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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 위의 생선과 떡  [3575]
· 설교 일자 : 2012년 04월 22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21장 1-14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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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불 위의 생선과 떡 (요한복음 21장 1-14절)
  제가 명절 때에나 휴가 때에 부모님 집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하면, 저희 어머니는 꼭 저를 위해 누른밥을 해 주셨습니다. 일부러 밥을 태워 누룽지가 생기게 하여 다른 식구들의 밥을 퍼 주고 난 뒤, 물을 부어 끓여주셨습니다. 제가 옛날에 위가 안 좋아서 누른밥을 먹으면 속이 편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침밥을 많이 안 먹고 누른밥 한 공기를 먹는 것으로 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아침에 챙겨주시는 누른밥에는 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과 배려와 하루가 속 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마다 살아오면서 특별한 의미가 담긴 음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그 음식이 그립고, 그 음식을 일부러 찾아서 먹습니다. 음식에 담긴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사연이 없으면 한 때 맛있는 음식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음식이 그렇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까? 어떤 음식에 어떤 사연이 담겨 그 음식을 잊을 수가 없습니까?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에 얻어먹었던 하얀 쌀밥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밀가루로 칼국수를 밀어 자르고 남은 옆 부분을, 칼국수 꽁지라고 하던가요? 그것을 연탄불에 구워 먹었던 것이 기억난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중학교 졸업식 때 처음으로 먹어 본 중국집 짜장면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등장하는 7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요리해 주신 숯불위에 구운 생선과 떡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양념 없이 있는 그대로 요리한 것이지만, 쉐프 예수님께서 요리하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숯불 위의 생선과 떡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과 의미가 깊고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가 담긴 음식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디베랴란 갈릴리 바다의 다른 이름입니다. 본문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본문 1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살아난 후에 갈릴리의 지정된 장소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8:10, 막 14:28) 그러나 제자들은 불신과 두려움으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몇 차례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갈릴리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나는 고기 잡으러 가야겠다.”라고 말하고 가니까 다른 여섯 제자들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두명의 제자, 이렇게 7명의 제자가 베드로를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는 왜 고기를 잡으러 갔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왜 고기 잡으러 갔을까요? 여러분이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떤 성경학자는 베드로가 전적으로 과거의 자기 생활권 안으로 돌아가 밀린 부채를 갚아야 할 필요를 느꼈고, 돈을 버는 최상의 방법은 고기를 잡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갈 때 여섯 명의 다른 제자들까지 함께 데리고 간 것을 보면, 베드로와 그 제자들이 갈릴리에 와서 여러 날을 있으면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고, 젊은 제자들이 허구한 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매일 빈둥거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고향에 있는 형제, 친지들 앞에서 빈둥거리며 노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행동으로 비쳐지지 않았을 것이니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무슨 일이든지 해서 먹고 살아야 되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아다가 팔아서 생활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그런 뜻으로 말을 하고 고기 잡으러 갔다고 해석합니다. 또 다른 해석은 베드로가 어부였을 때에 예수님께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는 배와 그물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 제자가 되었는데,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그것도 다른 제자들까지 함께 데리고 간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서도 아직도 그의 마음과 영적인 상태와 사명감이 회복이 안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해석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다니던 시절, 그야말로 제자 중의 수제자로써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예수님께서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칭찬도 받고 베드로를 반석으로 해서 교회가 세워질 것을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곧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니까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말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에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 둘을 데리고 가셨을 정도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에는 마치 자신의 검술로 예수님을 지킬 것처럼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 예수님께 검을 쓴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는 통곡했습니다. 죄의식과 고뇌로 그의 영혼은 산산이 깨지는 듯했습니다. 비참함과 치욕스러움 때문에 그의 마음은 어두웠습니다. 그의 제자로써의 사명감은 급격히 곤두박질쳤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7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어떤 제자는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났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고, 혼란을 느끼고 있었나 봅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를 따라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 없는 삶을 보여줍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대화도 했습니다. 그 중의 도마는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을 보고 만져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계속 영적인 방황에 빠져있었습니다. 소망을 잃어버리고 낙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명을 잃어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고기 잡던 시절로 돌아가 그 일에 집중하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고기 잡는 일이 죄를 짓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기 잡으러 간 그들의 모습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던 3년 동안 예수님께만 소망을 두고, 예수님의 말씀 따라 살고, 예수님의 비전을 함께 품었던 그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과거로 돌아간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부름을 받기 전의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일곱 명의 제자들처럼 뒤로 뒷걸음질 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후퇴합니다.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사명감이 없어지면 과거로 돌아갑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지 않으면 신앙이 뒷걸음질 칠 수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옛 습관이 나옵니다. 옛사람의 모습이 되살아납니다. 회복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명의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열심히 그물을 내렸겠지요. 고기를 잡던 실력이 예수님의 제자 생활 3년 동안 무디어졌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복음 15장 5절 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 예수님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의 그날처럼, 빈 그물과 텅 빈 배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뒤돌아 봤을 때, 헛수고를 했던 때는 없었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마치 손으로 모래를 움켜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고 했던 것처럼, 손을 펴 보니 남은 것이 하나 없는 헛수고, 허탈한 적은 없습니까? 인생의 빈 그물을 끌어올리며 허무해했던 적은 없습니까?
  개그우먼 조혜련씨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혜련씨는 나름대로 열심히 산 사람입니다. 여자 연예인이면서도 이상한 분장을 하면서까지 자기 이미지가 망가지면서까지 웃음을 주려고 노력했고, 일본에 진출하여 나름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웃기는 노래를 불러서 음반도 냈고, 각종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혼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격차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조혜련씨가 그렇게 바쁘게 열심히 살았는데, 언제부턴가 자녀들이 자기를 그림자 보듯 하더랍니다. 딸아이의 장래 소원은 바쁘게 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엄마가 자기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자녀들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남편과의 관계도 좋을 리가 없겠지요. 그들의 이혼 사유는 성격차이가 아니라 가치관의 차이, 인생 목표의 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추구했지만, 가족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생을 한 번 돌아봅시다. 돈 버는 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한 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목적과 수단이 바뀌지는 않았습니까? 방향이 잘못 잡힌 것은 아닙니까? 남들 보기에는 성공한 것 같아도 속 빈 강정 같은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번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 중 논문 표절로 인해서 개망신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국회의원되면 뭐하겠습니까? 그냥 교수나 하고 있지... 욕심이 지나치니까 결국 개망신만 당하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그 욕심이 채워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돈 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돈 버는 기계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돈을 법니까? 우리는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이고, 목적 있는 삶을 살 때 행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룰 때 진정한 만족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성공하는 인생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성공하는 인생입니다. 예수님 없는 삶은 부평초처럼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부지런히 산다고 하지만 살고 난 후에 후회하는 삶입니다. 다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처럼 헛수고 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언제부터 서 계셨는지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밤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실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바닷가에 서서 제자들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신 질문이 아니라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황을 인정하도록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낚시터에 가면 밤에 와서 밤낚시를 하고 그 다음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침 일찍 와서 오후 늦게 까지 낚시를 하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낚시를 하고 있노라면, 뒤에 와서 꼭 많이 잡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고기를 많이 잡고 월척이라도 몇 수 했으면, “예, 조금 잡았습니다.”라고 겸손을 사칭한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지 못하고 허탕만 쳤는데 누가 와서 물으면 묻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미운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못 잡게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아 놓고서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면 부인에게 한 소리를 들으니까 시장에 들어서 물고기를 사가지고 집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여하튼 고기를 잡으려고 한 사람에게 고기를 못 잡은 현실은 부끄럽고 비참한 현실입니다. 부끄럽고 비참한 현실을 있는 대로 대답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했으니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 세우지 마십시오. 예수님 앞에서 얼굴 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솔직해야 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고백할 것은 고백해야 합니다. 숨기지 마십시오. 포장하지 마십시오. 안 그런 척 하지 마십시오. 강한 척 하지 마십시오. 그런다고 주님이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는 주님을 주님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자존심 세우고, 포장한 채로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세리처럼 그저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연약합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저는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저는 추악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시옵소서.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 주소서”(찬송 214장) 이런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었다고 대답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6절,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주님께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했더니 그물을 끌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나중에 끌어 올려 세어 보니 153마리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주님의 회복 코스가 진행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실패한 부분을 극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주님은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에게는 3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던 그 때가 기억났을 것입니다. 그때도 그는 밤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텅 빈 배에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을 한 참 동안 지켜보고 계셨다면, 밤새도록 바닷가에 서 계시면서 제자들이 밤새 헛손질하는 것을 지켜보셨다면, 왜 좀 더 일찍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돕지 않으셨을까? 제자들이 그물을 내려 끌어올릴 때마다 빈 그물로 올라오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통쾌하게 생각하고 계셨을까? “고것 봐라. 쌤통이다. 니들이 뛰어야 벼룩이지.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면 고기가 잡힐 것 같으냐?” 이런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시라면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성격, 그런 마음이라면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무엇을 기다리셨을까요?
  밤새도록 애썼지만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에 빈 그물만 있다는 것을 제자들이 다시금 깨닫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잃었다가 찾은 둘째 아들의 비유의 말씀 속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먼저 달라고 하고, 챙겨서 먼 나라고 가서 성공하겠다고 떠나는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유산을 안 주면 되지요. 그러나 둘째 아들이 그렇게 떠나서 먼 나라에 가서 인생의 처절한 현실을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둘째 아들의 허황된 꿈이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 수업료를 톡톡히 지불해야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등지고 멀어져 갈 때, 그 끝을 주님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 끝에 도달했을 때에야 깨닫게 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지켜보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본인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강한 척을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존재이면서도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야 그때서야 인정을 합니다. 주님은 그 때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야 그때부터 신앙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실패가 곧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나 자신의 자존심이 깨지고, 내 고집이 깨지고, 내 삶의 방법과 자세가 깨어져야 새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내가 벼랑 끝에 몰려서야, 내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서야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세상의 힘과 방법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할 때, 그때가 주님은 시작이십니다. 그때에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주님의 손을 잡게 됩니다.
  
  바다에서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육지에 올라와서 사랑의 숯불을 만나게 됩니다. 숯불 위에는 생선과 떡이 있습니다. 밤새워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헛수고를 하여 더욱 허기지고 지치고 추운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아침 식탁을 준비하였습니다.
  당시 갈릴리 어부들은 대개 밤 시간에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가끔은 그물이 엉키지 않도록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물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어부들은 밤새 물속에서 젖은 채로 고기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새벽을 맞게 되면 새벽바람이 스칠 때, 춥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허기 진 몸에 스치는 새벽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지만, 밤새 허탕을 친 그들의 몸에 스치는 새벽바람은 황소바람입니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따뜻한 숯불, 그리고 그 위에 생선과 떡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에게는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단지 생선과 떡으로만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숯불은 우리가 고기 집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피운 숯불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생선과 떡을 구웠으니까 요즘 나오는 무슨 바비큐용 그릴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피워 놓은 숯불, 모닥불은 추위 속에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나무로 피워놓은 불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 가셨을 때, 베드로가 뒤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멀찍이서 보고 있을 때, 어디에 있었느냐하면, 사람들이 불을 피워놓고 모여서 여러 사람들이 불을 쬐고 있는 곳에 함께 서 있다가 ‘너도 저 사람과 한 패가 아니냐?’고 질문을 당하고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 때 피워놓은 숯불, 불이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과 떡을 올려놓으신 그 불과 같은 종류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생선과 떡만 보인 것이 아니라 숯불이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할 때 쬐던 그 숯불, 그 모닥불과 함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했습니다. 아침 바닷물이 차가웠을 테니 바다에서 나와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베드로에게 그 숯불은 따뜻한 사랑의 주님의 손길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숯불 위의 생선과 떡을 보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 근처 풀밭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기적을 행하시어 배고픈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사건을 기억해냈겠지요. 마지막 잡히시기 전 저녁에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행하셨던 성찬을 기억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수많은 식사를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제자들이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써 3년간 함께 했었다는 것, 자신들이 제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숯불위의 생선과 떡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밀하고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음식입니다. 숯불위의 생선과 떡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그들을 회복시키시려는 부활하신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실패를 위로하고, 그들의 죄의식을 없애주고, 그들의 잃어버린 사명감을 되찾게 해주는 숯불 위의 생선과 떡입니다. 영적인 방황을 그치고, 방향을 다시 잡게 하는 음식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세워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복되지 못한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찾아오셨고, 실패와 죄의식 속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을 다시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영적인 힘과 사랑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세우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그물을 열심히 내려 성공이라는 고기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까? 자칫 과거로 돌아가 뒷걸음질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외롭습니까? 괴롭습니까? 실패했습니까? 낙심해 있습니까? 허무합니까? 영적인 방황을 하고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시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세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들을 때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을 깨닫고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용서하시고, 새롭게 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셔서 사랑으로 회복시키시는 주님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4월 22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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