오게 된 것은, 내려져 오는 말에 의하면 베데스다 연못이 가끔 연못물이 동할 때가 있는데 그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연못가에 모여든 환자들 모두가 그것을 바라고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중풍병자같이 몸이 아픈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가 누워있는 환자인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중풍을 앓고 자신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이 몸이 마비가 된 환자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38년된 중풍병자는 가장 먼저 연못물이 동하는 것을 보게 되더라도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고, 자기를 들어서 재빠르게 연못물에 넣어줄 사람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더라도 그는 그 경쟁의 현장에 도저히 승산이 없는 게임에 참여하는 선수와도 같습니다. 그저 참가하는데 의의를 갖는다고나 할까요. 합리적으로 계산을 해 보아도 그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슨 유익이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집에 있는 다고해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다른 병자가 연못물에 들어가서 나았다는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가 어렴풋한 기대를 가지고 연못가에 나와 누워있지만, 그곳은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습니다. 연못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연못물에 들어가기 위해 연못가에 누워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있습니다. 언제나 서로 먼저 뛰어들어 병이 낫기를 대기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연못물이 동한다!’고 소리라도 치면 여기저기에서 연못에 뛰어들 태세일 것입니다.
  여러분,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난을 쳐 본 적이 있으십니까? 신호를 기다리다가 신호가 녹색불로 바뀌지 않았는데도 누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 다들 따라 나갑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베데스다 연못에서도 그런 일이...  그러면서 허탕을 치고서 허망한 마음을 추스르며 세월이 또 흘러갑니다. 언제 동할지 모를 연못물을 기다리며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1년, 2년, 10년, 20년, 38년이 지나갑니다. 과연 그는 40년, 50년 세월이 흐른다고 그의 병이 나을 수 있을까요? 그는 연못가에 누워있지만 낙심, 실의, 포기, 체념, 의욕상실의 상태로 누워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가 있는 사람, 주저 앉아있는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이 없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을 것을 권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해 사라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후사를 두려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을 받아들여 하갈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이 이삭입니다. 여종 하갈이 아브라함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후에 목에 힘이 좀 들어갔겠지요. 그런데 여주인 사라의 몸에서 아들 이삭이 태어났으니 하갈의 마음이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이삭이 어린 시절 하갈이 이삭을 놀리고 있는 모습을 사라가 보았습니다. 사라는 발끈하여 아브라함에게 당장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몹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얼마의 음식과 물 한 통을 하갈의 등에 지워 주고, 아이와 함께 떠나보냈습니다. 하갈은 정처없이 길을 떠다 헤매다가 브엘세바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물이 다 떨어지고 지칠 데로 지쳤습니다.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을 덤불 아래 놓아두고 50미터쯤 떨어져서 자신의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하니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저쪽에서는 아들 이스마엘이 울고, 이쪽에서는 엄마 하갈이 아들을 쳐다보며 “이렇게 죽는구나... 언제나 아들 낳아달라고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결국 나와 아들을 내치는 구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아, 어찌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고, 아이가 곤경에 처한 것도 알고 계신다. 일어나거라. 가서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굳게 붙잡아 주거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그 때 하갈의 눈을 열어 주셔서, 하갈이 주위를 둘러보니 샘이 보였습니다. 불쌍한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주전 9세기 때,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겨루어 이긴 후에 왕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엘리야는 탈진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순식간에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광야로 하룻길쯤 도망쳐 한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 달라고 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에게 육신의 회복과 마음의 회복과 영을 회복시키셔서 다시금 선지자로써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가슴속에는 씻어지지 않는 죄책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무덤을 목격하고서도 다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그 때 밤새도록 베드로는 허탕을 쳤습니다. 새벽녘 날이 밝아올 때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밤새 예수님께서 그곳에 서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떡과 구운 생선을 준비하여 아침을 먹이시며,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엘리야 같은 선지자만 찾아오실까요? 아닙니다. 하갈과 같은 사라의 몸종에게도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찾아가실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는 선지자도 아니고 제자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을 청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이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드러누워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 두니 못 들어 오시네”(535장)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지만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니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 환자에게 당연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환자 가운데 낫고자 하지 않는 환자가 있을까요? 당연히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면 낫고 싶다고 대답하겠지요.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낫고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가 그곳에 드러누워 있으면서 잃어버린 낫고자 하는 소망, 사그러진 건강해지고 싶은 기대, 메말라버린 치유의 간절함을 일깨우시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간절한 소망, 간절한 기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기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저앉아 있느라고 내려놓았던 것들, 잃어버렸던 것들, 우리 안에 드러누워 있는 것들,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주저앉아 있는 소원, 소망, 기대, 희망, 간절한 바램을 일깨워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과 기대와 간절한 바램을 잠들지 않게 합니다. 자장가는 잠들게 하지만 기상나팔은 잠자던 군인들을 기상시킵니다. 깊게 잠든 우리를 기상나팔이나 시계의 자명종 소리가 깨우듯이, 기도는 잠든 우리를 깨웁니다. 주저앉은 우리를 일어서게 합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한 농장에 강렬한 허리케인이 불어 닥쳤습니다. 허리케인은 집과 농작물 그리고 가축들까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농부는 절망하여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벼슬이 찢기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탉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습니다. 수탉은 날개를 퍼덕이며 무너지지 않은 담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목청껏 소리를 쳤습니다. “꼬끼오!” 농부는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 다시 일어나자. 나도 하늘을 향해 회쳐 우는 저 수탉처럼 다시 일어나자.’ 잿더미 속에서 수탉이 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울부짖도록 하는 영적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 영적 본성이란 기도입니다. 어린 자녀가 배가 고프든지, 기저귀가 불편하든지, 불안을 느끼든지, 뭔가를 원할 때, 울음으로 엄마를 찾고 호소하는 것처럼, 우리가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깜짝 놀랄 때, “엄마야!”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본성입니다. 우리가 이 본성을 찾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회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광야 길을 걷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겠습니까? 목마름입니다. 광야에는 먹는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흘 길을 걸으면서 물을 얻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마를 데로 목이 말랐습니다. 그 때 한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쓴물이었습니다. 도무지 써서 마실 수가 없는 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의 쓴물을 만나 주저앉았습니다.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모세를 원망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나무를 물에 던지지 쓴 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는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인생의 쓴물을 만났을 때, 황당하고 암담하고 어쩔 줄 몰라 주저앉고 싶을 때, 주저앉아 원망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쓴물이 단물로 바꿔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희망을 갖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주저앉게 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울며 기도하십시오. 토하듯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다음 주 전도를 위해서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기도하십시오. 사랑으로 초청하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 8,9절에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그는 일어나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연못 동하는 물이 그를 낫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저앉아 한 숨만 쉬고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을 듣고 순종할 때, 우리는 38년된 중풍병자가 일어가 걸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일어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나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생명력이 있어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능력을 행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찬송하십시오. 우리가 찬양을 부를 때에 새 힘을 얻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 영혼에 영적 에너지를 불어넣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은 마치 자동차가 주유소에 가서 주유구를 열면 기름이 들어가는 것처럼, 찬송을 부를 때 우리 영혼에 영적인 기름이 들어갑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행해집니다. 찬양은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순식간에 일으켜 세웁니다.
교우 여러분, 찬양하십시오. “나의 등 뒤에서” “①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후렴)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 ②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 질 때-면  다가와 손내미시네 (후렴) //  ③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 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후렴) ”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에게, 지쳐있고 드러누워 기대와 소망의 불꽃이 다 꺼져가고 있는 그에게 찾아와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걸으라! 바로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한 명의 아버지와 네 명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배다른 형제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배다른 형제들을 그를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형제들이 그를 잡아서 돈 몇푼 받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는 외국 땅에 팔려가 남의 집에서 노예로 살면서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게 충성되게 일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열심히 주인집을 위해 일했는데 돌아온 것은 누명이었고, 감옥행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수년동안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이 이루어질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애굽에 팔려와 13년 동안 계속 되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답답하고 좌절할 만한 일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억울하고 기구한 운명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꼬이기만 하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이 절망적인 운명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한번 노예이면 일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할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왕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왕의 특사가 아니면 감옥에서 그냥 살다가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요셉은 이런 꼬이고 억울하고 답답한 인생을 살며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 우리가 그런 인생을 살게 되면 그냥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감옥 속에서 매일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몇 번씩이나 복수하는 꿈을 꾸면서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로 몸도 마음도 상할 대로 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쉽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쉽게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아무리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도,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일지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 둔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믿고 또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주저앉아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사람을 향한 증오심으로 스스로 마음이 병들어가게 하고, 자기 자신을 헤칠 시간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힘을 냈습니다. 주저앉을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찬양)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요셉이 그랬습니다.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시기와 공격을 피해 1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한 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1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도망자의 신세로 살아간다고 해보십시오. 지칠 대로 지치고, 시편의 다윗의 시를 보면 탄식시가 많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탄식하고 낙심하고 주저앉을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때 그 자리를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로 만들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저앉아 땅만 쳐다보고 한숨 쉬느라 마른 먼지 풀풀 날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주님 손 잡고 일어섰습니다.
(찬양)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교우 여러분, 금년 목회 표어 주제 성경 말씀 예레미야 29장 12,13절 말씀에,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약속하십니다. 전반전 경기 마치고 하프타임 후 후반전을 새롭게 시작하듯이 힘주시는 주님 손 붙잡고 새롭게 일어서서 다시 시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5월 29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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