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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3256]
· 설교 일자 : 2011년 09월 18일
· 본문 말씀 : 시편 103편 1~8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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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 대한 오해 (시편 103편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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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에게 “여러분, 예수 믿고 만사형통하시기 바라십니까?”라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아멘”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만사형통은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만사형통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만사형통이란 모든 일들이 반대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원하는 대로,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이 계획한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소원하는 것이 만사형통이요, 모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 “만사형통하십시오!”요, 모든 사람들이 만사형통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를 찾습니다. 형통하지 않는 것을 형통하게 하려고 부적을 사서, 붙이고 다니고 베개 속에 넣어놓고 베고 자고 집 기둥에다 벽에다 붙여 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고사를 지냅니다. 사업이 만사형통하려고, 어떤 사람은 액이 닥쳐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살이 꼈다는 것을 살풀이하기 위해서 무당에게 찾아가 굿을 하기도 하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손 없는 날을 잡아서 이사도 하고, 집안의 큰일을 계획합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 만사형통이 되었을까요?

  여러분, 모든 종교가 만사형통을 이루게 해 준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한 번만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욕심대로 모든 것이 형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라고 알고 믿고 있다면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때부터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막혔던 것이 뻥 뚫리고, 좋지 않았던 일들이 좋은 일로 바뀌고, 슬퍼할 일도 하나도 안 생기고, 괴로운 일도 하나도 안 생기고, 고통도 시련도 위기도 다 없어지고 탄탄대로를 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오해입니다. 그렇게 믿고 있다면 실망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만사형통이라면, 그래서 신앙을 갖고 살면 모든 일이 다 원하는 대로 척척 이루어지고, 다 잘 되고, 다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라면, 성경의 믿음의 선조들은 살면서 한 번도 슬픔과 고통과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욥과 같은 인물은 고난을 그렇게 많이 당했는데, 그렇다면 욥이 신앙생활을 잘 못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도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신 분이신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도 고난과 박해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못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목표는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만사형통을 원하지만 만사형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뭔가 잘 되기를 바라고, 만사형통하기를 원해서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를 잘못 믿은 것입니까? 속은 것일까요?
  성경에 분명히 ‘형통’이라는 말이 나오고, ‘형통’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으로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어 주인이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후에,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누명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어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분명히 형통을 주십니다. 그런데 만사형통이라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일도 없고, 누명쓰고 감옥에 갇히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명기 29장 9절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 평지에서 언약과 관계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1장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열왕기상 2장에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자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합니다.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에 보면, 이런 말씀이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너희가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너희가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걸으면...  형통하리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면 형통을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기만 하면 형통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조건 만사형통을 바란다면 저급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는 저급한 종교가 아닙니다. 저급한 종교란 종교 행위가 저급하고 몰상식적이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것입니다. 제물로 자녀를 바친다든지,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또한 신앙생활하는 자신은 변화 되거나 성숙됨 없이 자신의 목표, 바램, 소원,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신앙을 갖는 것을 저급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신을 믿는 것,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것, 무당을 찾아다니는 것, 우상을 섬기는 것이 그렇습니다. 건강관리를 잘 못했으면서도 건강이 형통하기를 바란다면, 어리석게 무리하게 사업해 놓고서 사업의 형통을 바란다면, 도둑질을 하고서 안 잡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안 잡혔다고 믿는 것은 저급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라, 그러면 형통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만사형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 세상에 슬픔과 괴로움과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일이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만사형통을 바랍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들은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이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하여 감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얼떨결에 당하는 것과 모르고 있다가 그럴 줄 몰라 겪게 되면 고통이 더 큽니다.
  또한 나만 겪는 고통이라고 생각할 때, 더 힘이 듭니다. 병원에 가면 다른 환자들을 보면서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나보다 더 힘든 환자가 나 보다 더 긍정적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투병하는 것을 보면서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되고, 희망과 용기가 상승됩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 서로 서로 힘이 되어 주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나 혼자만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알면 고통과 슬픔이 훨씬 덜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삶이 쉽고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고, 거친 광야를 지나가는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자세로 살 것인가? 어떤 태도로 헤쳐 나갈 것인가? 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자세로 살 것인가?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 를 깨닫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면서 천국을 다스리고 새로운 세계를 다스리고 피조세계를 돌보는 하나님의 파트너, 동역자로 살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회복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있어서 예루살렘 교회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온 성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마술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초능력이 있는 줄 알고 ‘위대한 마술사’라고 불렀고, 마술사치고는 많은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빌립 집사가 그 마을에 와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자, 사람들은 마술사 시몬을 잊어버리고 곳곳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마술사 시몬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마술사 시몬은 빌립 집사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그 때, 빌립 집사의 복음 전파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안수하니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때,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서 돈을 드리면서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도 베드로가 시몬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하다니, 네가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짓이오. 지금 당장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마술사 시몬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도 받았지만, 아직 기독교 신앙생활, 복음적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돈으로 성령 충만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돈으로 거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 놀라운 표적이 일어나는 것,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데, 돈이나 그 무엇으로 쉽게 그것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하지 않고 능력만을 구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마술사 시몬이 그랬습니다.
  필요한 것을 얻어 내는 것, 소원을 이루는 것, 욕심을 채우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닮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믿는 태도가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태도를 유지하게 하고, 하나님을 계속 믿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더욱 증진하고, 하나님을 믿는 태도가 더욱 성장, 성숙하도록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하나님과 더욱 하나 되는 관계가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이 잘 되고 있다고 합시다. 그의 삶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카멜레온과 같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교회에 맞는 모습으로 적응하고, 사회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사업이 잘 됩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셔서, 복을 주셔서 형통케 하신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케 하시는 것일까요?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참고 기다리고 계신 기간일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건강하고 사업 잘 되고 부자 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래야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 진다는 신앙의 원리, 신앙의 비결을 말씀합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형통하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 있으면, 지금 당장의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03편은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고백하면서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거듭 거듭 강조하면서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은택,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 베푸신 은택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로, 3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와 복입니다. 둘째는 4절,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 주위의 멸망으로부터 보호하십니다. 보호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셋째는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만족케 하십니다. 만족의 복을 주십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살면서 죄를 짓지만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해 주시며,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병을 고쳐주시고, 파멸에 처해질 상황에 빠질 때도 있지만 구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은혜를, 그 복을 받아 누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시지 않지만, 우리가 그런 것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만족하도록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비유하여 아름다운 신앙고백시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만사형통한 사람이 아닙니다. 생애에 굽이굽이 고통과 슬픔과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양과 같은 다윗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언제나 양이 푸른 풀밭에 누워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언제나 물가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른 광야를 지나 마침내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쉬지 못하고 갈증이 나는 길을 지나 마침내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다윗은 삶 속에서 고통과 슬픔과 시련이, 목마름과 배고픔과 피곤과 곤고함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있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어 주셔서 그를 인도 하셔서 푸른 풀밭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4절의 말씀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지만 주께서 함께 하셔서 두렵지 않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란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를 지나게 하시어 마침내 푸른 풀밭으로,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막을 지나게 하시어 마침내 쉴 만한 물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마침내 평안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고통의 인생길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삶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만사형통이 아닐지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힘을 얻고, 지혜를 받고, 능력을 얻어 이겨나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불행을 만나지만 행복으로 바꿔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3,4절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이 결국은 믿음을, 더욱 굳은 믿음, 순전한 믿음, 강한 믿음으로 만들고, 소망을 굳게 붙잡게 하는 것이기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 신앙의 진수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독교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연속으로 방영되는 연속극과 같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연속극과 같습니다. 연속극을 보면 거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구조가 있습니다. 스토리도 있고, 재미도 있고, 교훈도 있고, 그리고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과 위기를 당합니다. 그러다가 반전이 일어나 극적으로 상황이 역전이 됩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이 조마조마 하다가 기분이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주인공이 어려움을 만납니다. 주인공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다가 다시 그것을 극복하고 반전이 일어납니다. 상황이 역전됩니다. 이렇게 고난과 역경 그리고 반전, 역전, 클라이맥스가 없으면 연속극이 재미가 없습니다. 시청자들이 연속극 그 시간에 텔레비전 앞에 안 앉아 있습니다. 그런 연속극처럼 우리 인생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궁극적인 형통입니다. 궁극적인 승리, 궁극적인 복을 받는 삶입니다. 찬송 384장 1절 끝 가사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2절을 보면 만사형통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2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시네” 여기서 만사형통이란 궁극적인 형통, 궁극적인 복, 궁극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인생은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이 많은 인생입니다. 문제도 많이 생기고, 장애물도 많은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 속에서 자신의 변화나 성숙은 관심 없고, 만사형통만을 원한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사형통하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의 삶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복, 보호하시는 복, 만족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011년 09월 18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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