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로마서 15장 12-13절) |
지난 15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나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가구주의 비중은 52.8%로 2년 전에 비해 2.1%포인트 축소된 반면 '나는 하층민'이라고 생각하는 비중은 45.3%로 같은 기간에 2.9%포인트 확대됐습니다. '일생을 노력하면 나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에 대해 '낮다'고 응답 한 사람이 58.8%로 절반을 넘었습니다. 여러 가지 설문 문항이 있지만, 조사 결과에 대해 결론을 맺으면, 국민의 대다수가 현재의 삶에 절망하고 있고, 미래에 대해서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국민이라는 말입니다.
모 신문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절망의 골짜기에 빠져 있다. 신문만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 절망적인 기사가 많다. 나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국민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 절망에 내몰려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하루에 36명이나 된다. 이들의 상당수가 감당할 수 없는 생활고 때문에 자살을 택했다. 경제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가, 물가, 원화가치가 함께 상승하는 3고(高) 악재가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절망이라는 바이러스가 더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요즘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개도 얼음을 물고 다닌다.” 북한에서는 마약을 얼음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니까 북한에는 개들도 마약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약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회 전반에 퍼졌고, 북한인민군에게까지 퍼졌습니다. 그래서 북한 당국이 마약 차단을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지만 너무도 깊숙이 광범위하게 마약이 번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이 주체사상이니 하면서 대단한 정신무장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들에게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소망이 없는 사회가 되었고, 그 사회적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으니 마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치하 때에 많은 지식인, 청년들이 술과 도박, 마약에 빠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 우리나라의 문화를 말살하고 무단정치와 민족 말살정치를 행할 때, 우리나라에 희망이 보이지 않고, 절망스러운 현실에 탄식하여 술과 도박과 아편에 빠졌던 때가 있습니다. 일본이 의도적으로 지식인과 청년들을 술과 도박과 아편에 빠지게 했습니다. 북한은 소망이 없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절망속에서 마약이 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절망의 사회가 되어버린다면,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다면 사회문제가 심각할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회의 절망은 심각한 사회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더취 시츠는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은 영혼의 감기에 걸리는 것과도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육신의 감기를 치료하지 않아 감기가 발전하면 우리의 몸을 죽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낙심, 절망이라는 영혼의 감기도 우리를 죽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이 절망이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낙심에서 우울로, 회의에서 냉소로, 슬픔에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으로, 체념과 두려움, 불신과 열정의 상실, 삶에서의 도피 등 수많은 마음의 병들이 생겨난다고 말했습니다.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감옥 속에 갇히게 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소망을 잃어버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은 잘해야 방관자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치닫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살다보면 억울하고 불쌍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버스를 탔는데, 96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잘못 봐서 69번 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가 사고가 나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불쌍한 사람은 69번 버스를 타고 가면서 피곤해서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가는 바람에 그 때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도 불쌍합니다. 졸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내릴 한 정거장 전에만 내렸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빅토르 유고가 쓴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레 미제라블’의 뜻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장발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징발장은 그 책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청년 장 발장은 너무도 배가 고픈 나머지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5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4번의 탈옥을 시도, 결국 19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중년이 되어 출옥합니다. 전과자라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에게 사랑으로 대해 준 성당 신부에 의해 장발장은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게 되어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사업을 하여 재산을 모으고 시장으로까지 출세합니다. 그러나 경감 자베르만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의 뒤를 쫓아다닙니다. 장발장은 변화된 모습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행복한 죽음을 맞습니다. 이 소설에서 장발장은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사랑에 눈을 뜨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변하여 더 이상 불쌍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화된 그를 용서할 줄 모르는 경감 자베르만이 오히려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 같지만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쌍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데 그의 인생이 불쌍한 인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불쌍한 사람인지 불쌍한 사람이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고 그런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영원한 삶을 보장 받지 못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소망은 ‘내게는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절망은 ‘내게는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망을 갖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갖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없는 사람이고, 인생의 목표가 없고, 삶의 방향이 없고, 그러므로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퀴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가슴에서 희망을 떼어 보라. 그는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하다.” 짐승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망을 품을 가슴이 없고, 소망을 담을 영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그 마음에 소망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만약 소망이 없다면 짐승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소망을 품고서 그 소망이 참 소망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소망이 있습니까?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12절 말씀은 이사야 11장 10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메시아 예언 말씀입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올 것을 예언하는 이사야 11장 1절 이하에 뒤따라 나오는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새의 뿌리”,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새의 뿌리라는 말은 다윗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의 혈통입니다. 이 메시아 예언 말씀은 이방인들 역시 메시아를 믿고 메시아에게 소망을 둘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소망으로 오실 것이고, 온 세상이 예수님께 소망을 두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성탄은 세상에 소망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소망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어둠과 불행과 절망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빛으로, 행복으로, 소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저주와 진노와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용서와 구원과 영생의 소망을 주십니다. 한숨과 탄식과 허무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평안과 기쁨과 참된 만족을 주시는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여러분이 품은 소망은 값싼 낙관론이 아닙니다. 낙관주의는 소망의 값싼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근거 없이 막연히 잘 될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소망을 둘 때,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무엇 무엇을 하리라, 무엇 무엇이 이루어지리라, 어떻게 어떻게 되리라”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소망의 근거가 되고,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참된 소망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소망입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죽음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이루신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소망, 살아있는 소망, 영원한 소망, 참된 소망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소망을 둘 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이라는 뜻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 속에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나와 함께 한다면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며 새로운 소망을 주겠다!” 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삶 속에 직접 행하심으로 우리의 삶에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 해야 할 것을 행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가 서로 다른 이들과 합력하여 하나 되게 하시고, 함께 선한 일을 도모하게 하십니다. 더 나은 모습을 이루도록, 더 나은 미래를 이루도록, 더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 소망을 둔 사람치고 실패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 사람치고 허무로 끝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둔 사람치고 불행으로 인생이 끝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3절에 사도 바울은 소망을 주신 하나님이 기쁨과 평강을 주시도록 축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올 수 있습니다. 현재를 위한 소망과 미래를 위한 소망은 성령으로 차고 넘칠 때에만 신자들 안에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내와 안위와 하나됨과 소망과 기쁨과 평안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시는 일을 완수하십니다. 소망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는 우리의 감각이나 경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십니다.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소망을 얻습니다. 새로운 소망, 흔들리지 않는 소망, 산 소망, 영원한 소망, 참된 소망을 얻습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소망을 얻습니다. 소망의 주님은 이 세상에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소망의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을 보시고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절망하지 않으셨으며, 만나는 모두에게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고, 수많은 사역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리고 오늘 우리들까지도 부르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에게 주님의 일을 맡기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 ~하리라” “~되리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베드로의 본래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은 반석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반석과 같은 인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실수하고 허물이 드러나고,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 받을 실 때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까지 했던 인물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소망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반석 같은 인물이 될 것을 믿고 소망했습니다.
이처럼 소망의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세상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시면서 세상 속에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택하신 사람에게서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그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팔려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소망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릴 소망을 보셨습니다. 요셉 또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살인 사건이 발각되자 광야로 도망쳐 40년 동안 양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서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실 소망을 보셨습니다. 모세 또한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며 광야에서 떠돌던 다윗에게서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을 소망하셨습니다. 그런 다윗도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상 속에서 불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소망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살리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도록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소망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시도록, 우리 또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을 가지신 것을 하나님의 비전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마음이라고도 하고,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품고 계신 우리를 향한 소망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넣어주셔서 우리로 행하게 하고, 이루게 하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소망을 예수님께 두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기에 나는 소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께 소망을 둡니다.
여러분, 우리가 슬프고 외롭고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슬프고 외롭고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면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고 소망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붙잡지 않는다면, 소망을 붙잡을 수 없다면, 소망 없이 살아간다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예수님 때문에 집과 가족과 땅을 희생하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백배로 돌려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희생하고 억울한 일, 핍박당하는 일, 손해 보는 일을 당한 뒤에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것이 있기에, 즉 소망이 있기에 인내하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주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인내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기다립니다. 소망이 있기에 충성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헌신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희생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이 소망은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근거 없는 바램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쉽게 허물어지는 소망이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예수님은 소망의 창고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옷장처럼, 우리가 날마다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하듯 우리에게 필요한 소망의 옷을 제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주유소처럼, 자동차가 달리기 위해서 기름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의 에너지인 소망의 기름을 공급해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의 나의 모습이 어떠한 가? 보다 지금 나에게 소망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좋은 집에 살고 있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느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참된 소망이 있느냐? 입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면서 소망이 없이 하루를 시작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해를 맞으면서도 소망이 없이 새해를 맞는다면 불쌍한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영원한 세상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불쌍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소망이 없는 사람, 거짓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 영원한 산 소망이 없이 오늘도 이 세상 것으로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소망을 이루며 영원한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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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8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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