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말씀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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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  [2961]
· 설교 일자 : 2011년 07월 03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16장 13-20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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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시아 (마태복음 16장 13-20절)
  여러분에게 있어서 교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교회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면 어떤 그림을 그릴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뾰족한 첨탑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예배당 건물을 그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배당 안에 강대상과 피아노가 있고 설교자가 설교하는 모습을 교회의 이미지로 그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영혼이 쉬고 가는 곳일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목욕탕처럼 죄를 씻고 가는 곳으로,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기름을 넣고 가는 주유소처럼 삶의 에너지를 얻어 가는 곳으로,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위로 받고 도움을 받아 가는 곳으로,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지루하고 졸리는 곳으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부인 때문에 할 수 없이 예배당에 나오기는 하지만 밀린 잠을 자러 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동영상 하나를 보겠습니다. (미스터 빈 교회 가다 동영상)
  현대교회는 4가지 유형의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공동묘지 같은 교회, 박물관 같은 교회, 극장 같은 교회, 잔칫집 같은 교회입니다. 공동묘지 같은 교회는 믿음의 활동이 거의 다 죽어서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이 없는 교회를 말합니다. 마치 돌아가신 조상을 억지로 찾아뵙는 의무감 때문에 묘지에 가듯 다니는 교회를 일컫습니다. 박물관 같은 교회는 공동묘지 같은 교회보다는 조금 나으나 여전히 부족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옵니다. 그리고 골동품을 보며 기뻐합니다. 오래된 책을 보며 기뻐하고, 옛 사진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때 참 좋았다.’  ‘그때 우리 교회가 이런 모습이 있었다.’고 그리워하며 옛 추억을 먹고 삽니다. 극장 같은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지만 한 곳만 바라봅니다. 그곳에 있는 스타나 노래 잘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박수치고, 나갈 때에는 돈 한 푼씩 놓고 나갑니다. 그런 교회는 몇 사람의 주인공과 감독이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경꾼으로 앉아서 손뼉치고 돌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잔칫집 같은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으니 함께 하자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합니다. 그들이 몰려와서 그 잔칫집을 가득 채우며 기뻐 음식을 먹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은 그들을 기쁨으로 섬깁니다. 주인이신 예수님도 흐뭇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잔칫집 같은 교회는 살아있고 기쁨이 있고 움직이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교회는 어떤 유형에 속할 것 같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기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부끄러운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끄러운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교회가 우리 사회에 기대에 못 미치고 희망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한국교회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본질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해서 위기를 겪는 것이라면 사람다운 모습으로 돌아가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운동선수가 경기를 잘 못해서 선수로써 위기를 맞고 있다면 운동 연습을 기초부터 다시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떤 회사가 제품이 잘못 되어서 고객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위기를 맞고 있다면 제품을 제대로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서 위기를 만났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회다운 모습으로 돌아가야 해결됩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교회의 존재 목적으로 돌아가고 교회의 사명을 다시 하나씩 하나씩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 말씀 중에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고, 교회의 본질과 목적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창립 58주년을 맞는 우리 교회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 보면,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회,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어느 누구의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주인인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신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성도의 교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교회의 감독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세상의 법칙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칙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워지고, 운영되고 일합니다. 세상의 기관들, 기업이나 단체들은 돈으로 세워지고, 사람의 노력으로 세워지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8절 상반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복음을 베드로가 전하여 사람들이 믿게 되고 모이게 되는 교회를 말합니다. 여하튼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사건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모임이지만, 인간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으로 행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또한 교회는 민주적인 방법을 채택하기는 하지만 항상 민주적이지는 않습니다. 민주적 방법을 채택하는 것도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다수결 원칙으로 이루어져야 옳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으로 민주적 방법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인 삶, 신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 의한 다수결이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민주적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다수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다수결에 따라 무엇을 선택 결정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처럼, 다수결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도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이지 않거나, 복음적이지 않거나,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의 민주적 방법이란 악을 행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존재할 때 교회는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격과 핍박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말씀 속에는 음부의 권세의 공격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해하려는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과 핍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석위에 세운 교회는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우셨기 때문에 아무리 흔들어도, 모든 원수 에워싸도 건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시온 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 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 주가 친히 세웠다 / 반석위에 세운 교회 / 흔들자가 누구랴 / 모든 원수 에워싸도 / 아무 근심 없도다.” 찬송가 210장입니다. 교회는 주가 친히 세우셨습니다. 주께서 반석이 되어 주십니다. 악의 세력을 이겨냅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역사상 수없이 많은 세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려 시도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수없이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음부의 권세는 지속적으로 공격을 할 것입니다. 더욱 강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때로는 유혹으로, 때로는 긴장을 풀게 하여, 때로는 편안으로 때로는 우리의 내면의 메마름과 나태함으로 우리를 무너뜨려 교회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 주님이 세우신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흔들렸다가도 이내 곧 반석 위에 굳게 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말씀 위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겨낼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교회에게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엄청난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권세를 사용하여 악의 세력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개념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에 사용된 ‘교회’라는 뜻의 단어가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단어는 ‘에크’ ‘밖으로’와 ‘클레오’ ‘~으로부터 불러내다’의 합성어로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 ‘카할’을 헬라어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구약성서에서 교회라는 낱말에 해당하는 용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카할’과 ‘에드하’입니다. ‘카할’은 ‘부름 받은 사람들’ ‘집회’ ‘회중총회’ ‘하나님의 백성’ 등으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드하’는 회막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공동체를 나타내며, 주로 예배장소인 회당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두 단어를 종합하면 구약의 교회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정된 장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신 목적을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모임을 의미합니다. 신약성서에서도 교회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데에는 무슨 뜻이 있지 않느냐? 무슨 목적이 있으니까 부르신 것이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부르심의 목적이 곧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 부르심의 목적이 곧 교회를 이루고 있는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우리교회의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목적이란 교회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교인 모두가 교회의 존재 목적에 따라 모이고 그 목적을 따라 움직이며 살아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하는 목적을 이룰 때에만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왜 양정교회라는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할까요? 양정동 350-8번지에 예배당 건물과 교육관 건물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을까요?  양정교회 지체인 여러분 모두가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구원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일꾼으로 삼으셨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기 원하셨다면 왜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겠습니까? 크게 두 가지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 사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미와 비전의 틀 안에서 부르심의 목적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기대하시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교회에 주신 존재 목적과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 교육, 선교, 봉사, 교제가 교회의 본질이고 사명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봉사이며, 세상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한스 큉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자신이 다시 세상에 파견되었음을 자각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구원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에게 자신의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판의 소리를 듣게 되고, 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지고,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등을 돌리게 된데 에는, 교회가 즉 우리 교인 각자 각자가 삶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잘못 받아들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신앙,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세상적으로 출세하는 것만이 신앙의 목적을 삼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신앙이 변질되고, 하나님을 나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지만, 나만을 위한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착각한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세상 속에서 구별하여 사람을 부르시고 동참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이 놀라운, 이 거룩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축하드립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여러분이 이 거룩한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클레시아라는 교회 개념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 여러분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합니까? 주일 아침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나오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됩니까? 요즘은 예배시간에 스크린에 성경 말씀, 찬송 가사를 다 띄워주니까 성경찬송을 들고 오지 않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그것조차로도 구별이 안 됩니다. 자동차 뒤에다 물고기 붙이고 다니는 것이 구별되는 것입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만 구별되는 것, 껍데기만 구별되는 것은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구별되어 다른 존재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과 빛은 분명이 구별됩니다. 이것이 어둠인지 빛인지 구별이 안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치 바다 속에서 살지만 그 몸의 살은 바닷물로 저려져 짜지 않은 물고기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거룩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룩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코데쉬’인데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합니다.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원래의 거룩은 하나님께만 있는 성품으로 모든 피조물과는 완전히 다르게 구별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구별됨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구별되었다는 뜻은 거룩하다는 뜻과 연결된 말입니다. 거룩함으로 속됨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 근래에 들은 말입니다. 예수 믿는 안수 집사가 중소기업 사장인데, 예수 믿는 청년은 직원으로 안 뽑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즉슨, 예수 믿는 청년을 뽑아 놓으면 직장에서 일을 열심히 안 하고, 성경 보고, 교회 일에 신경을 쓰면서 직장에서도 자기 교회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독실한 그리스도인 사장이라고 해도 그런 직장 생활을 하는 직원이 싫지요. 월급은 회사 사장에게 받으면서 직장을 위해 일해야 할 시간에 자기 교회 일을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다는 것은 평일 낮 시간에도 직장에서 일 안하고 성경보고 교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하고 월급 받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서울 청량리동 홍릉교회 김영수 집사는 다세대 주택 주인입니다. 10년 넘게 전세금을 올린 적이 없지만 최근 ‘어쩔 수 없이’ 200만원을 올렸답니다. 이유는 주위에서 다 전세금을 올리는 데 그래도 올려야 하지 않느냐는 세입자들의 항의를 못 견뎌서입니다. 집주인이라면 너도나도 전세금을 올리려는 요즘 분위기와는 대조적입니다. 같은 교회에서 20년 넘게 김 집사를 지켜본 이원근 안수집사는 ‘은행을 다니다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고 있는 김 집사는 평소 청렴하고 정직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고 말합니다. 부천에 모 교회의 안수집사도 전세 값이 너무 오르니까 돈을 준비할 수 없었던 세입자에게 선뜻 깎아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소개할까요? 집을 세 놓은 분들에게 모두 전세 값을 깎아주라는 뜻으로만 들으시면 안 됩니다. 전세 값이 오르는 시세라서 전세 값을 올린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는 교인이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신앙인으로써 구별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세금을 그냥 받든 깎아주든, 전세금을 올리든 안올리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무엇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고, 무엇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인가를 생각하여 선택하여 살아갈 때에 세상과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괜찮네!” “그리스도인들이 뭔가 다르네!” “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놀라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희망이 있어! 나도 예수 믿으면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교회는 주님께서 부탁하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써 세상 속에서 구별되게 살아간 후,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양정교회 교인으로써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 하시는 교인, 하나님께서 충성되다고 하는 교인,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07월 03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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