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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3263]
· 설교 일자 : 2012년 03월 04일
· 본문 말씀 : 고린도전서 2장 1-5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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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린도전서 2장 1-5절)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며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무엇을 묵상하고 배워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무엇일까요? 기독교 신앙의 중심 줄기가 무엇일까요?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무엇이 빠지면 기독교 신앙이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이 될까요? 기독교의 어떤 기본이, 어떤 중심이, 어떤 중심 줄기가 빠지면 껍데기뿐인 기독교가 될까요?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원이 다르고, 구원의 방법이 다른 진리임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고린도교회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장 14절 상반절에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없는 복음, 십자가 없는 구원, 십자가 없는 신앙은 있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 십자가 없는 진리, 십자가 없는 경건, 십자가 없는 영성, 십자가 없는 믿음은 자기만족을 위한 잘못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고서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메마른 가슴을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보고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보고 한참 동안 생각하고 묵상하여도 눈물커녕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기억나지도 않는 것은 아닙니까?
  여류 문학가 플로렌스 바클레이는 자기가 일곱 살 때 있었던 일이 자기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사순절 중 어느 주일에, 어린 플로렌스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예배에 참석했을 때, 목사님은 예수님의 고난 받으신 사건의 성경 말씀을 낭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끌려 다니다가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읽을 때, 어린 플로렌스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이 모두 이상한 눈으로 예배에 방해가 된다는 듯이 이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 플로렌스의 어머니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왜 그러니?”하고 낮은 소리로 말하며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했습니다. 이 때 플로렌스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하며 울음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철모르는 소녀의 흐느낌이 고요한 성전에 울려 퍼질 때, 처음에는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던 예배 참석자들이 여기저기서 하나씩 둘씩 모두 고개를 낮추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의 순수한 울음이 어른들의 습관적이며 불감증이 된 마음을 각성하게 하는 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플로렌스 바클레이는 어른이 되고 사회적인 저명인사가 된 뒤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감동적인 사건을 기억하며 메마르고 불감증 걸린 신앙인이 되지 않고자 노력했습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십자가 신앙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는 복음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우리 교회 강단에는 십자가가 왜 걸려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세워진 십자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고가고 있느냐 입니다. 가슴에 십자가가 새겨진 뱃지를 달고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슴 속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느냐 입니다. 손에 낀 반지에 십자가가 새겨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손으로 십자가의 희생을 실천하느냐 입니다. 집에 나무 십자가가 벽에 걸려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와 은혜가 자신의 가정에 충만 한가입니다. 자동차에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을 가고 있느냐 입니다. 십자가가 내 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십자가가 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대제사장의 하속들과 로마 군병에게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실 때, 괴로워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참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이 참인간으로서 자기 부인을 통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8장 3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더라도 가룟 유다처럼 배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으면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나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만이 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순히 교인으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삶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계신 것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머물러 있다면 신앙은 멈추어 있는 상태입니다. 더 이상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바르게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할 것이고,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자의 삶을 삽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 가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고, 제자들 자신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사건 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약속의 열쇠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니까, 베드로가 발끈 했습니다. 예수님께 고난당하시고 죽으시지 마시라고, 결코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씀은 나보다 앞서 가지 말고 내 뒤로 가서 나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34절의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 보다 앞서가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 보다 앞서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욕망을 절제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의 삶, 자신의 자아가 중심이 되어 자신의 생각, 삶,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먼저! 입니다. 예수님 중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자기를 부인하고 잘 하다가도 어느 순간 옛 자아가 되살아나 활개를 치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큰 원수는,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의미에서 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속의 두 자아가 싸운다고 말했고, 그래서 그는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잘 안되고,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온전히 임하지 않습니다.
  하덕규씨가 부른 [가시나무]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처럼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지 못해, 나의 옛 자아를 부인하지 못해, 나의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버리지 못해 내 안에서 부딪히고 싸우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속에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내 고집대로 살려고 하니까 나도 힘들고, 나와 관계된 다른 사람들도 힘들고, 고통을 주고받습니다. 마치 가시나무처럼 살아갑니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존심이 살아있습니다. 자존심을 다스리지 못해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자존심 때문에 사리분별을 못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인생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자존심 지키느라 예수님도, 십자가도 다 잊어버립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예수님께 충성하고서도 자기 자랑하느라 신앙과 상급을 다 쏟아버립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신의 유익만을 구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탄이 어떤 것을 통해 우리를 유혹할까요? 우리의 옛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기중심성입니다. 사탄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나를 유혹하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조금만 건드리면 흔들리고 넘어오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여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할 때,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통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자기가 누군가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 세상을 다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식욕, 명예욕, 권력욕 등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겨내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지, 어떤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얼마나 잘못된 본성이 움크리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전폭적으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나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이와같이 십자가를 묵상하는 우리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깨닫고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희생으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가장 흉악한 형벌이었습니다. 나중에 로마에서도 너무도 끔찍한 형벌이라고 십자가형을 없앴습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주의 십자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 희생당하셨기 때문에 무력한 십자가, 잔인한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가 능력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은혜의 십자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렇게 저주 받고 잔인하고 흉악한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눈물이요, 핏방울이요, 인내요,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있으니 우리가 감동하고 감격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하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복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말씀만 가르치시고 그냥 하늘로 승천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셨어도 감동도, 감격도 하지 않고, 예수님을 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또한 우리들도 점점 우리의 가슴이 밋밋해지고, 둔감해 지는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만 가르치시고 승천하셨다면, 그 진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제대로 전해졌을까요? 십자가의 희생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기 원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십자가를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 가슴 속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가 신경이 쓰여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깨달음도 은혜도 감격도 없고, 다짐도 없다면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작은 희생이든, 큰 희생이든 희생하는 모습, 희생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갈 때,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은혜와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승리를 이루시고,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맡기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하노라면,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 “나는 너를 죽기까지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나는 너를 위해 희생했는데, 너는 얼마나 희생하고 있느냐?”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 너도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받기만 하고, 누리기만 하고, 뭔가 혜택을 달라고만 하고 네 삶 속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아니지 않느냐?”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만 보고, 사람으로부터 받을 칭찬과 상급만 바라보고, 세상의 유익과 세상 영광만을 바라본다면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너무나 무겁고 힘에 겨워서 하나님께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하나님, 이 십자가가 너무 힘들어요. 조금 가볍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안쓰러웠던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톱을 주시면서 잘나내고 싶은 만큼 자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매는 십자가의 밑 둥을 잘라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참을 가는데 다시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져서 다시 하나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조금 가다가 다시 부탁을 드리고, 또 부탁을 드렸습니다. 십자가는 밑동도, 위 부분도, 옆도 조금씩 잘려나간 볼품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영광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구덩이 하나만 건너가면 영광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매에게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건너기에는 그 간격이 너무 넓어 뛰어 건너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그 위에 놓고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마치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리를 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웬일입니까? 십자가의 길이가 조금 부족하였습니다. 그 부족한 것은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오면서 잘라낸 길이와 정확히 일치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코 즐겁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십자가를 멀리하고, 십자가를 가볍게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면 기독교 신앙은 점점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현상 중의 하나는 교인들이 점점 내 교회 의식이 약해진다는 점입니다. 젊은층은 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내가 자라난 교회이고, 내가 은혜 받고 세례 받고 신앙이 자라난 교회이며, 내 가족이 이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 교회의 지체로 세워주셨으니 내가 속한 교회에서 평생 섬기고 봉사하며 신앙생활 해야겠다는 다짐과 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그만 일이 있으면 쉽게 교회를 옮깁니다. 마음에 안 들면 쉽게 옮깁니다. 더 큰 교회로, 더 시설이 좋고, 프로그램이 좋은 교회로 옮겨갑니다. 자신은 이 교회의 수준에 맞지 않고 수준 높은 교회에 맞기 때문에 그 교회로 옮겨갑니다.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의 원인 중의 핵심은 십자가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내가 속한 교회를 그런 좋은 교회를 만들려는 노력, 희생은 없는 것이지요. 십자가를 지는 자세, 십자가를 감당하려는 신앙의 자세가 부족하여, 십자가의 희생을 치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즉시 옮깁니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겪기 싫은 것입니다. 차려 놓은 밥만 먹으려고 하지 밥상을 차리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땀을 흘리거나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수고하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희생하지...” “나 하나 희생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데...” “내가 희생하면 덕이 세워지는데...” 라는 신앙자세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 십자가 신앙은 중요합니다. 십자가 신앙은 대가를 지불하며 고통을 성숙으로, 고난을 영광으로, 괴로움을 열매로 극복해 가는 신앙입니다. 고통과 고난과 괴로움을 피해 다니고 비켜 가려고만 하면 신앙의 편안함은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의 온전함은 없습니다. 진정한 승리와 영광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 앞에서 풀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답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한 남자의 간증이 있습니다. - “당신, 정말 왜 그래! 관두자. 짜증난다. 잘못했다고 했으면 됐지. 왜 사람을 들들 볶아!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당신 예수님 만난 거 맞아?” 내가 예수님까지 들먹이자 아내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출근길에 꼬투리를 잡곤 하는 아내에게 나도 감정이 상했다. “피곤해서 못 살겠다. 관두자!”하고는 용감무쌍하게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오자 마음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시원한 기분이 잠깐이라는 데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이 담담하고 기분도 이상해졌다. 출근 전에 교회에 들러 기도드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탓에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교회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대성전에 앉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예수님, 아내를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를 이해해 줄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은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잘못했다. 네가 잘못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주님은 자꾸 내 죄를 돌아보게 만드셨다. 아내가 나를 믿지 못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나였다! 내 죄의 쓴뿌리가 그렇게 깊고 억셌다. (중략) ‘그렇습니다. 예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진짜 죽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저 또한 죽어서 가정을 살리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고백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찾고, 십자가의 희생을 하려고 할 때에 문제의 핵심이 해결되었다는 점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놓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벗어버리지 마십시오. 십자가와 멀어지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메마르지 않도록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이, 십자가의 은혜가, 십자가의 능력이 여러분 가슴 속으로, 여러분의 영혼으로 충만히 흘러들어오게 하십시오.
이 사순절 기간에 십자가의 신앙이 새롭게 회복되어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3월 04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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