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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신 예수님  [3183]
· 설교 일자 : 2012년 04월 01일
· 본문 말씀 : 이사야 53장 7-9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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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신 예수님 (이사야 53장 7-9)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연주회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 섭니다. 지휘자가 응시하는 것은 앞에 탁상시계와 보면대에 펼쳐져 있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깨끗한 악보입니다. 악보에는 ‘조용히’라는 악상만 써 있습니다. 지휘자가 하는 행동은 지휘봉을 들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고,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연주를 하지 않고 악기들만을 붙잡고 있습니다. 지휘자는 33초의 시간이 지날 때 악보를 넘기고, 다음 악장을 시작합니다. 역시 2분 40초가 지나면 또 악보를 넘기고, 또 다시 1분 20초가 지나면 연주를 끝내는 것입니다. 이 곡은 존 케이지가 작곡한 [4분 33초]라는 3악장으로 된 침묵의 음악입니다. 소리 없는 연주입니다. 연주의 선율이 없는 연주입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의 침묵에 대해서 말씀 드릴 텐데, 마음 같아서는 설교 시간 내내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서 있다가 5분마다 한번 씩 설교 원고를 넘기고, 그렇게 여섯 장의 원고를 넘기고 내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침묵으로 더 많은 내용과 의미를 전달 할 수 있는 능력과 내공과 영성이 없기에, 그런 시도는 무슨 해프닝이나 코미디가 될 것 같아, 부득이 말이라는 언어로 설교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너무나도 말이 많습니다. 말이 많다보니 필요 이상의 말이 많습니다. 말에 실수가 생깁니다. 과장된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는 그 많은 말들이 대부분은 남을 흉보는 말이거나 아니면 자기를 자랑하는 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리고 표현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이지만, 과장하고 진실이 담기지 않은 말들로 인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총선으로 인한 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정당들은 더 많은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 출마한 후보들은 당선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필요 이상으로 깎아 내리고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합니다.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탐욕적이고, 이기적이고, 허망한지, 그리고 당선을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남발하는 선거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매번 잘도 속는 사람들이 국민들입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쯤 들어 봤을 이야기입니다. 들어가면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동굴이 있는데, 만약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마는 동굴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바보 삼형제가 그 굴을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면서 제일 큰 형이 말했습니다. “너희들 이곳에서 말하면 죽는다.” 그러자 그는 죽어버렸습니다.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둘째 형이 “거 봐, 말해서 죽었잖아.” 그러면서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셋째가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절대 말 안할 거야!”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완전히 침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이야기해주는 우화입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말하는 것은 배우는데 침묵하는 일은 좀처럼 배우지 못한다.” 말을 참는 것보다 말을 하는 것이 훨씬 쉽고, 말을 하는 것보다 침묵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 들리는 소리, 침묵으로 전하는 메시지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난 받고 죽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은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수레를 타고 가면서 읽던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빌립이 성령님의 인도로 내시에게 가서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을 때,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수레에 같이 탔습니다. 그 내시가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선지자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빌립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본문 말씀이 가리키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 수많은 무리들에게 곤욕을 당하셨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지만,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말씀을 하셨고,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동안 말씀하신대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잡혀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이 확정되기 전,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7장 11-14절에,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하고 기록하였습니다. 그 다음 헤롯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에는 빌라도가 “그래서 네가 왕이냐? 아니냐?” 는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셨지만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는 무리들이 민란을 일으킬가 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 하는 것을 묵인하는 결정을 하자 예수님은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조롱과 모욕과 온갖 경멸을 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실 때에도, 침 뱉음 당할 때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뺨과 머리를 칠 때에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침묵하시는 어린 양의 모습이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왜 침묵하셨을까요? 속 시원히 다 말씀하시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기적도 행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마음껏 증명해 보이시지 왜 침묵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침묵으로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침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모세의 율법에는 돌로 치라 명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죄가 없다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고 할 거고, 돌로 치라고 하면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용서와 사랑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는 말씀을 하는 대신, 몸을 굽히사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침묵의 시간의 흐른 뒤, 일어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면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시험하고자 몰아치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잠시 침묵하셨습니다. 침묵의 시간 동안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뭐라고 쓰셨는지는 성경 말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두 번의 침묵의 시간 동안, 둘러선 사람들은 하던 말을 멈추게 되었고, 또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도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먼저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침묵의 힘입니다. 침묵이 침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면 대체로 할 말이 없어서 말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침묵으로 말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말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책임전가와 비굴한 변명과 불평과 원망과 독기 어린 말들을 쏟아내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침묵은 말이 말 못하는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언어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변명을 하지 않으시는 침묵이셨습니다.
변명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가 크게 놀라했다고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변명하여 목숨을 구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수차례 말씀하셨듯이,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 3일에 다시 부활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셔야 했기에, 침묵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침묵을 우리들도 배워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는 [개념없음]이라는 제목의 책에, 기독교인의 인생을 빛나게 할 삶의 태도 10가지에 대해 썼습니다. 그 중의 8번째가 ‘변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 고자질과 책임전가의 본성이 생겼다고 하면서, 남의 허물은 들추고, 자기 허물은 가리려는 태도가 성품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와를 처음 만난 아담이 하와를 향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인류 최초, 인류 최고의 고백을 했으면서도, 선악과를 따먹은 죄에 대해 하나님께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여자가 선악과를 주어서 먹었다’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와도 뱀이 그래서 먹었다고 역시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사람은 자신 불리해지면 변명을 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변명을 하여 허물을 가리려고 합니다. 물론 자랑할 일에는 자신을 드러냅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의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주인 보디발 장군이 요셉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집의 총무로 삼고 그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다 맡겼습니다. 부인만 요셉에게 안 맡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는 대로,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주인인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고, 그 유혹이 한 두 번이 아니고 성경을 보면 날마다 요셉을 유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집 안에 사람들이 없을 때, 이제는 유혹이 아니라 아예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하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거절한 것이지요. 그랬더니 여주인이 소위 괴씸죄를 걸어서 요셉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저녁에 남편이 집에 들어오자 여주인은 남편에게 ‘당신이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이렇게 욕을 보이려고 했다.’고 옷을 물증으로 내보이며 모함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보디발 장군은 노발대발하면서 요셉을 잡아다가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추악한 성폭력범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요셉은 왜 자기의 억울함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자기의 결백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은 침묵하였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요셉은 어떤 이유에서 억울함을 풀기위해 자신을 해명하고, 변명하고, 사실을 다 까발리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이유에서이고, 또 하나는 신앙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인간적인 이유는 보디발에 대한 신의 때문입니다. 요셉이 누명을 벗기 위해 결백을 주장하려면, 보디발의 아내가 행한 죄를 낱낱이 다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체면이 구겨지고 창피를 당하고 가정 파탄이 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보디발 장군입니다. 요셉은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안한 삶의 질서가 깨뜨려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동안 자기를 인정해 주고 믿어 주었던 보디발 장군에게 누를 끼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보디발이 자기 아내의 바람기를 눈치 챘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여자의 바람기는 한 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셉에게 추파를 던진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그 후 보디발과 요셉과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을 배려했고, 그동안 받은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억울하지만 침묵으로 감당했습니다. 희생을 감당하는 침묵입니다. 그동안 받은 은혜와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침묵하였습니다.
  재미 교포 김은국 씨가 쓴 [순교자]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노벨 문학상후보에 오르기도 한 작품입니다. 안타깝게도 수상하지는 못했습니다. [순교자]라는 소설은, 1950년 11월, 육군본부 정보처 평양 파견대의 장대령과 이대위는 6ㆍ25전쟁 직전에 일어난 목사 집단 처형 사건을 조사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정치 선전의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장대령은 살해된 열두 명의 목사들을 '순교자'로 규정하고 추도예배를 계획합니다. 두 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의 목사는 정신 이상이 되었고, 생존자 중 또 한 명인 신목사와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신목사는 끌려갔다가 12명의 목사들이 처형당하고, 살아서 나온 것에 대해 자신을 따르던 신도들에게 다른 목사들을 저버리고 배신한 배교자라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라고 지탄을 받지만 신목사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킵니다. 그런데 사건을 조사하던 이대위는 점점 진실을 알게 됩니다. 체포된 공산당으로부터 증언을 듣게 됩니다. 12명의 목사들은 처형 직전에 목숨을 살려달라고 구걸했고, 신목사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원들은 그런 12명의 목사를 처형했고, 신목사의 지조있는 신앙에 오히려 아량을 베풀어 살려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목사는 자신이 배교자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12명의 처형당한 목사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믿는 신도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진실을 가슴 속에 묻고 가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도들이 실망하고,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자신이 배교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 앞에 침묵하기로 한 것입니다. 신도들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도록, 희망을 잃지 않도록 자신이 배신자, 배교자, 가롯 유다라고 불려도 침묵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학작품입니다.
  “나는 성격상 밝힐 것은 밝히고 풀 것은 풀어야지 참고는 못 살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말 할 것 있으면 말해야지 담아두고는 못 살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성격대로 산다고 하지만, 참아야 할 때는 참아야 합니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격이 없어서 참으셨습니까? 예수님도 한 성격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공생애 기간 중 유월절이 되어 성전에 가시면, 온갖 이권이 낀 상행위로 성전을 더럽히는 이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침묵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나의 억울함을 푸는 데 급급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채기를 내고, 온통 뒤집어 놓지는 않았습니까? 지금 나의 답답함을 풀어 헤치느라 나중에 내 편이 되어 줄 소중한 친구를 적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한 번 참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덜 꼬였을 텐데,,, 하며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내 생각과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여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안은 채, 함부로 말해버려 나중의 나의 얕은 마음이 다 드러나 창피했던 적은 없습니까? 침묵이 가장 아름다웠을 그 때를 아십니까?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려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의 행동이나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침묵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함부로 말하기보다 한 번 말을 참고 생각을 더 깊이 해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오래 참아야 할 때, 사랑하기에 허물을 덮어 주어야 할 때, 사랑 때문에 기다려 주고, 믿어주어야 할 때, 묵묵히 침묵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면서도 침묵한 두 번째 이유는 신앙적인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억울함을 구구절절이 해명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요셉과 함께 하시고,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이 있었고, 그동안 고난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미치고 펄쩍 뛸 만한 일이었지만, 침묵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요셉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고, 감옥에 갇힌 후에 감옥에서 성실하게 일하지 않았을 것이고, 간수장에게 신뢰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이 자꾸 꼬이기만 한다고 생각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자신의 미래에 대해 포기하고, 반항과 탈선의 길을 걷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이니까 말입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말에 대해 신중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잘 했고, 또 자신이 꾼 꿈을 부모와 형제들에게 서슴없이 말하여 형들의 시기를 받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로 팔려갔고, 그곳에서의 생활 속에서 요셉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고자질하지 않고, 함부로 변명하지 않고, 함부로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입이 무거워졌습니다.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받고 있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에도 분명히 함께 하신다는 신앙으로 발전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함께 하셨는데, 분명 지금 내가 겪는 문제와 고난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를 기다릴 수 있었고, 침묵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말없음’이 아니라 믿음의 기다림의 표현이었고, 더 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담긴 침묵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겸손과 인내와 희생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침묵은 크게 두 가지 침묵입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사람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성부 하나님의 침묵이 있고, 그리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의 침묵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침묵은 독생자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공의와 사랑을 이루시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침묵입니다. 성자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묵묵히 사랑과 구원을 성취해 가시는 침묵입니다.  
  어린 양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도수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으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할 말이 얼마나 많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침묵하셨습니다. 변명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공격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말에 대해 침묵하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는 구원의 역사, 인내한 후에 이루어질 기쁨과 영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침묵은 무엇을 위해서 침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침묵이 유익한 침묵이냐 하는 것입니다. 단지 비겁하거나 할 말이 없거나 무엇인가를 회피하기 위해 말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고 가르치신 침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겼습니다. 예수님의 침묵 속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침묵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록 자신이 정당한 이유 없이 비난받을 지라도 그것에 대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가장 심원하고도 진실한 겸손의 표시다. 모욕과 사악 아래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쏙 빼닮은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대로만 듣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하며 사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침묵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침묵하며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 마음 깊숙이, 우리 영혼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만큼 침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만큼 침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을 위해 침묵할 수 있습니다. 침묵을 통하여 더 많은 의미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침묵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침묵 중에 자라나고, 침묵 중에 무르익고, 침묵 중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은 이만이 침묵할 수 있습니다. 침묵이 깊어지면 고요함과 평안이 임하고, 영혼 깊숙이에서 부터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이만이 침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묵의 열매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2012년 고난 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침묵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4월 0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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