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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의 이름과 신앙  [2746]
· 설교 일자 : 2011년 08월 21일
· 본문 말씀 : 마가복음 2장 1-1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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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의 이름과 신앙 (마가복음 2장 1-12절)
  영국 노퍽 다운햄마켓에 사는 마이클 캐럴이라는 28살 청년은 2002년 970만 파운드(약 170억원)의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런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지요? 여러분에게 170억, 아니 17억이 굴러들어온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당시 19살이었던 그는 복권에 당첨되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환경미화원으로 성실히 살았던 그는 순식간에 엄청난 재력을 거머쥐자, 술, 매춘, 섹스 파티, 자동차 구입, 마약 구입 등에 돈을 펑펑 쓰는 방탕한 생활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방탕한 생활은 그의 날렵했던 몸매를 120kg의 거구로 만들었고, 2004년에는 코카인 소지와 음주운전으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 많던 돈은 6년 만에 어느새 사라지고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가 됐습니다.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이어 최근 여자 친구까지 떠나는 아픔을 겪은 캐럴은 지난 13일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맸으나 다행히 친구에게 발견돼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캐럴이 자살을 시도한 것은 이번이 2번째입니다. 그는 지금 돈이 바닥나자 집을 팔고 파트타임 페인트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돈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에 대한 그의 삶의 자세, 삶의 태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세입니다.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어떤 자세로 자기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반응하느냐에 따라, 어떤 태도로 그 사실에 대처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결과가 달라집니다.
  한 군수님이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자 고기 집에 갔습니다. “아줌마, 여기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 주시오.” 고기가 도착하자 군수님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군수님은 그 고기를 보고 주인을 불렀습니다. “사장님, 고기에 기름이 왜 이렇게 많아요. 예전 것이랑 틀리잖아!” 군수가 화를 내시니 식당 분위기가 썰렁 그 이상 이었습니다. 이 때 사장 아줌마가 던진 말은 군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아이구, 군수님. 이놈의 소가 운동을 안 했나 봅니다. 기름이 많이 꼈네요.” 어이가 없는 대답에 군수까지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군수의 초대를 받은 귀한 손님은 한술 더 떴습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 내게 먹고 운동하면 되지 뭐!” 손님은 화를 낼 수도 있었고, 식당은 단골손님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분위기에 재치와 웃음으로 반응하였기에 분위기가 부드럽게 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세이고,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에 대해 어떤 자세, 어떤 태도로 극복해야 하느냐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의 주 활동 지역은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기적을 행하신 소식이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마침내 중풍병자를 친구로 두고 있는 사람들의 귀에 까지 들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예수님 앞에 갈 수 없으니까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침상에 메고 와 지붕을 뜯어 침상을 내린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지붕을 뜯고 침상을 내리는 과정에서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먼지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았습니다. 집 주인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람들은 갑자기 침상과 함께 그 위에 누운 중풍병자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며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날리는 먼지와 남의 지붕이 파손되는 광경을 보면서 별의 별 소리를 다 했을 것입니다. “제 정신이 아니구만!” “뭣 하는 짓이야!” “살다 살다 별일 다 보네.” 침상을 내리는 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대는 말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합니다. 그러나 방안에 앉아서 그 광경을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날리는 먼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당혹스럽게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네 사람의 마음속에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보여들이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행동했고,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성경에는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이름을 지어 불러준다면 이런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의 이름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예수님께 이 친구를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가면 예수님께 낫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믿음이라는 이름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이 친구를 우리가 어떻게 좀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중풍병으로 앓아 누워있는 이 친구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 친구들! 우리가 어떻게 좀 해 보세.”라고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의 이름은 소망입니다. “그래, 예수님께 소망을 걸어 보자.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 친구에게 소망이 있어.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친구를 들고 가보자.”라고 말하는 소망이라는 이름의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의 이름은 인내입니다. 이 사람은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장애물을 만나도 인내함으로 끝까지 해 보는 사람입니다. 이들 네 사람의 이름이 합쳐져서 주님이 보시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네 사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인내가 합쳐져 “그들의 믿음”이라는 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 네 사람의 신앙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네 사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인내가 합쳐서 장애물 하나하나를 차례차례 극복해 나갔습니다.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는데 있어서 그들의 첫 번째 장애물은 중풍병자의 병든 몸입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려고 할 때, 그의 몸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팔짱을 끼거나 부축해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휠체어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명의 친구가 함께 힘을 합하여 들것에 들고 갔습니다. 들것에 들고 가는 것으로 첫 번째 장애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이 만난 두 번째 장애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라고 기록하고 있고, 4절에,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가 질병을 치유 받는 데 있어서 두 번째 장애물은 너무도 많이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장애물을 넘어서려면, 다 비켜달라고 양해를 구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발을 밟고서 네 사람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침상을 들고 앞으로 헤집고 나아가야 했고, 그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과 원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네 명이 들것을 들고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도무지 무리였습니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장애물을 만난 그들이 서로 상의하는 장면을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그냥 돌아가야 하는가? 양해를 구하자, 무조건 나가자,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자, 많은 무리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지붕을 뚫어 내리는 방법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지붕은 세 번째 장애물입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장애물을 뛰어 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의 구조와 지붕의 구조는 그 방법이 가능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의 집 지붕은 어떻게 되어 있길 래 아무런 연장도 준비해 오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채석이 용이한 석회암 지대라 일찍이 돌집이 발달했습니다. 성서시대 이스라엘 평민들은 사면의 벽은 돌로 쌓고, 지붕은 진흙으로 발랐습니다. 부자들은 기와지붕을 얹었습니다. 지붕은 먼저 수평으로 돌무화과나무 가지로 만든 대들보를 깔고, 수직으로 갈대 또는 종려나무 가지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최종 처리를 했습니다. 지붕을 100이라고 볼 때, 나무로 10%, 진흙으로 90% 얹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붕에 올라가 손으로 흙을 긁어내서 중풍병자 친구를 달아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요즘처럼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지붕이라면 지붕을 뚫어서 내리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사랑하는 친구가 치유 받도록 하기 위해 장애물을 극복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는 장애물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모두 다 순조롭게 아무런 장애나 방해가 없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어떨 때는 순조로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장애물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방해물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공격당함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다만 장애물, 방해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로 극복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19일 금요일 아침 KBS 방송 뉴스에서 소개되었습니다. 14년 전, 학교에서 1등을 도맡아 법률가를 꿈꾸던 여고생 유수연에게는 백혈병 판정은 너무도 큰 좌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그는 음악을 하고 있을 때에는 ‘자신이 죽는다, 백혈병이 재발하면 어떻게 하냐’는 두려움을 잊게 된다고 합니다. 유수연씨, 그는 국제적인 권위의 벨베데레 콩쿠르 대회에서 오페라 코치 부문 1위와 특별상을 함께 받는 기록도 세우면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큰 병에 굴하지 않고, 항상 어렵고 힘든 상황이 와도 그게 끝이 아니고, 그 다음에 무엇인가 희망적인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았고, 이것을 통해 뭐가 있을 거라는 맘을 항상 갖고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삶의 장애물을 인내를 가지고 극복했습니다.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자세입니다. 믿음의 태도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고, 극복해 내고, 이겨냅니다. 여러분,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으면 승리란 없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하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목표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 상 17장에는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전쟁을 하려고 하기 직전인데, 이스라엘 군대는 이미 골리앗을 보고서는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며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어린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형들과 천부장에게 음식을 갖다 주러 갔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다윗이었지만, 할례 받지 않은 이방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말을 듣고서 도저히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고 있을 때에, 다윗의 형 엘리압이 화를 내며 다윗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었습니다. “너 왜 왔냐? 들에 있는 양들은 어떻게 하고 왔냐? 너 이 놈, 전쟁 구경하러 왔지, 내 다 알아. 네 교만과 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 참으로 이 말은 다윗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큰 형의 말이었습니다. 비록 다윗이 그렇더라도 큰 형이 다윗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에 다윗은 삐껴가지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며 “형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래! 아버지 심부름으로 왔단 말이야! 양들이야 다 맡기고 왔지. 내가 언제 양떼를 잘 못 지킨 적 있어?” 그러면서 울면서 집으로 뛰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그러십니까? 다 이유가 있어요.”라고 대답하고서는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데 있어서, 다윗이 형 엘리압의 말이라는 장애물에 넘어지고 말았다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고, 다윗이 다윗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가, 부모, 형제, 친구, 교회 교우가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으로 넘어서야 합니다. 극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아무도 골리앗과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까 다윗이 싸우려고 합니다. 사울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을 만나 다윗을 말립니다. 아직 소년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골리앗은 소년 때부터 전쟁을 한 용사라고 말하며 말입니다. 다윗의 두 번째 장애물은 다윗을 생각해주면서 말리는 사울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말을 듣고 골리앗과 싸우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어도 아무도 다윗을 향해 뭐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쓰러뜨리려는 의로운 분노는 두 번째 장애물을 넘어서게 했습니다. 더 큰 목표를 이루는데 있어서 나를 위해 주는 말이, 나를 위해 준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에게 세 번째 장애물은 골리앗이었습니다. 키가 3미터 가까이 되고,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의 무게는 56킬로그램 가까이 되고, 방패의 크기는 다윗의 몸을 다 덮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골리앗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두려움이 엄습하여 다윗 또한 다른 이스라엘 군인들처럼 벌벌 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두려움이라는 장애물을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골리앗을 골리앗으로 보지 않고, 할례 받지 못한 이방 사람으로, 다윗이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양을 물어 가면 가서 빼앗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와주신 것을 기억하며, 골리앗을 짐승과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랬으니 칼과 창으로 나아가지 않고 막대기와 돌 다섯 개와 물매를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골리앗을 단방에 쓰러뜨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장애물을 극복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장애물을 만나면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인내로 장애물을 극복하며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그들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 그 신앙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장애물을 극복하게 했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목표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네 사람의 신앙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신앙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중풍병자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긴 병이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단지 효도에 관한 말만이 아닙니다. 긴 병에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효도도 지칠 데로 지쳐 바닥이 드러난다는 뜻만이 아니라 가정 경제도 바닥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풍병자의 재정 상태가 좋으리라는 추측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네 명의 친구들이 남의 집 지붕을 뜯을 때에는 어떤 계산과 각오가 있었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렀을까요?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는, 친구 중풍병자를 향한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에는 지붕을 뜯어서라도 내리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병을 낫게 해 주실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남의 집을 뜯은 것에 대한 책임 - 상황적 책임, 도의적 책임, 경제적 배상의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가 네 사람에게 다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네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그런 각오가 없었다면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붕을 뜯어 침상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중풍병이 나을 수 있다면, 자기 자리를 들고 일어나 집으로 갈 수 있다면, 마비된 몸으로 더 이상 누워있지 않고 움직일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면, 지불할 값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집 주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후에 지붕을 고쳐주고 배상하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병이 치유되어야 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목표를 이뤄야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인내가 합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밭에 감추인 보화를 얻기 위해 다른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사야 그 밭에 숨겨져 있는 보화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듯이, 천국은, 신앙의 원리는 대가를 지불하는 삶입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 그렇지 못한 것을 버리거나, 정리하거나, 포기하거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재산과 직업과 가족을 버리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 옛사람을 버리고, 옛습관을 버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새 말씀을 듣고 새로운 은혜를 받고 회복되기 위해서는 개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성경책을 들고 예배에 나아오지도 않으면서,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지도 않으면서 풍성한 말씀을 받으리라 기대하십니까? 부흥회에 참석하지도 않으면서, 은혜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은혜 받기를 기대하고 영적 부흥이 자신에게서 일어나기를 기대하십니까? 감사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금하지 않으면서, 인색한 마음으로 헌금하면서 하나님께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기만을 기대하십니까?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과 무릎을 꿇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해결되고 치유받기를 기대하십니까?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입니다. 먼저 선행을 해야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시고,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지 않고, 그 그릇을 하나님을 향해 열지 않으면서 은혜를 받겠다고 한다면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는데,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까요? 은혜를 주신다고 해도 받을 자세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태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장애물이 극복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버릴 것을 과감히 버리는 대가, 감당해야 할 것을 감당하는 대가, 용서해야 하는 것을 용서하는 대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대가,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쏟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목표를 이룰 수 있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경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얻은 것은 쉽게 잃어버립니다.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마치 복권에 당첨되어 얻게 된 수십억, 수백억을 그렇게 날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가 땀 흘려서 번 돈은 쉽게 날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술집, 유흥가에서 종사하는 여성들이 돈을 꽤 잘 번답니다.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늘 빚에 허덕인다고 합니다. 쉽게 버니까 쉽게 쓰는 거지요. 치장하고 사치하고 또 다른 자기 유흥을 위해서 돈을 씁니다.
  여러분,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들의 생활은 부정하고 부도덕합니다. 삶의 태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땀과 진실과 성실의 대가를 지불해야 가치있는 열매를 거둡니다. 보람이 있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면 거기서 얻는 또 다른 유익이 있습니다. [민들레 영토]의 지승룡 대표가 한 말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업을 하기 전에 40일간 금식을 한다고 합니다. 진짜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창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업을 위해 40일간 금식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나면 자신이 시작하는 사업에 대해 자세가 달라지겠지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에 너무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오직 은혜만을 구걸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은혜의 진리입니다.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생명을 은혜로 우리에게 주셨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햇빛과 비와 공기와 모든 자연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걸의 종교는 아닙니다. 거지 종교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는 것이면 무조건 공짜이어야 하고, 나는 교인이니까 무조건 공짜로 얻어가야 하고, 공짜로 쉽게쉽게 복도 받고, 신앙생활도 쉽게쉽게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에 대해 감사도 없고, 헌신도 없고, 은혜를 받고서도 잊어버린다면 거지 신앙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자세로 장애물을 극복하며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태도로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으로 극복해가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인내로 삶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는 신앙의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인내로 장애물을 극복해 가는 신앙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2011년 08월 2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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