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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경건하여  [2538]
· 설교 일자 : 2012년 01월 29일
· 본문 말씀 :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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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경건하여 (사도행전 10장 1-8절)
  큰 회사 사장이 공항으로 나가다가 밤샘 근무를 마친 정문 경비원을 만났습니다. 경비원은 다짜고짜 사장에게 인사를 하더니 어제 밤 꿈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꿈의 내용은 사장이 타고 갈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폭발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장은 여행을 연기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꿈은 적중했습니다. 그 항공기는 정말 이륙하자마자 추락했습니다. 사장은 그 경비원을 불러다가 거액의 사례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를 해고했습니다. 경비원이 억울해서 사장을 찾아가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사장님, 제가 꿈을 알려드려 목숨을 구했는데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사장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비행기가 폭발하는 꿈을 꾸어 내 목숨을 구한 것은 고맙네만, 당신의 임무는 경비하기 위해 밤새 깨어있었어야 하는 것인데 잠만 자느라 꿈을 꿨으니 해고하는 게 당연한 것이오.” 경비원의 임무는 꿈꾸는 것이 아니라 깨어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무슨 신비한 것으로만 생각하여 꿈이나 해몽해 주고, 미래를 맞춰주고, 사고 날 일을 피해가도록 해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복적 미신적인 신앙의 형태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한테 가서 그런 것이나 알고 싶어 하는 경우이지요. 신앙의 기본은 일상적인 삶에서 신앙이 드러나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역할, 자기가 해야 할 일, 자기의 직업과 삶의 현장에서 성실과 진실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 삶이 곧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고넬료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고넬료라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 사람으로 이스라엘 땅 가이사랴라는 도시에 배치된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수하에 1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군인입니다.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로 속국에 주둔한 군인이 피지배국민들을 향해 억압과 착취와 강경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경건한 사람이라는 명성과 함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고넬료의 직업이나 국적이나 신분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 고넬료가 어떤 사람인지를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둘째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셋째는 그는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고, 넷째로 그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인 그를 경건한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그 표현 속에는 고넬료가 회당에 올라가고, 유대법을 따르는 이방인이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실천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이었고, 지배하기 위해 주둔한 군인 간부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를 존경한다고 하면 그것은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넬료가 로마 사람으로 이스라엘에 주둔한 군대 간부로써 사람들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힘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기 보다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경건입니다. 그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 속에서의 소금과 빛의 역할,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세상 속에서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께로부터, 성령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소금의 맛을 잃지 않도록, 빛이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날 수 있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 답은 경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그랬고,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그랬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그랬습니다. 경건 생활을 통해서 그들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품과 모습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경건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능력 또는 실재를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27절에 참된 경건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세속에 물들지 않고 어려운 중에 있는 자를 도와주는 태도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삶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경건생활이라고 하며, 이런 신앙생활 훈련을 경건훈련이라고 합니다.

  경건 생활은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바르게 하는 생활입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건강의 문제를 치료받기 위해서 의사를 만나면, 모든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환자들에게 처방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식습관, 생활습관, 운동습관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안 먹거나, 잘못 먹거나, 이상한 것을 먹으면 병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생활 습관이 불규칙하고 나빠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기만 하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병이 생길 수밖에 없고 몸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인 식습관, 생활습관, 운동습관부터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도 영적 식습관, 영적 생활 습관, 영적 운동 습관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 생활입니다.

  경건 생활의 기본은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입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증거중의 하나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17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을 받아 경건해 질 수 있고,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는 기도를 통해서 경건한 삶이 가능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며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신앙이 건강하다는 증거이며,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몸에 이상이 생겨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병에 걸리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입맛에 문제가 생깁니다. 입맛이 없어지거나,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건강한 사람은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밥맛이 좋습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그러니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밥을 먹고, 음식을 섭취하여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체중이 줄고, 몸이 마르고, 혈색도 좋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의 건강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건강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서 소화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영혼이 건강해지려고 하고 성장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기 위해 마음을 쏟습니다. 그래서 영적 건강이 회복이 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합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이 식욕이 왕성해지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건강과 성장의 모습은 우리의 몸의 건강과 성장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건강 상태를 일차적으로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먹고 있느냐,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마음속에서 묵상하고 있느냐를 보면 영적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데도 아무런 증상도, 깨달음도, 영적 민감성도 없다면 이미 여러분의 영혼은 영적 중환자실 가기 직전입니다.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했습니다. 경건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기도 중에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만나 주셨고, 베드로를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습니다.
  육신의 질환과 건강의 문제는 몸으로 드러나니까 다행이지만, 영혼의 질병과 영적 건강의 문제는 당장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음으로 더욱 자각 증상을 못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 삶의 문제를 만나고, 인생의 장애물을 만나고, 고난과 시련과 환란이 닥쳐오면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 때서야 영적인 관리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만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호주에 사는 한국에서 이민 간 목사님의 집 마당에 몇 백 년 된 훌륭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풍이 불어와 그 나무가 쓰러져 뿌리 채 뽑혔습니다. 뿌리 채 뽑힌 나무가 그 목사님 집 지붕으로 쓰러졌는데 다행히 옆의 작은 나무를 먼저 치고 지붕을 덮친 것입니다. 그 옆의 다른 작은 나무가 없었더라면 그 거대한 나무가 집을 덮쳐 큰 일이 날 뻔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백 년 된 나무가 뿌리가 뽑혀 뿌리를 드러냈는데 뿌리가 너무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있는 몇 백 년 된 나무라면 뿌리가 엄청나게 많을 텐데 왜 그럴까요?
  물론 나무의 종류의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 년 내내 적당히 지속적으로 비가 오는 지역의 나무와 우리나라처럼 1년의 강우량이 장마철에 집중되어 있는 지역의 나무는 생존을 위하여 뿌리를 내리는 것이 다르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우기가 아닐 때에, 즉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긴 시기에는 땅 속의 수분을 흡수하기 위해서 나무들이 뿌리를 땅 속에 깊이 내리고 넓게 뻗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태풍과 같은 강풍에도 견디려면 뿌리를 깊게 넓게 박습니다. 그런데 호주와 같은 나라는 비가 자주 내려주니까 나무가 뿌리를 깊게 넓게 내리지 않아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수분을 흡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몇 백 년 된 나무의 뿌리가 깊지 않고 넓게 뻗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강풍이 부니까 쉽게 뿌리 채 뽑혔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지 눈치를 채셨습니까?
  경건 생활은 나무로 말하면 뿌리를 내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나무가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거나, 뿌리를 깊게 그리고 넓게 뻗지 못하면 그 나무는 비가 내리고 문제가 없을 때에는 살아 있을 수 있지만, 가뭄이 오고 강풍이 불면 그 나무는 반드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메말라 죽든지, 뿌리 채 뽑혀 쓰러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예배시간에 성시교독 한 시편 1편 말씀에, 복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바람에 날아가는 겨로 비유를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뿌리를 시냇가에 깊게 넓게 뻗어 가뭄에도 수분을 빨아들이듯, 경건한 사람은 평상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열심히 먹습니다.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합니다. 실천합니다.
  경건 생활은 평상시에 꾸준하게 하여 인생의 중요한 일들, 고난과 시련과 환난을 견디고 이겨내기 위한 훈련이며, 건강한 영적 생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맑은 날, 좋은 날씨만을 위해서 집을 짓겠지만, 그래서 비가 쏟아지고 창수가 날 때를 생각지 않고 집을 짓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맑은 날에도, 따뜻한 날에도, 아무 일도 없는 날에도 비바람이 불어 닥치고 창수가 날 때를 대비하여 반석위에 집을 짓습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기 위해 고넬료처럼 말씀 생활과 기도생활의 경건 생활을 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생활의 중요한 기초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일예배를 거룩히 드리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듣고 지키려는 사람을 향해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넬료는 처음에 안식일을 지키다가 예수님을 믿고 주일을 잘 지켰을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은 경건 생활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교회 교인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엄격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얼마 전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자신이 쓴 책을 선물로 받아 읽다가 보니까, 우리나라 교회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율법적으로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 썼는지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토요일 저녁에 수염을 깎다가 밤 12시를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들리니까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다고 반만 깎고 중단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왜 밤중에 수염을 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주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된다고, 수염 깎는 일도 일하는 것으로 취급했나 봅니다. 주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주일에 빨래를 널다가 당회에 불려가서 혼이 나기도 했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말려 놓은 생선을 뒤집다가 교회 집사 직분이 박탈된 사람도 있었답니다. 주일에는 돈을 쓰면 안 된다고 하여 아무리 먼 거리도 걸어서 교회에 다니게 했습니다. 차를 타려면 돈을 내니까 돈을 쓰는 거라고 금했고, 배가 고파도 돈을 쓰지 않으려고 식당에 들어가 밥을 사 먹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회는 주일에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느냐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이 벌어졌는데, 그 토론의 결론이 어떻게 났느냐 하면, “가급적 사먹지 않는 것이 좋지만 꼭 사서 먹어야 한다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가서 사 먹으라” 였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당회에서 안건으로 교회 안에 커피 자판기를 들여 놓자는 의견이 나오자 다른 장로님이 ‘교회가 세속화 되어 교회 안에서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상거래를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고 탄식하는 바람에 그 의견을 낸 장로님이 졸지에 세속화 된 장로님이 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습니다. 요즘도 그렇게 지키라고 하면 다들 못한다고 손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안식일의 계명에 대해 너무 자유스러워진 나머지 안식일 계명의 목적과 핵심까지도 다 쉽게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의 뜻을 바르게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에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 보다 더 우선적인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안식일이라는 계명으로 속박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리며 가치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열매 맺는 일을 하고 안식일에는 안식하라는 뜻입니다. 주일에 안식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이며 중심은 예배생활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예배를 온전히 드립니다.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산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예배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한 예배자를 그냥 간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베드로를 만나게 하셨고,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케 되었으며, 온 가족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친척과 그의 친구들이 모두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방언을 말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이며 중심은 주일예배를 거룩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통해 안식과 재창조와 회복과 재충전의 은혜를 받아 누리기 위함입니다. 또한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우리 삶의 7분의 1을, 즉 일주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드리는 신앙의 자세와 실천을 통해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고, 주일예배를 거룩히 드려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입니다. 이것은 기본이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기본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있느냐를 보면, 영적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경건 훈련이 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있느냐를 보면, 한 주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으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예배를 준비하여 드리는 것, 예배에 지각하지 않는 것, 예배에 집중하는 것, 예배에 대해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것 등은 주일예배를 거룩하게 온전하게 드리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또 예배시 찬송을 부를 때 찬송을 통해 은혜를 받는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들을 때의 자세가 어떤지, 말씀이 귀에 들리고, 가슴 속에 말씀이 박히고 새겨지는 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기쁘게 헌금하는지,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점검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일예배는 작전 타임과도 같은 시간입니다. 여러분, 배구나 농구와 같은 경기를 보면 감독들이 작전 타임을 요청하여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벤치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작전을 지시합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잘못되었다든지, 작전을 변경해야 하든지, 선수들에게 숨을 고르게 하여 템포를 조절하거나 파이팅 하도록 힘을 불어넣어주어야 할 때에는 어김없이 양쪽 감독들이 작전타임을 요청하여 시간을 갖습니다. 그 작전타임을 잘 활용하는 팀은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승하기도 합니다. 주일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영적 작전 타임을 갖는 것입니다. 삶의 작전타임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은 감독의 평가와 지시와 경기 전략의 변화에 귀를 기울여야 하듯 신앙인들은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에 마음과 영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타성에 젖어 교회에 왔다가 예배시간에 졸다가 집으로 가버리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일예배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사죄의 확신을 얻어 영혼이 죄책감과 죄로부터 짖 눌리지 않고 자유를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양식을 얻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지금 바르게 살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나요?’라고 묻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삶의 자세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발견하고,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뒤 바꿔지지는 않았는지, 진행하고 있는 일과 계획하는 일을 수정하고 재정비해야 합니다. 삶의 방법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신앙의 방법을 예배하는 가운데 회복하고,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은혜를 받아 가정에서, 세상에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예배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여러분을 속박하는 날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진정으로 안식하고, 회복되고, 재충전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시기 바랍니다. 주일예배를 거룩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경건 생활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기도생활을 쉬지 않음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여 사람들에 존경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1월 29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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