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혜사 성령 (요한복음 14장 25-27절) |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시면 됩니다. 배부르게 살면서 미움 받고 마음 불편하게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배고프지만 사랑 받고 마음 평안하게 살고 싶습니까? 계속 배가 고플 텐데도 배고프지만 사랑 받고 마음 평안하게 살고 싶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면 다음 질문입니다. 돈 많고 성질 더럽고 툭하면 바람피우는 사람하고 사는 것과 돈 없지만 인격적인 사람하고 사는 것 중 둘 중의 어떤 사람하고 사는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물론 한 번 결혼하면 이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순간에도 잔머리를 굴리면 안 됩니다. 돈 많고 성질 더럽고 툭하면 바람피우는 사람하고 일단 결혼해서 살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딱 잡아 가지고, 위자료를 엄청 많이 받고 이혼해서 새 출발 해야지... 그렇게는 안 되는 조건입니다. 그냥 살아야 합니다.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잠언 17장 1절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말씀인가요? 그 뜻을 아십니까?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10분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10분 동안 세 가지 중의 한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스태미너를 높이는 음식을 먹는 것, 여러분의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는 것,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을 하고 싶으십니까? 스태미너 음식을 먹고 싶기는 한 데, 그것 먹겠다고 하면 눈치 보일 것 같으니까, 성경책 읽겠다고 대답하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다른 교회 설교를 하러 갔다가 예배를 마치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답니다. 식당에 들어갔더니 그 식당에 이런 글귀가 걸려 있더랍니다. “월요일은 원래 웃고, 화요일은 화사하게 웃고, 수요일은 수수하게 웃고, 목요일은 목청껏 웃고, 금요일은 금방 웃고 또 웃고, 토요일은 토실토실 웃고, 일요일에는 일상적으로 웃읍시다.” 그 글귀가 좋아서 그 목사님이 수첩에다 적고 있는데, 그 교회 장로님 한 분이 그 글의 원전이 따로 있다고 하면서 알려 주더랍니다. “월요일은 원래 술 마시는 날, 화요일을 화끈하게 마시는 날, 수요일은 수시로 마시는 날, 목요일은 목숨 걸고 마시는 날, 금요일은 금방 마시고 또 마시는 날, 토요일은 토하도록 마시는 날, 일요일은 일찌감치 낮술 마시는 날”이랍니다. 여러분, 누구나 하루 24시간 86,400초를 삽니다. 그러나 그 하루를 어떤 방식으로 사느냐는 각기에 달렸습니다. 하루하루를 웃으면서 살기 원하는 사람이 있고, 하루하루를 술 마시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을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상태의 사람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이 거듭나서 영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지난주의 설교 중에, 인간은 몸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몸과 혼과 영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인간이라는 한 인격체가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건강한 인간, 온전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란 영이 혼을 다스리고, 혼이 몸을 다스리는 존재이며 그렇게 될 때 건강한 인간,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이런 인간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거꾸로 몸이 혼을 지배하고 몸에 지배당하는 혼이 영을 지배하는 존재가 될 때에는 건강하고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인간을 육적인 인간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육적인 사람입니까? 영적인 사람입니까?
오늘은 교회 절기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오순절이라는 절기에,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도들 백이십 여명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들 위에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보내 주시겠다던 약속대로 강림하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성령님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님의 강림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갈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갈망하며 기다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은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 속에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세상을 떠나시고 대신 성령님을 보내셨을까요?
요한복음 16장 7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낫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 분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이 누구신지와 성령님이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성령님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란 성령을 지칭하는 어휘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어휘입니다. 보혜사에 사용된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도록 곁에 부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 교사, 친구, 코치, 조력자를 뜻합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믿는 자들에게 변호사, 위로자, 상담자, 교사, 친구, 코치, 조력자가 되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우리들을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25, 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장 26절에는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는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얻도록 도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여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목적대로 살고 있습니까?
2006년, 유명한 개그맨 김형곤씨는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30kg 가까이 다이어트하고 그 날도 운동하고 난 직후에 갑작스럽게 49세의 나이로 돌연사 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날,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세상에 웃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인간이 동물에 비해 우월한 이유도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을 벌려고 애쓰는 것도 결국 웃고 살기 위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돈 버는 데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웃지 못하고 산다."
김 형곤 씨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도 웃자고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 아닙니까? 울자고 그렇게 열심히 삽니까? 아니면 웃지도 울지도 않고 멍하니 있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입니까? 열심히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웃으면서 즐겁게 살기 위해서 열심히 땀 흘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웃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목표가 바뀐 것이 아니라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돈 벌고 열심히 일하느라 웃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 웃을 날이 있다고 기대합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욕심을 따라 사느라 웃을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 배부르지 않아서,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욕심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에 욕심, 탐욕, 정욕, 이기심과 같은 것이 절제가 되지 않아 행복을 못 느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욕심을 줄이면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자족할 줄 모르니 감사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니 당연히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살아가게 될까요?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의 모든 사람은 육의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으로 성령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산다 해도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거듭나지 않으면 육에 속한 사람으로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체 중심의 삶을 삽니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살아갑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즐길까? 이런 질문이 인생 문제의 전부입니다. 육체가 원하는 욕망대로 살아갑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니까 이 세상 풍습대로 살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고, 음행, 더러운 것, 미움, 시기, 분쟁, 끼리끼리 모여 당 짓는 것, 우상숭배, 방탕한 일을 행하는 삶을 삽니다.
마귀는 육에 속한 사람의 마음속에 온갖 탐심과 우상숭배와 정욕을 심어줍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사람은 마귀가 이끄는 대로 탐욕과 우상숭배와 정욕의 노예가 되어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육에 속한 사람은 금세와 내세에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 5절 -8절에,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체를 좇아가는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일을 중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이해하게 하고, 믿어지게 하고,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무엇이 더 영원한 것인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지 않았는지, 진짜와 거짓이 뒤바뀌지 않았는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뒤바뀌지 않았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 잡아 주십니다. 무디어진 양심을 다시 예민하게 회복시켜 주시고, 죽어가던 영을 소생시켜 우리의 마음과 몸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본문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본문 27절 말씀에서 주님이 주시겠다는 평안은 마음의 평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은 세상도 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도 잠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육신의 편안과 마음의 평안과 같지 않은 영혼의 평안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영이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죽음의 문제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여 존재론적인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혼의 평안을 얻게 하십니다. 이 영혼의 평안을 얻게 될 때, 마음의 평안도 누리게 됩니다. 영혼의 평안을 누리게 될 때, 육신도 영혼의 평안으로 다스려집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설교 말씀을 들어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설교의 내용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면 여러분 안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빛을 비추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영적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운동을 배울 때 자기 혼자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과 코치가 있어서 배우는 것과 다릅니다. 여러분, 수영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동네에서 친구들과 여름이 되면 냇가에 가서 물장구를 치면서 수영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물에는 뜨기는 합니다. 소위 개헤엄을 칠 줄 압니다. 그리고 자유형으로 수영도 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수영을 하지 못합니다. 자유형을 정식으로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자유형이기 때문에 수영을 하면 힘이 듭니다. 부드럽게 수영을 하지 못하고 힘이 들게 합니다. 그런데 박 태환 선수와 같은 수영을 잘 하는 선수들도 코치를 둡니다. 코치가 수영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장점을 살려주고, 단점을 고쳐주고, 보완해야 할 것을 보완하도록 코치해 주고, 훈련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자기 식으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코치가 있다면, 우리를 상담해줄 분이 있다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우리를 도와주기도 하고, 우리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우리를 변호해 주기도 하는 분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혜사 성령님이 그런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도와주십니다.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오셔서 여러분의 지혜와 생각과 영혼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향해 걸어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세계 최대 사막인 사하라 사막을 횡단했던 스티브 도나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인생을 산이 아니라 사막으로 볼 것을 제시했습니다. “인생은 산이다”가 아니라 “인생은 사막이다.”라는 말입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산꼭대기 정상이라는 목표가 분명합니다. 목표가 분명하니까 소요되는 시간, 정상에 오르기 위한 방법도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이와 전혀 다르다고 말합니다. 사막은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 하답니다. 사막에서는 지도가 없습니다. 설사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출발하더라도 사막에 모래 바람이 불어 닥치면 순식간에 모든 지형이 바뀌고 맙니다. 그래서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신기루를 쫓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인생은 사막을 횡단하는 것처럼,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방향을 잡고, 목표를 세워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나기도 하고,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어 목표가 사라지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하기 때문에, “인생은 사막이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산을 오를 때는 등산화를 신습니다. 등산화를 신고 힘차게 발을 디디어 오릅니다. 그렇지만 사막을 지날 때는 등산화를 신고 힘차게 걷게 되면, 모래가 끝없이 쌓인 뜨거운 사막을 걸으며 발에 물집만 생길 뿐 아니라, 쉽게 지쳐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막을 걸을 때에는 발걸음에 힘을 빼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막의 지형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지도가 아닌 정확한 방향을 가르쳐 주는 나침반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표를 세우고, 그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 열심히 걷습니다. 힘차게 걷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목표만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목표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내 힘만으로 도무지 지쳐서 걸을 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가야하는 길이 일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사막을 지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침반이 필요하듯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우리가 분별할 수 없는 것,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우리 인생에 분명히 있음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준비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발에 힘을 빼야 합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만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오신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걸어 가야합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충만히 거하시면서 여러분을 인도하시도록 믿고 맡기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목이 마르지 않도록 늘 물을 마시듯이, 배가 고프지 않도록, 몸이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공급되도록 때가 되면 음식을 먹듯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과 행복한 마음이 늘 채워져야 하듯이,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충만히 거하시도록 사모하십시오. 갈망하십시오. 성령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나를 깨우쳐 주십시오. 나를 새롭게 해 주십시오.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날 고쳐 주십시오.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아닌 성령님의 뜻대로 나를 사용하여 주십시오. 나를 맡깁니다.”
여러분, ‘성령 하나님이 나에게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그런 정도로 성령 하나님을 생각하면 성령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실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하지 않고는 여러분에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철저히 깨닫고, 자신의 모습, 자신의 지혜, 자신의 능력, 자신의 실존으로는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성품과 인격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사람 같지만 내 안의 자아가 얼마나 죄로 오염되어 형편없는 생각과 허물투성인지를 인정하며 겸손하게 성령님을 절실히 갈망하고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한다면 생선 대신 뱀을 주고, 알을 달라고 하면 알 대신 전갈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구하면 주십니다. 갈망하면 주십니다.
여러분, 전도체와 저항체라는 말을 아십니까? 전도체란 전기가 흐를 수 있는 물질을 말합니다. 철, 구리, 물과 같은 물질은 전기가 흐르면 전기를 받아들여 전기가 지나가도록 합니다. 저항체란 전기가 흐르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물질입니다. 전기가 흐르려고 해도 전기를 흐르도록 받아들이지 않고 흐를 수 없는 물질을 말합니다. 종이, 헝겊, 고무 등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전기 공사를 할 때, 장갑을 끼는 이유는 장갑이 전기가 손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전도체에 전기가 흐르면 그 전기가 빛이 될 수도 있고, 에너지도 될 수도 있고, 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도체는 전기를 받아들여 흐르도록 함으로 놀라운 변화와 결과를 이룹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기를 흐르게 하는 전도체처럼 성령님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자세가 전도체가 전기에 대한 자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삶에 성령님의 힘이 흐르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성령의 힘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도록 나를 내어 드릴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충만히 거하시면서 은혜와 능력을 행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은 전도체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전도체였습니다. 성령의 전도체였습니다. 그들이 뛰어난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믿고 맡겼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순례자인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선물로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충만히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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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6월 12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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