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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아래 사는 사람  [3012]
· 설교 일자 : 2011년 10월 16일
· 본문 말씀 : 로마서 6장 12~14절
· 설교 :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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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아래 사는 사람 (로마서 6장 12~14절)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남편은 결혼하기 전에는 참으로 반듯했고, 완벽해 보였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살게 해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살아보니 함께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는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아내의 조그만 실수나 허물도 용납할 줄 몰랐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잘 하려고 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남편의 요구는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그는 폭군과 같았습니다. 자기가 정한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부인을 마구 몰아붙이고, 비난하고, 심지어 부인을 벌을 세우거나,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남편은 항상 감시자 같았고, 재판관 같았고, 형 집행관 같았습니다. 그 여인은 항상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자신감도 잃었고, 열등감도 생겼고,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남편의 가혹한 채찍과 요구에 너무도 힘이 들어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나? 라고 탄식만 나왔습니다.
  어느 날,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남편은 너무도 이해심이 많았습니다. 진정으로 그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실수를 하거나 허물이 드러날 때에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여인을 쳐다보는 눈빛은 감시자나, 재판관과 같은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동정심과 긍휼히 여기는 눈빛이었습니다. 아내가 힘들어 할 때에는 언제나 도와주고, 같이 짐을 나눠졌습니다. 아내가 실수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때에는 남편이 책임을 져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처음에는 실수도 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였지만,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고 힘이 되어주는 남편을 위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편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마음이 편안하고 불안과 두려움도 열등감도 사라지니까 자신감도 회복되었습니다. 점차로 실수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삶의 활기를 찾았습니다. 기쁨도, 행복도 되찾았습니다. 점차로 그 여인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교우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여인이라면 어떤 남편과 살고 싶습니까? 두 남편을 다 거느리고 살고 싶습니까? 당연히 두 번째 남편 같은 사람과 살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첫 번째 남편과 살고 싶다고 한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의 비유 이야기의 여인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남편의 이름은 율법입니다. 두 번째 남편의 이름은 은혜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과 의무감으로 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신 복음과 은혜는 사랑과 감동과 감사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과 연관된 말씀이 본문 말씀 앞 6장 1-11절까지에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새생명을 다시 태어나서 새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옛날 율법과 살던 삶은 끝내고, 내가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 은혜와 결혼하여 새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또 13절 말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악한 사람에게 무기가 쥐어지면 그 무기는 악한 일에 사용되고, 선한 사람에게 쥐어지면 선을 지키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죄에게 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 아래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에게 햇빛과 비와 공기와 피조물을 주십니다. 일반적인 은혜, 보편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또한 특별한 은혜를 주십니다. 인간이 구원 받아 영생하려면, 특별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구원의 은혜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받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은혜,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보호와 인도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위로와 격려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힘과 능력과 지혜와 복과 은사를 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우리들에게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보내 주신 것은 큰 은혜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그리하여 이 특별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이기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주십니다. 천국 백성으로 변화되고 성숙해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가 지배하는 삶이 기독교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지난주 설교 내용 요약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생활은 은혜를 떠나면, 신앙생활이 힘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있으면 힘이 빠지고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인이 은혜 안에 있지 않으면, 은혜 아래 있지 않으면 그 다음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로 예수님과 우리들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지, 어떻게 하는 것이 포도나무 가지로써 열매를 맺을 있는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것이 중요하냐 하면, 그것이 곧 복음적인 삶, 은혜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있으면 된다.”는 원리입니다. 가지가 나무와 떨어져 있으면, 붙어있지 않으면 메마르고 결국 죽는다는 것이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가지가 나무줄기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영양분을 공급받지 않으면 가지는 말라 죽고,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지 못하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메말라갑니다. 죽어갑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저는 마른 나무이고, 뿌리를 뽑아야 할 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은혜가 내려도 받을 수 없는 상태, 은혜가 쌓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면 영적으로 굶어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처럼, 은혜 아래 살아야 합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발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보통 ‘은혜를 받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것도 필요하고,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는 것도 필요하고, 주신 은혜를 발견하여 자기 것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결혼하고 오래 지 않아 과부가 된 한 여인이 아들 하나하고 산골짜기에 살았습니다. 그 아들을 잘 키워 도시로 취직해서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들에게로부터 돈이 부쳐 오기를 기다렸지만, 아들이 돈을 보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아들이 돈을 보내 주기만을 기다리며 겨우 겨우 살아갑니다. 식량은 떨어져 가고, 몸은 점점 야위어져 갔습니다. 산골짜기에 사는 다른 이웃들이 묻습니다. “아들이 돈을 부쳤소?” 그 과부는 “편지 밖에 안 왔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웃이 놀러 와서 말 했습니다. “그 아들이 효자라서 돈을 안 붙였을 리가 없는데, 어찌 된 일이오. 편지 안에 다른 것이 없었어요?” 그러자 그 과부는 “편지 안에 웬 종이쪽지 한 장이 같이 오긴 했소.” 이웃이 그 종이쪽지를 좀 보여 달라고 하자, 그 종이쪽지를 가져 왔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수표였습니다. 그 과부는 수표를 생전 본 적이 없어서, 아들이 보내 준 종이쪽지가 수표이며, 그것이 곧 돈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사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알지 못하여, 은혜를 깨닫지 못하여,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여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시는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발견하여 자기 것으로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어떻게 깨닫게 됩니까? 은혜를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을까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은혜 주셨는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알지 못할 때,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는 이미 주신 것을 깨달아 받아야 하고,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하고, 앞으로 주실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누려야 합니다.
또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은혜를 깨닫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깨닫게 하고, 은혜의 선물을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겸손할 때 깨닫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받지 않습니다. 은혜인 줄 모르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은혜를 사모하며 겸손하게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를 못합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은혜가 내려도 담겨질 수 없습니다. 은혜가 쌓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에 은혜가 내립니다.
  교우 여러분, 아침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아십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깊은 골짜기에 가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합니다. 낮은 곳에 임합니다. 여러분, 사막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막에는 여우와 다른 짐승들뿐만 아니라 뱀이나 개구리, 풍뎅이까지 삽니다. 그러면 이런 짐승들이 어디에서 물을 구하여 먹고 살까요? 그 비밀은 이슬에 있습니다. 사막에는 뜨거운 낮 기온과 차가운 밤기운으로 인하여 밤과 새벽에 이슬이 맺힙니다. 그래서 여우같은 짐승은 바위에 낀 이슬을 매일 핥아먹고 삽니다. 개구리는 자기 머리와 눈 근처에 내린 이슬을 앞 다리로 씻어서 그것을 핥아 먹습니다. 그러면 풍뎅이는 어떻게 이슬을 먹을까요? 풍뎅이의 입은 등까지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풍뎅이는 서로 다른 풍뎅이의 등에 있는 이슬을 핥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멋진 추측이기는 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풍뎅이도 있으니 말입니다. 사막을 연구 조사하는 특수 전담팀이 촬영해 온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풍뎅이는 자기의 몸에 내린 이슬을 먹기 위하여, 머리를 땅으로 낮게 내립니다. 낮게 내릴 수 있는데 까지 최대한 낮게 낮춥니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립니다. 그러면 자기 등에 맺혀있던 이슬이 머리 쪽으로 주르륵 흘러내려 옵니다. 이렇게 이슬이 흘러내려오면 풍뎅이는 그것을 빨아 먹습니다. 은혜는 이슬과 같습니다. 풍뎅이가 이슬을 먹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낮추면 낮출수록,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우리에게 임합니다. 은혜를 더욱 잘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더 잘 깨닫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고개를 쳐들면 쳐들수록, 뻣뻣해지면 뻣뻣해질수록, 교만해지면 교만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다 해도 깨닫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고, 감사치도 않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베드로전서 5장 5절 하반절 말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겸손하게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복음의 생활이고, 복음의 생활이란 은혜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사고방식과 복음적인 삶이란 은혜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은혜의 바다에서 살아갑니다. 율법의 늪에서 점점 빠져 들어가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바다위에서 배를 띄우는 삶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용서와 사랑과 구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게 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니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삶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또 은혜를 베푸실 것이니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하시는 은혜를 무슨 세탁세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시궁창에서 뒹굴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좋은 세제가 있으니 옷을 더럽혀도 돼! 빨면 되는 데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빨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실 테니까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돼! 회개하면 되는데 뭐!”라고 생각하며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뜻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과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라는 말을 자칫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혜롭게 해결하자” “은혜스럽게 하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로 사는 것인 양 사용합니다.
  은혜롭게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고, 은혜를 베풀면서 살고, 은혜가 강같이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은혜롭게 해결하자” “은혜스럽게 하자”는 말이 사용되는 상황을 보면, 좋은 뜻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 물으려고 하지 말라 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할 때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에 대한 인정과 바른 회개 없이 무조건 덮어버리는 것이 은혜스러운 것이라는 뜻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은혜를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무조건 잘못을 덮은 것만이 은혜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바르게 알고, 바른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베푸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물론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하다가 죄를 짓는 때도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기회를 주실 것을 믿기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또 다시 회복되어 살아갑니다. 은혜만이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은혜 아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 산다면 죄가 우리를 주관하게 되고, 우리가 은혜 아래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죄책감과 좌절감과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에게 더 강력하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타율적인 삶이 아니라 자율적인 삶을 삽니다. 의무를 기쁨과 특권으로 바꾸게 됩니다. 행위에 초점을 둔 율법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둔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은혜의 힘은 율법의 힘보다 강합니다. 의무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은혜, 놀라운 사랑 때문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변화와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살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바르게 알면, 그래서 은혜를 받고,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누리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은혜 아래 살기 위해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국 은혜란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시는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손길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야 합니다.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해 본 사람이 더욱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본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체험해 본 사람,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합니다. 갈망합니다. 간구합니다.
교우 여러분,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처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은혜 아래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11년 10월 16일
신문수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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