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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빛 (ii)  [2946]
· 설교 일자 : 2012년 01월 22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15장 14-16절 말씀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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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의 빛 (ii) (마태복음 15장 14-16절 말씀)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먹게 된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설날이 내일입니다. 오늘은 주일이면서 누구의 설날입니까? 까치의 설날입니다. 요즘에는 설날을 맞으면서 집에서 떡을 썰어서 떡국을 끓이지 않고, 대개 방앗간에서 만들어 썰어놓은 떡을 사다가 끓여 먹는 것 같습니다.
  떡을 써는 것으로는 명필 한석봉 어머니가 유명합니다. 원래 한석봉 어머니는 공부하러 집을 떠났다가 중도에 돌아온 아들에게 불을 끈 상태에서 글을 쓰라고 하고, 자신은 떡을 썰었습니다. 그 결과 삐뚤삐뚤한 석봉의 글씨와 떡 썰기 달인인 어머니가 썬 떡의 모습은 완전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석봉은 산으로 들어가 글을 쓰는 수련을 하여 나중에 명필이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석봉과 어머니라는 유머가 있습니다. 한석봉은 변함이 없는데 그 어머니가 여러 가지 상황의 어머니로 변한 유머입니다. 칼질이 서툰 한석봉 어머니는 석봉이가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하니까 “아니 벌써 돌아오다니... 그렇다면 네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보자꾸나. 불을 끄고 너는 글을 쓰도록 하거라. 나는 그 어렵다는 구구단을 외우마” 그랬답니다. 피곤한 한석봉 어머니는 석봉이가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자, 그렇다면 불을 꺼 보거라.” 석봉이 “글을 써 보일까요?” 어머니는 “글은 무슨 글...어서 잠이나 자자꾸나!” 그랬답니다. 아들에게 무관심한 한석봉 어머니이야기,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언제 나갔었느냐?” 혼돈하고 있는 한석봉 어머니 이야기,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랬더니 석봉이 어머니 “시험을 해보자꾸나! 불을 끄고 너는 떡을 썰어라. 나는 글을 쓸 테니...” 겁 많은 한석봉 어머니 이야기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자 그렇다면 난 떡을 썰테니 넌 글을 써 보도록 하거라.” 한석봉이 “어머니, 불을 꺼야하지 않을까요?” 어머니 “불 끄고 떡 썰다가 손을 베면 네가 책임지겠느냐?”
  이 유머는 중심이 흔들리고 제 역할을 못하는 부모의 모습을 빗댄 유머입니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떡 써는 달인의 모범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석봉을 새롭게 채찍질하고 도전케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만약 한석봉 어머니가 중도에 돌아온 아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유머에 나온 모습처럼 헤맸다면 한석봉을 명필로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잃고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3-16절에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세상속에서 어떤 역할, 어떤 사명을 받은 사람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금이나 빛이나 세상 속에서 아주 소중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런 존재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상의 빛’을 말씀하면서 예로 등불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빛을 밝히는 물건을 말할 때, 등불을 예로 드는 것이 당연하고 가장 일반적인 예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창문이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반 가정집의 내부는 어두웠습니다. 대개 등잔불이 최고의 조명이었습니다. 기름 값은 쌌고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에 등불을 켜 놓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꺼진 등잔에 불을 붙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보통 등잔에 항상 불을 켜 두었습니다. 불을 켜서 가리거나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재채기 나오는 것은 숨길 수 없다고 합니다. 또 가난도 숨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모습은 숨길 수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켜진 등불의 빛도 숨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빛은 사람들 앞에 착한 행실로 비치는 빛입니다.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면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빛을 비출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착한 행실을 행하는 것이 곧 빛을 비추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난주에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빛깔로 빛을 비추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하나님의 빛깔이란 진리의 빛일 수도 있고, 생명의 빛일 수도 있고, 사랑의 빛일 수도 있고, 소망의 빛일 수도 있습니다. 그 빛깔을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착한 행실이라는 빛깔로 비추라고 말씀합니다.  
  진리를 따라 사는 선한 행동으로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세상의 빛을 비추어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가로등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행실의 삶으로 어둠으로 인해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이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앞절 13절에서 소금을 말씀하시면서 착한 행실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에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을 비추는 것을 착한 행실로 적용시켜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소금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말씀이라면, 빛은 착한 행실에 관한 말씀입니다. 착한 행실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책임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빛은 많이 있어도 좋지만 소금은 있어야 할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더 이상 녹을 필요가 없고, 녹을 만큼 녹은 뒤에는 더 이상 녹지도 않습니다. 물에는 39%이상 녹지 않습니다. 소금은 적정량이라는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소금이 적정량의 원칙을 무시하면 소금은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못 먹는 음식을 만듭니다. 지나치게 소금을 섭취하면 심각한 질병이 생깁니다. 그러나 빛은 밝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은 적정선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은 녹아져 드러나지 않고, 빛은 드러나는 것인데, 연달아 하신 이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처신하라는 뜻일까요? 그 때 그 때 다르게 하라는 뜻일까요?
  우리가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 속에서 녹아져 그 책임을 다하고, 역할을 다하여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빛을 비추어 착한 행실을 하여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마태복음 6장 3, 4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과 서로 부딪히는 말씀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6장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느냐하면,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가 얼마나 의롭게 사는 지를 드러내려고 하여 경건의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빛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두 구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착한 행실을 통해 누가 영광을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하여 구제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모르게 어떤 사람에게 구제를 하면 금방은 다른 사람이 모르겠지만, 구제가 계속 될 때 세월이 흐르면 숨겨지지 않습니다. 나쁜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것처럼 선행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드러납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의 삶입니다. 입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실로, 사랑의 실천으로, 의로운 삶으로 드러납니다.
  착한 행실은 마음의 동기가 핵심입니다.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는 데 있어서 마음의 동기가 핵심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고,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착한 행실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말을 듣고 자기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제하고, 기부하는 것이 사회에 좋은 일을 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추구하며, 결국 세금 감면도 받기 위해 착한 행실을 하는 사람이나 기업도 있습니다.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한 행위입니다. 자기 얼굴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얼굴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못해 선행을 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마음의 동기가 좋지 못한 선행은 순수한 선행, 순수한 사랑, 순수한 베품과 나눔이 아닙니다.
  여러분, 후레쉬 즉 손전등이나 야간에 야외 활동할 때에 필요한 큰 손전등 랜턴으로 장난을 쳐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장난이 오늘 말씀에 재미있는 비유가 될 수 있습니다. 손전등을 캄캄한 밤에 앞을 향해 비치면 길을 찾아 갈 수도 있고, 어두운 곳을 비추어 야간 활동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 손전등으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 보는 사람에게는 무슨 귀신 모습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16절에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는 말씀의 뜻은 자기 얼굴을 드러내어 비추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비추라는 뜻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선행을 하면 그 결과가 추해집니다.
  소금이나 빛이나 모두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하여 소금역할을 하느냐? 누구를 위하여 빛의 역할을 하느냐?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삶이 미치는 영향은 숨겨지거나 은밀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보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숨기지 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수 있도록 겸손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빛의 방향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비추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나 믿음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착한 행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선하심과 긍휼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착한 행실을 행할 때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여러분에게 돌리게 하는가?” “나를 나타내려고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빛인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세상 속에서 빛을 비추어야 하는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같이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그들이 어떻게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착한 행실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선하고 의로운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비추는 삶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하며 포기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하는 모습을 사람 앞에 보일 때, 착한 행실을 행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신령한 것이고, 무엇이 유익하며 덕을 세우는 것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나타내는 행실을 행할 때,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보다 하고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의 시작이면서 중심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게 된다면 하나님을 높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이란, 단순히 행동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말로, 표정으로, 손짓 발짓, 행동으로, 그리고 우리의 몸과 자세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를 모두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8 ,9절 말씀,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는 생각, 마음, 표정, 말, 행동, 삶이 착한 행실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볼까? 저렇게 인생길을 걸어가야 하는구나, 바로 저렇게 살아야 겠구나! 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들을 보니 이 세상이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구나, 소망이 있구나! 이런 생각과 다짐을 하게 하는 것이 세상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세상에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진정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빛인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속적이고 충만한 빛을 공급받을 수 있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착한 행실을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왜 착한 행실을 하느냐고 시비 걸지 않습니다. 착한 행실을 기대합니다.
  여러분, 요즘 사회가 교회에 대해 질타하는 것은 그래도 교회를 향한 기대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기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기대도, 비판도,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만약 사회가 교회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비판도, 질타도, 관심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회복지 사역의 80%를 기독교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나 불교와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사회에서 이미지가 왜 그렇게 나쁜 것일까요? 영화 ‘도가니’로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분명 우리나라 교회가 잘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쓰는 교회가 사실 더 많습니다. 혹시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잃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닙니까? 부정한 짓을 하고, 상식에 벗어나고, 양심까지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세상의 교회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술집이 일찍 문을 닫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상식적인 사람은 그런가 보다 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술집이 일찍 문을 닫았는지, 열었는지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술집이 이웃에게 선행을 하지 않는다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교회가 교회로 보이기 때문에 교회에 기대를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달라고 강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판과 요구는 불을 켜지 않으니까, 빛이 비춰지지 않으니까, 불빛이 깜빡깜빡하니까, 목소리를 높여서 거칠고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말로 교회를 향하여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기대하고 있다고, 교회가 역할을 잘 해 달라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달라고. 어둠의 세상에 빛을 비추어 달라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에드 영은 [고품격 크리스천]이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은 고품격 삶의 핵심요소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사회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갈 때 고품격 인생, 고품격 크리스천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맛보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를 보게 되는 것, 이런 삶이 고품격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고품격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소금이 맛을 잃지 않아야 한다면, 등불은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등불을 켜 놓았어도 세찬 바람이 불어 꺼진다든지, 기름이 다 떨어져 꺼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어둠의 세상 속에서 나 혼자만의 빛으로 세상을 온전히 밝힐 수 없습니다.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빛을 비출 때 세상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어둠이 물러갈 수 있습니다. 내 몫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성도 한 사람이 독일의 시골을 여행하다가 작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예배당은 좁고 초라했으며 예배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불하나 켜지 않고 어두컴컴한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여행자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예배 시간까지 그 교회의 안내인의 집에서 기다렸습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어 안내인을 따라 교회로 행했습니다. 교회 마당에 들어서자 마을 여기저기에서 성도들이 등불 하나씩을 들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 안은 아름다운 등불로 가득했고 제단 뒤에 걸려있는 십자가는 그 등불들 때문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또 사람이 점점 많이 모여들면서 서로를 분별할 수 있었으며, 인사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의자 앞에는 ‘안나’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는 ‘안나’라는 할머니가 병환으로 교회에 나오지 못해서 자리가 하나가 비었다는 것입니다. “자리 하나가 비게 되면 등불 하나도 비게 되지요. 그리고 교회당은 그만큼 어둡게 되고요. 그러면 그만큼 예수님의 모습이나 십자가도 어두워지게 되고, 서로를 아는 데도 더 장애가 되지요.”라고 교회의 안내인이 말했습니다.
  인도의 어느 사원에도 놋쇠로 만든 커다란 등잔걸이가 천정 중앙에 달려있고 예배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밤길을 걸어올 때 들고 온 램프를 등잔걸이에 걸어 놓는답니다. 그러면 캄캄했던 사원이 예배자가 한 사람씩 늘어날 때마다 밝아지고 등잔걸이에 램프가 가득 차게 되면 사원 안은 한낮처럼 환해집니다. 우리 모두도 각각의 빛을 비추면 됩니다. 큰 빛, 거창한 빛을 비추어야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몫의 빛을 비추면 됩니다. 우리가 더 밝은 빛을 비출 수 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밝기의 빛을 비추면 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등잔불을 켜고 함께 빛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까? 아니면 바람으로 등잔불을 꺼뜨리는 사람입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을 비추는 사람입니까? 세상에 어둠을 만드는 사람입니까?
"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명절에 가족, 친척들 가운데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착한 행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012년 01월 22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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