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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은혜  [3635]
· 설교 일자 : 2012년 06월 17일
· 본문 말씀 : 마태복음 13장 10-17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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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은혜 (마태복음 13장 10-17절)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는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 회장은 세계에서 기부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아내 멜린다의 설득으로 재산의 반 이상을 가난한 사람과 인류의 질병 퇴치를 위해 기부했습니다. 빌 게이츠의 아내 멜린다는 1993년 아프리카 여행 중에 신발을 신은 여성을 한명도 만나지 못했던 경험이 자신을 변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제주시에서 오랫동안 병원을 경영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육십 평생을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인 명예와 물질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회의장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국한 뒤 그는 자신이 25년간 투자하며 사랑해왔던 병원을 팔아 영세 부락을 찾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병력일지를 기록해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꾸준하게 치료해 주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선교사로 갔던 어떤 목사님은 지난번 지진과 쓰나미를 겪으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그저 우왕좌왕하다가 어쩔 줄 모르며 지냈는데 바로 그때, 그분 마음속에 “그 날은 불시에 불현듯이 닥친다는 것, 바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이 세상의 끝 날은 이렇게 닥칠 것이다. 그 순간이 되면 이것저것 챙길 겨를이 전혀 없다. 내가 누리던 모든 것을 다 놓아야 한다.” 이란 큰 깨달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삶은 반응입니다.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사건을 겪거나, 어떤 일을 하면서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사건을 겪을 때, 어떤 일을 하면서 깨달음으로 반응을 한다면, 이때의 깨달음은 삶을 긍정적으로, 발전적으로 성장하도록 추진합니다.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은 삶이라는 엘리베이터를 위로 올라가도록 하는 에너지와도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비밀을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너희는 알지만, 그러나 이 선물, 이 깨달음은 누구한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누구든지 준비된 마음이 있으면 언제라도 깨달음과 이해가 막힘없이 흐를 것이지만, 준비된 마음이 없으면 깨달음은 흔적도 없이 금세 사라질 것이다. 내가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마음을 준비시키고, 마음을 열어 깨닫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현재 상태로는 그들은 세상 끝 날까지 쳐다보아도 보지 못하고, 지칠 때까지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이 복 주신 눈, 곧 보는 눈이 있다. 하나님이 복 주신 귀, 곧 듣는 귀가 있다. 예언자와 겸손하게 믿는 이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고 싶어 했고, 지금 듣는 것을 듣고 싶어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해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깨닫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깨닫는 자가 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깨달을 때 진리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진리를 가르쳐도, 진리를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깨달음이 얼마나 복이 있는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이라는 말의 ‘깨닫다’는 말은 ‘꿰뚫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작은 지식들이 한꺼번에 연결되어 전체가 보이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눈을 뜨는 것이고,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것들이 보입니다. 들리지 않던 내면의 소리가 들립니다.
  깨달음의 반응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깨닫고, 듣기만 들어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매 맞고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통을 겪고 나서야 깨닫는 경우입니다. 잃어버리고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을 잃거나 돈을 잃어버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입니다. 또 삶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 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부자는 살아생전에 끝내 깨닫지 못하고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서야 깨닫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믿었어야 했다고 지옥에서 깨닫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사실 지옥에까지 가서야 깨닫게 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유형에 속합니까? 보고 깨닫습니까? 듣고 깨닫습니까? 아니면 죽을 지경이 되어야 깨닫습니까? 혹시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까? 죽은 다음에 깨닫고 싶습니까?  


  깨달음은 생각을 바꾸게 하고, 행동을 변화시킵니다.
구약성서 열왕기하 5장에는 아람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에 관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는 아람 나라의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몸에 나병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 여종이 있었는데, 그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한 분 계신데 그분에게 주인님이 가시면 나병이 고쳐질 것이라고. 그래서 나아만은 종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병을 고치러 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의 집에 도착하였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람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아만이 노발대발하며 자기 고국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가 기대하기를 선지자가 나와서 손을 고칠 부위 위에 흔들어 치유해주기를 바랬는데, 얼굴도 비치지 않고, 자기 고국에는 더 크고 좋은 강이 많은 데, 겨우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이나 씻으라고 한다고 화가 났습니다. 그 때, 같이 갔던 종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이렇게 고합니다. “아니, 선지자가 주인님께 더 한 일을 행하라고 해도 병 낫기 위하여 하지 않겠습니까? 요단강에 가서 씻어 깨끗하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어려워 안 하시려고 하십니까?” 나아만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들의 말이 맞았습니다. 그들의 말이 나아만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교만과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마음이 꽉 차 있던 나아만의 생각이 깨뜨려지고, 자신이 무엇을 하러 이스라엘에 왔는지를 기억나게 했고, 그리고 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자세로 반응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명령대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더니 피부가 어린아이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치유 되었습니다. 나아만은 깨달음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 결과 치유되었습니다.
  깨달음이란 깨달은 것이 삶속에서 행동으로 이루어지고, 실천으로 이루질 때, 값지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이 행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깨달음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나무가 됩니다. 나중에 말라 죽습니다.
  

  깨달음도 성숙해지고 확장되어야 합니다.
깨달음이 하나씩 하나씩 생기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기 시작하고, 발견하지 못했던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의 작가인 앤드류 매튜스는 열 살 때에 가장 애지중지하던 재산은 축구공이었습니다. 그는 축구공을 안고 밥을 먹고 잠도 잤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신발 대신 축구공을 반짝반짝하게 닦았습니다. 축구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거리에서 놀고 있다가 그 소중한 축구공을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누가 훔쳐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옷 속에 자기의 축구공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 아주머니에게 달려가서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내 축구공을 배 안에 넣고 뭘 하세요? 빨리 내 축구공 주세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는 그의 축구공을 배안에 숨긴 것이 아니라 만삭의 상태였습니다. 그는 그날 그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통해서 아기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그리고 여자들이 임신하여 8개월이 되면 어떻게 보이는지 알게 되었답니다. 축구공은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어떻게 그가 열 살이나 될 때까지 임신한 여자를 보지 못했는가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동안에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주위에 임신한 아주머니들이 얼마나 잘 보이는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닫게 되면 안 보이던 것이 보입니다. 깨닫게 되면 안 들리던 것이 들립니다. 깨달음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이치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심오한 사상과 철학을 깨닫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 말씀 속에는 어린아이가 깨닫는 것이 있고 어른이 되어 깨닫는 것이 다른 것처럼, 깨달음에도 어린아이 수준이 있고, 장성한 사람의 수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과 영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양심으로 죄를 깨닫고, 이성으로 생각하고 분별하고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으로 영적인 존재, 영적인 진리, 영적인 것들에 대해 갈망하고, 인식하고, 깨닫고, 깨달은 것을 믿고 경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성숙하고, 온전하여진다는 것은 양심과 이성과 영혼의 깨달음을 통해 변화되고 성숙해지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교훈을 얻고, 교훈 얻은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살아갈 때, 성숙해지고 온전해집니다. 깨달음을 통해 지식도 넓혀지고, 인식도 또렷해지고, 이해력도 넓어지고, 지혜도 풍성해집니다.
  지난주에 깨어짐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실수와 실패, 문제와 장애물, 고통과 시련으로 깨어지기만 하고 그 깨어짐을 통해 깨달음이 없다면, 깨어짐은 그냥 고통과 불행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지면서 깨달음이 있을 때,  변화와 발전과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인정할 때, 신앙의 반응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우리의 삶속에 깨달음이 사라지고 있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깨달음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경우든지, 또는 마음과 영혼이 무디어져 가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계속되면 우리 영혼이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깨달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 내 마음이 살아있구나! 내 영혼이 무디어져 있지 않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교우 여러분, 깨달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깨달음이 생기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과 영혼이 무엇을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고,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도록 만드는 깨달음의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일종의 방해전파라고 할까요? 우리가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 전파를 받아서 수신하여야 할 때, 방해 전파를 받으면 무슨 소리인지, 무슨 화면인지 분간할 수 없고 선명하게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과 영혼에 깨달음이 생기지 못하게 하는 영적 방해전파가 있습니다. 깨달음이 생기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52절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깨닫지 못한 것이 마음이 둔하여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의 마음이 둔하여질까요? 마음이 둔하여졌다는 것은 마음이 무디어졌다는 것이고, 마음이 굳어졌다, 딱딱해졌다, 마음의 민감성이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가서 마음이 둔해지도록, 무디어지도록, 굳어지고, 딱딱해지도록 만드는 것일까요? 교만, 욕심, 부정적인 생각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교만과 욕심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교만은 진리의 말씀에 대해 마음을 닫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교만이 들어오면 자기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양,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는 지식이 대단한 것인 양, 교만해져서 다른 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말씀처럼, 교만으로 마음이 완악해져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눈은 보지 않으려고 아예 감아버린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욕심은 우리의 마음과 영이 깨닫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 안에 생겨난 욕심, 즉 탐욕, 정욕, 명예욕, 권력욕 등 갖가지 욕심들은 우리를 깨달음의 진리에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방향으로 마구 끌고 갑니다. 그래서 마침내 욕망의 끝, 욕망의 저 밑바닥이 다 드러나서야 그때서 깨닫고 돌이키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갈 때까지 가서도 깨닫지 못해 돌이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깨달아도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게 합니다. 깨달은 대로 실천을 못하게 합니다. 욕망에 사로잡히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것이 보이지 않고, 충고해 주는 말이 들리지 않는데, 무슨 깨달음이 있고, 어떻게 변화가 생길 수 있으며, 어떻게 바른 길로 갈 수 있겠습니까?
  부정적인 생각은 깨달음을 오염시키는 병균과도 같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의심, 낙심, 절망, 불평, 원망, 열등의식 등 부정적인 생각은 신종플루처럼 우리 안에 생기면 쫓아내기가 힘듭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병균을 퇴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냥 방치해 두면, 신종플루가 생명을 위협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우리가 깨달아야 할 때에 감정으로 반응하게 합니다. 그것도 부정적인 감정으로 반응하게 합니다. 막힌 수도관에 물을 부어도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의 단계로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또한 교만, 욕심,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 안에 또 다른 쓴 뿌리와 함정을 만들어 놓고 계속적으로 우리의 긍정적인 변화와 성숙을 방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현상을 일컬어 마음이 완악해진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교만을 깨뜨리기 바랍니다. 욕심을 버리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본문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의 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만큼 예수님께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심으로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깨달을 것이고, 단지 희미한 호기심만 가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 깊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열린 마음, 준비된 마음이란 깨달음의 은혜가 임한 마음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단어의 국어사전의 뜻풀이에 의하면,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은 자기 스스로 깨닫게 되는 현상을 표현할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적인 능력이나 노력에 의해 깨달음의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다릅니다. 기독교 진리를 깨닫고 믿게 되는 것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생각하고 궁리하면 기독교의 진리가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계시이고, 이 계시는 우리의 이성만으로 쉽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깨닫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나면 가장 먼저 깨달음이 옵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성경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지혜란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면, 이 세상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합니다. 새로운 눈을 뜨면 새로운 영적인 깨달음들이 계속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나를 향한 계획이 있어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길이 어떤 길인지, 어떻게 가야할 지 깨닫게 됩니다. 내 과거의 삶이 왜 그때 그랬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현실에서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달아 꿰뚫어지게 됩니다. 내 삶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매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살아갑니다.
  신앙 안에서 깨달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 영혼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알지 못하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드러난 세계를 맛보며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깨달음이 그치면, 하나님을 향해 열려있던 문이 닫히고, 하나님과 반대방향을 향해 서있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게 되어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더 멀어지니까 점점 더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인생이 풍성해지려면 깨달음이 많아야 합니다. 믿음은 깨닫고 믿을 때 기적을 일으킵니다. 행복도 깨달음에서 옵니다. 행복은 깨닫지 못하면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혜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합니다. 감사도 깨닫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은혜를 깨달을 때에 감사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통해 믿음이 견고해 지는 것이며, 깨달음의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깨달은 진리가 정말로 진리인지 경험하고, 그 경험 속에서 믿음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깨닫고, 변화와 성숙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깨달음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깨달음의 수준이 어린아이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만과 욕심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어서 깨달음의 은혜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없애버리시기 바랍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충만히 임재 하시어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준비된 마음으로 깨달음의 은혜가 넘쳐서 신앙이 자라나고 변화와 성숙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깨달음의 은혜로 삶이 풍성해지시기 바랍니다.
  
2012년 06월 17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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