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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  [3243]
· 설교 일자 : 2012년 02월 19일
· 본문 말씀 : 사도행전 10장 1-8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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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 (사도행전 10장 1-8절)
  “밥맛 나는 사람” 50대 후반의 모 장로님을 두고 사람들은 그렇게 부릅니다.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복 받게 생겼다’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아주 맛있게, 감사하게 먹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습니다. 반찬이 많든 적든 맛있게 밥을 먹는 소년을 두고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어느 날은 이웃에 사는 고모가 불렀습니다. 집에 갔더니 방 안에 몇 가지 반찬과 밥이 놓여 있었습니다. “자, 어서 먹어라.” 소년은 고모가 같이 드시는 줄 알았는데, 고모는 씽긋 웃기만 하면서 혼자 맛있게 먹으랍니다. 소년은 이유를 몰랐으나 배가 고픈 터라 혼자 먹어치웠습니다. 소년이 맛있게 다 먹고 나자 고모가 비로소 수저를 들며 말했습니다. “이제야 입맛이 도네.” 알고 봤더니 고모는 입맛을 잃고 지내다가 조카를 생각하고 그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년의 ‘식성’은 ‘입맛’용이었습니다. 그것은 고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소년은 고향 원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정착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사는 그에게 신앙은 절대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척박한 시대에서도 그는 믿음의 꿈을 잃지 않고 인생과 신앙을 경작하며 살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신앙생활 한 그에게 ‘장로’라는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장로 장립을 받던 날, 그에게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입맛 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닌가! 이제 장로인데 단지 즐거운 식사의 대상만으로 남을 수는 없다. 그래, 장로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살맛’나게 해주는 주님의 종이 되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살맛’을 느낀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있으랴. 이게 장로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그는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아끼던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최대한 경건하게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 그를 보면 정말 ‘살맛’납니다. 그는 이제 ‘밥맛 나는 사람’, ‘살맛  나는 사람’ 두 가지 애칭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까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요? 밥맛없는 사람, 자기만 하는 사람,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으로 불려지고 있지는 않겠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넬료라는 사람은 유대 땅에 주둔한 이방 군인으로 유대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복음 전파와 구원의 역사속에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시고, 베드로를 청하게 하시고,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의 가정과 친척들과 친구들이 구원받도록 하신 일에는 그렇게 하실만한 동기가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고넬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천사가 고넬료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4절에,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실만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주목하셨다”고 번역했습니다. 고넬료의 기도생활과 구제하는 삶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고넬료를 기억하셨습니다. 마음에 두셨습니다. 주목하여 고넬료에게 무엇을 해 주실까?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진두지휘하셔서 일을 이루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는 말씀이 나올 때, 그 속에 담긴 뜻은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셨다, 외면하지 않으셨다, 버리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다, 도와주셨다, 응답해 주셨다, 구원해주셨다, 선한 뜻을 이루셨다는 내용이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기억하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구원하셨습니다.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구분을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 그릇을 준 것까지 기억하시고 상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하나님은 참 별걸 다 기억하시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별걸 다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다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응답을 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심판의 날에는 가려진 것, 숨겨진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는 다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기억을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죄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3장 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8장 12절, “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용서받은 여러분의 죄를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기억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일을 알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 일들 중에 구제한 것,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어주고 돕고 선행을 행한 것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4장 31절,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상적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존재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며,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셨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주목하셨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맡겨진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구원의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기억되는 사람이 되시기 원하십니까? 고넬료처럼 구제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구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는 존재로 대하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상대에 대한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배려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관대함, 한 인격으로의 존중 등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구제, 온전한 선행, 풍성한 사랑이 실천됩니다. 톨스토이가 어느 날 길에서 거지의 구걸을 받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선을 베풀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으나 그날따라 동전 한 푼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톨스토이는 거지에게 미안한 말을 전했습니다. “형제여, 마침 한 푼도 가진 것이 없으니 정말 미안하오.” 그러나 거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돈이 문제입니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훨씬 더 값진 것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으니까요.”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구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부자의 의무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신 것은 우리들도 그 사랑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주셨습니다. 여러분, 잠간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무 조건 없이 구원해 주시고, 지속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우리가 잘 나서입니까? 받을 자격이 넘쳐서 입니까? 우리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이 없어서 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가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베풀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나만 사랑을 받고, 나만 복을 받아 누리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오해 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거슬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구상에 있는 자원은 아직 땅 속에 있든, 땅위에 있든, 지금 사용하고 있든, 앞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든 간에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눠 사용해야 하고, 앞으로 우리들의 후손들도 또 함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가 많이 가져가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만큼 적게 가져야 합니다. 한쪽에서 밥을 많이 먹으면 다른 쪽에서 그만큼 밥을 적게 먹어야 하지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공산주의가 생겼지만 실패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제도만으로 나누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자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의무를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8절에,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바로 부자들에게는 세상 끝날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했는지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뉴스에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아 체납자 명단에 오르고, 국세청에서 방문하여 조치를 취할 때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세상에 그런 쫌팽이, 수전노, 파렴치한 인생이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쌍하더군요. 그렇게 인생을 살아서 뭐하나...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은 거지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 빈부가 갈등하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맹점은 자본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고,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빈부의 갈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만들어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이웃에게 베푸는 일은 사회의 범죄를 줄이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자칫 잘못 들으면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이웃들이 범죄자라는 뜻으로 듣지 마십시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그 말은 사회에 대한 빈부격차로 인한 강한 불만을 표현한 말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움이 극에 달하면 사람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환경이 나쁜 마음을 먹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들을 다 배고프게 살지도 않고, 편안하고 넉넉하게 사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하면서 사회에 대해 불만을 품거나,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훔친다든지, 빼앗는다든지, 범죄를 통하여 부를 획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나눔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외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따뜻한 사랑을 통해서 “세상은 아직 따뜻하구나!,세상은 아직 살만 하구나!, 희망을 가져도 되겠구나!, 나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지.”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의 사랑 때문에 용기와 희망을 갖습니다.
  여러분, 통큰 기부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통큰 기부가 사회 갈등을 해결합니다. 작은 기부와 구제도 중요하지만 통큰 기부를 통해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큰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단을 설립하고 체계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자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더 나아가 세계에서 랭킹 100위 안에 들어가는 갑부가 나와 통큰 기부를 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물질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구제하고 선행하고 기부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는 사람에게 더 큰 복을 주십니다.  

  구제는 복의 통로입니다.
  고넬료는 구제를 많이 함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가족, 친척, 친구들까지 구원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그 이후의 고넬료의 삶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 전체의 말씀을 통해 볼 때, 고넬료는 많은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구제하는 목적이 내가 복을 더 많이 받으려는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제가 무슨 투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얼마만큼 구제하는 투자를 하면 하나님께서 그 구제투자를 통해 얼마만큼 이익을 보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계산하여 하는 구제는 진정한 의미의 구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잠언 22장 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잠언 11장 24,25절에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누가복음 6장 38절 상반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베풀고 나눠주는 이에게 복을 더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복은 물질의 복만이 아닙니다. 복 중의 가장 낮은 복이 물질의 복입니다. 물질의 복은 복으로 받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연결이 되면 오히려 다른 복을 오염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복은 다양합니다. 평안의 복, 정신적인 복, 재능의 복, 신령한 복, 인간관계의 복, 사회적인 복, 자손의 복을 받습니다. 시편 37편 26절에는 은혜를 베풀고 주는 사람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구제를 하면, 사랑을 실천하면 건강의 복을 받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 IG-A(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를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본 뒤에 IG-A(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IG-A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랑과 연결될 때 병균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진다는 연구결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영화만 보아도 병균 저항력이 강해진다는 데 직접 사랑을 실천하면 더 더욱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뉴욕 데일리 뉴스는 예방 의학 전문가 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의 연구를 보도하였습니다. 그는 건강을 위하여 보통 말하는 건강 음식, 규칙적인 운동,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술, 담배, 과로, 과식, 수면부족) 등 세 가지를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한센 박사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몸도 행복해진다는 것이고, 건강해 진다는 것입니다.
  받는 기쁨도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주는 기쁨은 받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주는 기쁨을 누릴 때에 우리 몸 안에는 엔돌핀이라는 좋은 호르몬이 나오고, 내가 베풀 때 받는 사람이 좋아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할 때, 나의 작은 구제나 선행이 그의 인생에 희망의 빛을 비추어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의 그 감격은 우리 몸에 엔돌핀의 몇 배인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나옵니다. 엔돌핀의 최고 4000배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삶의 활력이 없습니까? 우울증이 있습니까? 삶이 허무한 것 같습니까? 몸에 지병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베풀고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더 열심히 나누고 베풀고 사랑할 수 있도록 건강의 복을 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마태복음 5장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사랑으로 선행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풍성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의 복, 영혼의 복, 건강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실천을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일’ 한다고 말합니다. 선행을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구제, 돌봄, 나눔, 베품, 대접, 자선, 기부, 후원, 봉사, 섬김을 행할 때 좋은 일을 한다고, 선행을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은 전도에, 선교에 중요한 기초입니다. 사랑 없이 말로만 전도하니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희 교회는 사회봉사부가 지역의 영세민, 소년소녀 가장, 어려운 가정을 매월 돕고 구제를 해왔습니다. 금년에는 13개의 사회복지 단체를 후원하고 있고, 양정동사무소와 연계하여 지역주민에게, 그리고 양정초교, 양동초교, 동의중의 학생들 60명에게 사랑의 쌀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지 시설 방문, 경로당 방문, 그 외에도 특별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 동아리 ‘사랑의 도시락’은 사랑의 반찬을 만들어 독거노인, 극빈자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연탄을 전달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지역교회로서 지역을 섬기는 사역으로 유치원, 경로대학, 아기학교, 도서관 사역, 양정문화교실을 운영하며 지역속의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역에 총합계 년 간 1억 원이 넘는 예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 교인들이 남 모르게 사랑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그동안 섬김과 구제 차원의 활동을 하던 우리 교회가 사랑의 천사 사역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랑의 천사 사역은 생명을 살리는 세상의 빛이 되는 사역입니다. 심장 수술, 소아암, 개안 수술 등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지역민, 또는 교회 밖의 대상을 찾아 그들을 살리고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사역입니다.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여 죽게 되거나, 평생 맹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분들에게 사랑의 도움을 주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은 온 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사역입니다. 유아부에서부터 장년에 이르는 전 교인이 함께 참여하는 사역입니다. 1004개로 구성된 퍼즐판을 게시하여 놓고 사랑의 천사 사역에 참여하고 싶은 교우들이 1004개의 퍼즐 조각 1개당 1만원씩 사랑의 천사사역위원회로부터 구입하여 퍼즐을 맞추어 모든 그림이 완성이 되면 1004만원으로 선정된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입니다. 기념될 만한 일이 있을 때, 감사할 일이 있을 때, 가정 예배 시 헌금, 동전 모으기, 각각의 사랑의 실천으로 퍼즐을 구입하여 맞추는 일에 동참하면 됩니다. 기관에서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은 우리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구청, 밀알재단, 병원, 신문사 등과 연계하여 사역을 실천하고 보도도 할 예정입니다.
  우리교회는 우리교회와 규모가 비슷한 다른 교회와 비교하여 구제헌금, 재해구호 헌금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재해헌금이 300만원하면, 우리교회는 450만원합니다. 약 1.5배 정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교인들이 부자가 많으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월급을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업하는 분들도 중소기업 경영입니다. 소위 우리교회는 개미군단입니다.
이 말에 대충 다른 교인들과 함께 끼어 넘어가지 마십시오. 내가 사랑을 실천하고, 구제하고, 베푸는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쉽게 확인하려면, 여러분이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다른 곳에는 돈을 얼마나 쓰고 있는데, 구제하고, 베푸는 일에는 얼마나 쓰고 있는지를 계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분명히 우리 교인들이 이 사역에도 열심히 참여할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오셨으니까요. 그렇다고 구제헌금, 선교헌금 할 것을 이 사역으로 돌려 하지는 마십시오.

지난 화요일 아침 KBS 방송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 ‘이진강’씨가 나와 대담하였습니다. 그는 ‘홍합짬뽕’을 개발하여 중식당을 운영하는 식당사장입니다. 그가 그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은 짬뽕 한 그릇을 팔면 100원을 적립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고 기부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약 3만원 안팎의 돈을 모으게 된답니다. 그러니까 하루에 홍합짬뽕이 300그릇이 팔리는 것이죠. 그렇게 7년 동안 해 왔답니다. 처음에는 아깝다는 생각도 했답니다. 하루 3만원씩 한 달 모으면 100만원 가까이 되니까 한 사람 인건비가 기부하는 돈으로 나가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수록 기쁘고, 장사도 잘 되고, 식당에 와서 음식을 팔아주는 사람들이 이진강 사장이 하는 일을 알고, 자신들이 짬뽕을 한 그릇 팔아주면 100원이 적립이 되어 좋은 일에 사용되니까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팔아 준다고 합니다. 음식을 팔아줌으로 기부에 동참하는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은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돕고 나누며 베푸는 것은 꼭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하는 것만이 나눔이며 돕는 구제가 아닙니다. 시간을 나누고 재능을 기부하고 마음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장애우들에게 운동을 가르치거나, 글을 잘 쓰는 이, 낭독을 잘 하는 이들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방에 봉사를 한다든지, 미술이나 스포츠댄스, 악기 연주 등 재능을 봉사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집을 수리하는 기술이나 물건을 고치는 기술을 가지고도 봉사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구제하고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구원의 역사에 사용하십니다. 고넬료가 그러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사는 삶입니다. 사랑의 빛을 통해,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는 삶입니다.
나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세상을 바꾸고 희망을 주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작은 사랑부터 실천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2월 19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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