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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3466]
· 설교 일자 : 2011년 11월 27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1장 1-12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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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요한복음 1장 1-12절)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아십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믿고 있습니까?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이런 분이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십니까? 네, 아주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달랑 알고 있거나 고백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요즘 스마트폰을 전화 걸고 받는 것에만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예수님 안에 어떤 풍성함과 권세와 능력이 있는지를 바로 아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놀랍게, 풍성하게 살아가는데 중요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 안에 들어오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머리속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 성품, 섭리가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나 이해력 안에 잡아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게 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론적 학문적인 신 개념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능력과 권세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주셨고, 무엇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먼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본문 1절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은 예수님을, 즉 태초에 그분의 아버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말씀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씀속에 담긴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함으로 모든 진리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진리로 오셔서 거짓을 거짓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가짜를, 진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진짜가 진짜의 자리에 자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도둑과 목자,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비교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양에게 있어서 진짜 목자와 가짜 목자가 누구인지를 알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가짜 목자에게 끌려가고, 생명을 빼앗기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누가 가짜 목자이고, 누가 진짜 목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위선, 가짜를 분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가짜가 진짜를 밀어내고, 거짓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거짓과 가짜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가짜의 유혹은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예수님은 가짜와 거짓이 유혹하는 세상에 진리로 오셨습니다. 진리로 이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거짓의 유혹에 빠져 불행과 멸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호머의 신화 이야기인 [오딧세이]에서, 지중해의 한 섬에 살고 있는 반은 여자이고, 반은 새인 생물 사이렌의 이야기를 통해 속임수의 위험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는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근처를 지나가는 뱃사람들은 그 소리에 정신을 빼앗긴 채 뱃길을 벗어나 암초투성이의 해안가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러나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준 그 짧은 매력은 사이렌들이 암초 사이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난파한 배의 선원들을 잡아먹기 시작하는 순간 즉시 공포의 현실로 바뀌고 맙니다. 오늘날 경고의 소리를 사이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이야기에서 이름을 가져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이렌의 마력을 이겨낸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의 방법은 각기 달랐습니다. 우선 율리시즈는 사이렌의 노래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를 들었음에도 자기 귀로 직접 그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이끄는 배의 선원들과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은 다음 자신을 돛대에 붙들어 매게 했습니다. 그들이 탄 배가 사이렌이 살고 있는 암초투성이의 섬 곁을 지나는 동안 선원들은 그들의 달콤한 노랫소리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율리시즈는 돛대에 묶인 채 자기 귀에 들려오는 소리로 인한 욕망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인 오르페우스는 널리 알려진 전설적인 음악가로 사이렌의 덫을 피하기 위해 다른 접근법을 펼쳤습니다. 그가 탄 배인 아르고 호가 죽음의 섬을 둘러싸고 있는 변덕스러운 물길에 들어서자 그는 하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르페우스의 음악의 정교한 아름다움은 너무도 순수하고 매력적이어서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더 이상 선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짓 교훈은 사이렌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것은 달콤하게 들리도록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끌어 잡아 다니고 기만합니다. 그리고 너무도 위험합니다. 오르페우스가 정교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함으로 선원들이 사이렌의 거짓 노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 것처럼,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들을 인도하십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여 배가 난파되고 사이렌에게 잡혀 먹히지 않게 된 것처럼, 예수님은 진리로 오셔서 우리의 인생의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진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냐 하면, 예수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건축자가 반석위에 집을 세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는 것처럼, 우리들도 진리의 말씀, 생명을 주는 말씀, 행복을 주는 말씀을 듣고 행하여 지혜로운 인생의 건축자가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인생과 신앙에 있어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하고, 그 위에 집을 짓는데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짓는다. 그런데 불이 나면 그 지은 것이 어떻게 될 지를 말씀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이 나도 타지 않고 남아있지만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다 타버리고 말 것을 말씀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진리가 아닌 것이 무너지고, 진실이 아닌 것이 드러나고, 거짓과 가짜가 참패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진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진리위에 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중국에서 두 장애인이 도로에 이불을 싸고 누워서 구걸을 해서 행인들이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멀쩡하게 걸어가는 모습의 사진으로 인터넷에 올라와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지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사람의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돈 다발이 튀어 나오고, 두 다리 장애인 모습으로 지하철 입구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지하철 막차가 지나가고 나면 벌떡 일어나 걷고, 맹인으로 지하철 안을 돌며 구걸하던 사람이 지하철 종점역에서 눈을 번쩍 뜨고 거침없이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하철 종점역에 도착하면, 지하철 막차가 지나가고 나면, 저녁에 사람들의 왕래가 끊겨지고 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가짜가 영원히 진짜처럼 살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인생이 종점에 다다르면 가짜와 진짜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인생을 끝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 “너는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 이런 소리를 들을 사람도 있고, “어서 오거라!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모른다.”라는 소리를 들을 사람도 있고, “내 충성스런 종아, 잘 하였도다!”라는 말씀을 들을 사람도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의 날에, 인생의 종점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하나님께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뼛속 깊은 곳까지 그리스도인인 사람과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 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생명수를 마시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 이 땅에서는 진짜와 가짜가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있고, 가짜가 너무도 진짜처럼 행세할 때가 있지만, 종점에 다다르면, 인류 역사의 종말이 오고, 우리 각 개인의 인생이 종점에 도착하면,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던 인생이 진짜 인생을 살았는지, 가짜 인생을 살았는지 드러납니다. 가짜 인생은 헛사는 인생입니다. 헛것을 좇은 인생입니다. 허탄한 삶을 산 인생입니다. 행복의 모조품을 붙잡고 행복인양 산 인생입니다. 땀은 땀대로 흘리고, 열심은 열심대로 내고 살고, 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어떤 업적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그가 죽음 이후에 가는 길이 허무이고 끝이고 멸망이고 영원한 벌에 떨어지는 길이라면, 그는 잘못 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 영원한 생명,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허무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병원의 중환자실에 심방을 할 때가 있습니다. 중환자실에는 그야말로 중환자들이 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다가 병세가 호전이 되어 일반 병실로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환자실에서 인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 중에 의식이 없는 환자는 중환자실에 있는 것이 괴롭거나 고통스럽거나 견딜 수 없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식이 또렷한 환자들은 중환자실에 있는 것이 오히려 병세가 악화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병원이 악화되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힘이 들어 악화되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중환자가 갑자기 죽어 나가고, 옆에 있는 중환자가 고통스러워 신음소리를 내고 밤새 병과 싸우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의식이 또렷한 환자들을 그것이 정신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가 된다고 합니다. ‘나도 저렇게 죽는 것은 아닐까’ 라는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여 그로 인해 혈압이나 몸의 상태가 안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은 중환자실과 같습니다. 언제 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을지 모릅니다. 어느 목사님이 중환자 심방을 갔다가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고 합니다. “나의 죽음이 어떻게 찾아올까? 나는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게 될까? 몇 살쯤, 어느 계절쯤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준비할 텐데... 그런데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노환으로 죽게 될까? 생각지 못한 질병으로 죽게 될까? 아니면 돌연사고 일까? 호상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가족을 위로해 줄까? 또는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속마음으로 잘 가버렸다고 하지는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든 자신의 죽음이든 죽음에 직면해 보면,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절실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사람이 이 땅위에 사는 동안은 별 다른 구별이 없는 것 같을지 몰라도 죽음 앞에 서면 구별됩니다. 진실한 인생을 살았는지, 가짜 인생을 살았는지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본문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식물들의 생명과 다릅니다. 다른 동물들의 생명과 다릅니다. 죽고 끝나는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토록 모든 인생들이 찾고 원하는 생명입니다.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는 우리들을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삶을 유지하는 빛입니다. 생명의 빛은 참된 빛입니다. 생명의 빛은 어둠을 물리치며 길을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에 들어가는 사람 누구나 그 빛 속으로 데려가십니다.
  예수님의 빛은 마음이 굳어지고 어두워진 인류에게 비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비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빛을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의 임금인 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는 거듭나지 못한 인간, 구원받지 못한 인간을 의미합니다. 이 어두움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빛에 저항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무지, 죄,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를 가리킵니다. 그 결과, 혼돈과 무질서, 방향 상실, 어둠의 일들이 자행됩니다. 어둠의 세력들이 득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먼저 어둠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죄의 어두움이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빛으로 밝혀집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생각에 비치어지면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워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게 도와주십니다. 그 길을 따라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보여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 세리 삭개오가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헛된 욕망과 허무가 드러났으며, 마침내 짝퉁 행복을 버리고 진짜 행복의 길을 발견하였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죽이고 핍박하려고 가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강한 빛으로 찾아오셔서 사울을 만나시자 사울은 고꾸라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끝난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에게 찾아오시자 그는 고꾸라졌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짓을 하였는가? 를 생각했고 회심하였습니다. 앞으로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지를 깨닫고 결심했습니다. 잘못 잡은 인생길의 방향을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방 선교사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어둠속에 있는 자신에게 빛이신 예수님이 비춰지면 거기에는 발견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시편 119편 105절에 말씀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 인생길에 빛입니다. 빛은 우리에게 가야할 방향이 어디인지, 어느 곳에 무엇이 있는지, 내 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 어느 길로 가면 안 되는 지, 어느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떤 길이 넓은 길이고 어떤 길이 좁은 길인지를 밝혀줍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혼란스럽습니까? 잘 분별이 안 됩니까? 방향을 못 잡겠습니까? 무질서한 것 같습니까? 빛이신 주님을 마음에 모시십시오.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도록 마음속에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죄와 악을 분별하게 하시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강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왜 기다리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탄생이 왜 인류에게 기쁜 일일까요? 여러분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무슨 기대와 기쁨이 있습니까?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 성탄입니다. 예수님 안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는 언제나 진짜와 가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거짓과 가짜와 허상이 폭로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 때, 우리는 거짓과 가짜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 때, 우리의 삶이 복 받는 삶, 영원한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청지기 주일입니다.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고, 빛이신 주님을 믿는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죽음이 다가오기 전, 그 때 돼서야 후회하지 말고, 건강할 때,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주님을 위해 더욱 일하고 섬기는 청지기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011년 11월 2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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