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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포인트  [3227]
· 설교 일자 : 2011년 09월 04일
· 본문 말씀 : 사도행전 9장 1-9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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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포인트 (사도행전 9장 1-9절)
  얼마 전에 선배 목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 사모님은 몇 해 전에 갑상선암을 수술했습니다. 그 후에 식생활 습관이 바뀌었고, 운동도 열심히 꾸준히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갑상선 암 수술을 하기 전보다 실제 생활은 더 건강해 지셨습니다. 요즘 암이라든지, 당뇨 고혈압과 같은 질병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으로 가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질병은 삶의 습관과 방향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터닝 포인트라고 합니다. 터닝 포인트란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된 계기,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어떤 깨달음, 어떤 사건, 어떤 계기를 말합니다.
  세종대왕이 어린 시절, 왕자 세종은 몸이 매우 허약했다고 합니다. 매일같이 약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다른 형제들처럼 말타기나 활쏘기를 즐기지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세종은 다른 놀이나 운동을 즐길 수 없음을 투정하기보다, 몸이 약해도 잘할 수 있는 책읽기에 빠져 들었습니다. 세종은 허약한 몸을 가졌기 때문에 학문을 더욱 갈고 닦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부단히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그 덕에 세종은 스물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세종대왕을 얻게 된 뒷이야기입니다. 병약하여 무술연마의 한쪽 문이 막혔지만, 한글 창제와 과학입국을 주도한 대왕성군이 되기 위한 다른 문이 열렸습니다. 몸이 약한 상황이 세종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방향이 중요합니다.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간다고 해도 방향이 잘못되면 엉뚱한 곳에 도착합니다. 아무리 화살이 힘 있게 빠르게 날아간다고 해도 방향이 잘못되면 과녁을 맞출 수 없습니다. 만약 방향이 맞지 않다면, 속도를 줄이고 멈추어 서서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초점입니다. 열정이 아무리 많아도 초점이 맞아야 합니다. 너무 열정이 넘쳐서 다른 집 여자에게 열정을 쏟으면 그것은 불륜이고 간음입니다. 열정적으로 온라인게임에만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 게임중독에 걸릴 수 있습니다. 넘치는 열정을 여기저기 쏟아 부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점이 맞아야 합니다.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적입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이것을 위해 나는 노력한다고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자신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습니다. 무의미한 힘씀이 되지 않습니다. 허무한 노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방향을 잡아 우리의 열정과 노력과 모든 것을 쏟아야 합니다. 만약 목적이 잘 못되었다든지, 초점과 방향이 잘 못 잡혀있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언제나 바른 방향으로 삶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삶의 전환점은, 방향 전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두 가지 길 중에 한 가지 길을 걸어갑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냐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길이냐? 영생의 길이냐 멸망의 길이냐? 축복의 길이냐 저주의 길이냐? 영광과 상급의 길이냐 진노와 영벌의 길이냐?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이 길이 갈라집니다.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냐 계시지 않느냐에 따라 두 종류의 길 중에 하나를 걷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전환점을 삼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그의 삶이 새 삶이 될 때, 천국의 길, 영생의 길, 축복의 길, 영광과 상급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지옥의 길, 멸망의 길, 저주의 길, 진노와 영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온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면서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BC(Before Christ) 예수님 탄생 이전과 AD (Anno Domine) 주 오신 후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 세상의 역사의 구분이기도 하지만, 사람 개인 개인의 삶에도 그의 삶에 예수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 가로 구분됩니다. 터닝 포인트가 있는 사람과 그냥 태어나서 살다가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가던 길을 돌이켜 새로운 길을 걷게 된 터닝 포인트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울이 되기 전, 이름이 사울일 때,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잡아다가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스데반 집사가 순교당할 때, 사울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돌을 들어 스데반을 쳐서 죽이는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사울 앞에 맡기고 돌을 던졌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었고, 사울은 예루살렘에 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집에 쳐들어가 잡아다가 옥에 넘기고, 교회를 잔멸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는 더욱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와 핍박하고 죽이고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대제사장에게 다메섹 지역의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청하여 만들어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따라 하기 힘들 정도로 얼마나 열심히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위협과 살기 등등한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는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습니다. 바울은 눈부시게 강한 빛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 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 줄 사람이 거기 있다.” 다른 일행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뀌었습니다.
  사울에게 이 사건은 회심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울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더 이상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구주이심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방해하고 박해하는 핍박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목양하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 이후로도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날 때마다 믿음으로, 순종으로, 방향을 바꾸어 바른 방향을 찾아갔습니다.
  만약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회심하지 않았다면, 계속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사람이 바르게 전환할 때,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전환점을 맞을 때, 여러분 개인에게는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이지만, 이 세상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한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가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이야기는 그들이 삶의 전환점, 터닝 포인트를 만나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전환했는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르게 전환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때에 바꾸지 않음으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함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 말씀으로 터닝 포인트, 삶의 전환점을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잘못된 방향을 바꾸게 하는 말씀입니다.
  제가 어느 집사님의 차를 탈 기회가 있었는데, 그 차의 내비게이션 안에도 여자가 들어있더군요. 그런데 그 집사님 차의 내비게이션과 내 차의 내비게이션은 달랐습니다. 내 차의 내비게이션 안에는 한 여자만 들어 있는데, 그 차에는 두 여자가 들어있었습니다. 보통 때에는 한 여자가 안내를 합니다. 그런데 속도위반 경고를 할 때는, 어린 여자아이 목소리가 튀어나와서 “70!” “70!”하고 외쳐댔습니다. 애 딸린 여자 둘이 들어있었습니다. 여하튼 우리가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운전을 하려면, 내비게이션 안의 여자, 내비녀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내비게이션과 같은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 속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해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길을 잘못 가고 있을 때에 방향을 바꾸도록, 방향을 돌이키도록 안내하고 때론 경고하고, 때론 명령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여러분, 왜 성경을 읽어야 합니까? 왜 성경을 들어야 할까요? 왜 설교를 잘 들어야 할까요? 왜 성경말씀을 배워야 할까요? 왜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빛이요, 내 발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길을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헛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함으로 내가 지금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움으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다가 삶의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습니다. 그것은 마치 도로 표지판을 보고 방향 전환을 해야 할 것을 맞게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다가 터닝 포인트를 맞는다면 그것도 좋은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의 전환을 이루도록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한 사건을 통해 터닝 포인트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건과 함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놀라운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가 생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울을 위시하시 유대교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큰 핍박이 있자 사도들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온 유대 땅과 사마리아 지역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는 터닝 포인트 사건이었습니다.
  주후 AD 70년 8월 5일에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함락되었습니다. 로마에 저항했던 유대반란군은 처참하게 학살되었습니다. 신성한 도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려갔고, 성전은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고 알져진 서쪽 벽 하나만 남기고 완전히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 예배의식에 있어 상당한 역할을 차지했던 제사가 중지됨에 따라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가 아닌 독립된 정체성을 갖게 되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보다는 지중해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회당들이 기독교 전파에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교회와 회당, 기독교와 유대교, 크리스천과 유대교도가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공격했던 베스파시안과 그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무렵, 베드로와 바울이 네로 황제 통치하에서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그 후 몇 년 안 되어 로마가 기독교의 교류와 권위의 중심지로서 예루살렘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로마의 황제의 깃발을 꽂을 때, 기독교는 세계의 심장부 로마에 복음을 전했고,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핍박과 박해와 수많은 순교가 이루어지면서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예루살렘 함락과 사도 베드로의 순교, 사도 바울의 회심과 순교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작고 큰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하십니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 졸업, 취직, 군입대, 결혼, 실연,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 때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꿀 때 발전이 이루어지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이라는 터닝포인트를 주십니다.
  길을 가다가, 운전을 하다가 방향을 바꾸라고 지시하는 도로의 표지판을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갈 때, 내비게이션 안의 여성이 방향을 바꾸라고 자꾸만 이야기해도 자기 고집대로 가버릴 때, 우리는 엉뚱한 길을 가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께서 길의 방향을 바꾸라는 이정표도 보여주시고, 경고의 메시지도 주시는 데도 내 고집대로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하십니다. 방향을 바꾸어 나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도록 우리에게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 어떤 방법도 없는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동안 땅의 일에 온통 신경 쓰고, 온 힘을 썼던 것을 내려놓고 하늘의 방법,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다시 돌아가도록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하십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이나 작은 사건들을 통하여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있다가 그렇게 막다른 골목을 만나서야 돌이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이 거주했고, 그의 아들 이삭이 거주했고,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가나안 땅만이 아니고 애굽 나라의 인근 모든 지역에 가뭄과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 땅에 먼저 보내셔서 그곳에서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차저차 하여 야곱과 아들들은 가뭄과 기근이 끝날 때까지 애굽에 고센지역에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과 그 아들들은 가뭄과 기근이 끝나고 난 뒤,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좋았습니다. 그냥 눌러 앉았습니다. 그렇게 43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애굽 땅에는 요셉이 총리대신 할 때의 바로 왕이 아닌 그 후손 바로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바로 왕은 점점 왕성하게 늘어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고 위협을 느껴 그들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가혹한 학대를 했습니다. 억압과 압제는 도를 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산파에게 다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음소리와 탄식하는 소리는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터닝 포인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그냥 눌러 앉아 약속의 땅이고 뭐고, 하나님의 선택된 거룩한 백성이고 뭐고, 온 세상 속의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는 백성으로서 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애굽의 견제, 그리고 강제 노동과 가혹한 학대, 그리고 태어난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명령과 계속되는 압제를 통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도록 터닝 포인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고집스럽게 살다가, 방향을 바꿔야 하는 기회를 놓치고 또 놓치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터닝 포인트로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됩니다. 질병이라는 신체적 막다른 골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업 실패나 재산을 날리는 경제적 막다른 골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실수와 허물이 드러나 명예가 실추되는 막다른 골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교만과 완악함 때문에, 게으름과 죄악 때문에 영적 막다른 골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총체적인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가정 상황도, 건강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상실과 절망과 포기라는 막다른 골목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순간은 포기의 순간이 아닙니다. 절망의 순간의 아닙니다. 터닝 포인트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삶의 방향과 목적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제 2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사람이 고난과 위기를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난과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어떤 사람은 절망하여 죽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극복하여 더 성숙한 삶을 살아갑니다. 똑같은 고난, 똑같은 연약함, 똑같은 막다른 골목을 만나도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것을 터닝포인트로 생각하느냐, 끝났다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영국의 윌리엄 문이라는 사람은 대학 시절,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서 학업 성적은 뛰어났지만 자신의 머리를 가치 있는 일에 쓰고자 하는 의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크고 작은 범죄와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여태껏 잊고 있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저입니까? 왜 저에게서 빛을 빼앗아 가셨습니까?" 그는 매일같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한탄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주위에는 나와 같은 맹인들이 참 많구나. 나의 재능으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윌리엄은 눈 뜬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맹인들만의 감각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점자책’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맹인들의 빛이 되었습니다. 만약 윌리엄이 눈이 멀지 않았다면, 만약 윌리엄이 눈이 멀었어도 신세 한탄만 하고 있었다면, 만약 윌리엄이 눈이 멀었어도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하고 자기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건강할 때처럼 사고를 치는 데에만 사용했다면, ‘점자책’이라는 위대한 작품이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윌리엄 문은 실명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터닝 포인트를 이루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뉴욕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 생후 6주 만에 의사의 잘못된 치료로 실명해서 일생을 맹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육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격려하고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명 의식을 갖고, 영혼 깊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바른 길로 돌아왔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가 비오니 죄인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279장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세상에서 내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288장입니다. 21세기 찬송가의 21곡의 가사가 패니 크로스비가 작사한 찬송입니다. 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되었습니다. 무려 9,000여 편의 찬송가와 복음송가를 작사했습니다. 그는 성악가로, 오르간 연주자로, 맹인학교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생애 말년에는 빈민굴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영혼에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실명의 장애를 터닝 포인트로 삼았습니다.
  절망과 고통, 불안과 실패의 순간을 삶의 전환점으로 삼아 새로운 일을 한다면, 발전적인 일, 긍정적인 일을 한다면 새로운 계기가 열립니다. 눈을 떠서 방향을 바꿔야 할 때 바꾸고, 지금의 상황 속에 파묻혀있지 말고 새로운 시작을 할 때 터닝 포인트가 이루어집니다. 변화를 줄 때 터닝 포인트는 우리들에게 은혜의 사건이 됩니다.
  교우 여러분, 고집 피우지 마십시오. 버티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속된 말로 똥고집이라고 합니다. 고집 피울 것을 피워야지요. 미련한 사람은 머리가 나쁜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고집 피우고, 사리분별 못하고 고집 피우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한 번만 깊이 생각하면 답이 나오는데,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될 되로 되라! 이런 식으로는 발전이 없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의 유익이 없습니다. 바로 왕이 그랬습니다. 10가지 재앙이 다 임할 때까지 고집피우고, 미루고, 강퍅해지고 갈 때까지 다 가서 10가지 재앙으로 온 애굽이 너덜너덜해지기까지 버티다가 결국 이스라엘을 놓아주어야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삶에는 다양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옵니다. 그때, 삶의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터닝 포인트를 만나면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 방향을 바꾼 후에 맞게 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방향 전환 후에 이루게 될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방향 전환 후에 느끼게 될 인생의 바른 목표와 의미를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방향 전환 후에 얻게 될 많은 유익과 열매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삶의 터닝 포인트를 주십니다. 삶의 전환점을 맞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터닝 포인트는 다양하게 만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순종하여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011년 09월 04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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