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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 사람에게   [4388]
· 설교 일자 : 2012년 08월 26일
· 본문 말씀 : 시편 37편 23-24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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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 사람에게  (시편 37편 23-24절)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별 짓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직립보행입니다. 직립보행이란 네 발을 가진 동물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서 두 발로 걷는 것을 말합니다. 새들도 두 발로 걷지만  다리가 두개이므로 새의 걸음을 직립보행이라 하지 않습니다. 가끔 강아지,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 두 발로 서서 걷기도 하지만 인간처럼 오랫동안 계속 걷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걷지 못합니다. 걸을 수 있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동물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걷습니다. 걸음을 걷는 면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등합니다. 또한 네 발로 걷는 것보다 두 발로 걷는 것이 훨씬 불안정하기 때문에 네 발보다 두 발로 걸을 때 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는 넘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걷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세상에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서 걸음마를 배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어서기 위해 기우뚱거리고, 뒤뚱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다가 넘어지고 무릎이 까졌습니다. 그래도 다시 벽을 짚고 일어나서 또 뒤뚱거리며 걸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걸어 다닐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넘어졌을 때에 다시 일어나지 않고, 다시 걸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영영 걸음마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며, 걷고 뛸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넘어질 것을 무서워해서 넘어진 채로 주저앉아 있거나 드러누워 있었다면 아직도 걸음마를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도 했고, 아니면 스스로 손을 털면서 다시 일어났기에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또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발에 힘이 없어서 넘어지기도 하고,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합니다. 계단이나 평평하지 못한 곳을 헛디디어서 넘어지기도 하고, 눈길이나 빙판길 위에서처럼 미끄러운 바닥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합니다. 누가 다리를 걸어서 넘어지기도 하고, 강하게 밀거나 부딪혀서 넘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무리하게 달리다가 힘에 부쳐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넘어지게 되는 이유와 원인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별로 기분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상처가 나거나 다치거나 창피하거나 불쾌합니다. 치욕적이기도 합니다. 2003년 10월 3일, 가야초등학교에서 희년기념 전교인 운동회로 모였을 때, 마지막 경기가 릴레이였습니다. 그때 재가 옛날에 잘 뛰던 생각만 하고 뛰고 싶은 마음에 릴레이에 출전했었습니다. 그런데 바턴을 받아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마음은 날라 가고 싶었지만, 다리는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다리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넘어졌습니다. 다시 일어나 뛰다가 또 넘어졌습니다. 그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넘어지다”는 말의 국어사전에 설명된 뜻풀이는, 첫 번째 뜻은 ‘한쪽으로 쓰러져 가로눕다.’입니다. 두 번째로는 ‘쓰러져 죽다’는 뜻이 있고, 세 번째는 ‘어떠한 일에서 실패하거나 패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은 인생길에서 넘어진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넘어진 적이 없습니까? 유혹에 넘어진 적은 없습니까? 넘어져 낙심한 적은 없습니까? 슬럼프에 빠진 적은 없습니까? 우울, 방황, 갈등, 괴로워한 적은 없습니까? 죄책감에 빠져 주저앉은 적은 없습니까? 사람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물질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절제하지 못해서, 거절하지 못해서, 방어하지 못해서, 어리석게 어쩔 수 없이 넘어진 적은 없습니까? 자만에 빠져서 넘어진 적은 없습니까?
  마가복음 14장 27절 이하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는 말씀이 “너희가 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다 실족할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족한다는 말은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는 닭이 울기 전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의 가르치신 말씀을 직접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고 경험했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도 넘어졌습니다. 베드로도 넘어졌는데 우리라고 어찌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베드로보다 훨씬 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인데 넘어지는 일이 왜 없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인생길에서 넘어지면서 살아가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넘어진 일이 자랑스러운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거나 영원한 수치는 아닙니다. 누구나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왜 넘어질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넘어진 일 때문에 스스로 낙심하고 절망하고 체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존경 받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길에서 한 번도 넘어진 적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진 적이 있지만 다시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다시 일어서서 다시는 똑같은 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길에서 넘어진 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라 넘어진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더욱 강해지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길에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반응했느냐? 어떤 도움을 받고 다시 일어났느냐?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섰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1차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그 때 마가라는 바나바의 조카를 데리고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갑자기 전도여행을 포기하고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고생스러워서였는지, 인간적인 다른 생각이 들어서인지 중도 포기한 것입니다. 그 후 2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는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에게 다시 기회를 주자는 생각이었고, 바울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중도에 포기하고 떠난 사람은 또 다시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바나바와 바울은 극심한 논쟁을 하고,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전도여행을 하지 못하고 각각 다른 일행들과 전도사역을 했습니다. 그 후 마가는 놀랍게 변화된 모습으로 전도사역에 참여했습니다. 나중에는 마가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바울조차도 마가를 자신의 동역자로 받아들였고,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는 바울을 돕는 유익한 사람이라고 서신서에 썼습니다. 마가는 한 번 실수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다시 일으켜 세우고, 함께 사역하여 그를 훌륭한 사역자로 세웠습니다. 마가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바울도 그런 마가에 대해 영원히 안 좋게 보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고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있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에 관한 편지지요.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무엇인가 훔쳐가지고 도망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자 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오네시모의 변화를 강조하며,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받아주고, 용서해 주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세워주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리는 다시 기회를 주는 진리입니다. 영원히 끝나버린 것이 아니고 용서와 이해와 사랑의 은혜로 다시 기회를 주고, 다시 회복시키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진리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일어서기 위해 하나님의 손을 잡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을 짖 밟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죄로 말미암아 넘어지고, 쓰러진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일으켜 세워주시는 이야기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여러 번 넘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툴툴 털고 일어난다면 넘어지는 것 때문에 파멸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넘어진 탓에 우리는 더러워진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는 훌륭한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고, 수건이 걸려 있으며 깨끗한 옷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가 더럽다는 것을 느낄 때, 뚜렷하게 우리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자기에게 남겨 줄 유산을 먼저 달라고 요청하고, 그리고 유산을 챙겨서 먼 나라로 가서, 그곳에서 아버지의 피 같은 돈을 잘 사용하여 사업을 하든지 건설적인 일을 하든지 했어야 하는데, 그는 그곳에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목표가 있고, 비전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 품에서 떠나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즐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다 날리고, 그곳에 흉년이 들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그가 돈 있을 때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이라는 작자들도 다 떠나고, 결국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상거지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집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본 큰 아들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유산으로 받아 다 날리고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보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왜 안 들겠습니까?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하는 큰 아들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친구들과 함께 먹고 즐기라고 한 적이 없는 아버지에 대해 못 마땅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의 핵심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에 대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이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왔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 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진정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둘째 아들은 기회만 있으면 아버지 집을 떠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의 몸은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늘 먼 나라, 그곳에서 아버지의 간섭 없이,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즐기고 마음대로 살고 마음대로 결정하며 살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런 날을 꿈꾸며 몸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어도 마음은 늘 가출한 상태였습니다. 그가 마침내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실패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집을 떠나 허랑방탕으로 크게 넘어진 둘째 아들은 비로소 진정한 둘째 아들로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 둘째 아들을 다시 받아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돈을 계산하지 않으시고, 시간을 계산하지 않으시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계산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랑의 관점으로만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깨달으면 넘어졌던 우리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으로 인해 우리가 또 용서받고, 또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넘어진 사람을 볼 때, “뭔가 잘못해서 넘어졌겠지. 그러니 대가를 치르는 것이 마땅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잘못해서 넘어진 사실도 다 알고 계시고,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손을 내밀어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심이 있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지기 전을 보지 않으시고, 일어나 다시 걸어갈 것을 보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넘어진 사실을 아시지요? 호언장담한 것에 비하면 너무도 쉽게 넘어졌던 베드로를 주님은 다시 찾아와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3일 후 부활하시어 영생을 선물로 주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넘어져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인간을 영생의 길로 일으켜 세워 걸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우 여러분, 본문 24절 말씀,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다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무디 목사님은 사랑스런 딸과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얘야, 길이 너무 미끄러우니 아빠가 너를 붙잡아 주마.” 그러나 딸은 고개를 흔들며 거절했습니다. “싫어요. 나도 걸을 수 있어요. 이것 보세요.” 싫다고 하는 딸의 의견을 존중하여 옆에서 걸어가면서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서 딸은 눈길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습니다. “그것 보렴. 아빠가 붙잡아준다고 하지 않았니?” 딸은 그제야 “아빠가 손가락 하나만 잡아줘도 갈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고 무디는 딸의 손가락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딸은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다시 눈길 위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보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이제는 꼭 잡아주세요.” 딸의 손을 꽉 붙잡은 아빠의 손은 딸이 넘어지려는 순간마다 바르게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이 딸처럼 자신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은 넘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나서야 하나님의 손을 찾습니다. 그 때가 돼서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넘어지는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좋지만 넘어진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손을 의지하여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언 4장 10절에서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10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11 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길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12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고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혜를 얻고 정직한 길로 다니므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반석위에 집을 짓게 합니다. 말씀 위에 설 때 넘어지지 않습니다. 유혹에 도, 욕심에도, 사람에게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말했습니다. “기도는 파선 당한 자에게 항구이며, 물에 빠져 가는 자에게 생명줄이며, 넘어지는 자에게 지팡이며, 가난한 자에게 보석이며, 병든 자에게 의사가 되며, 우리에게 축복의 길을 내며, 환란의 구름을 헤쳐 낸다.” 기도는 넘어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시도록 SOS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방법이며, 기도를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과 세력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말씀과 기도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길에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넘어진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넘어졌구나... 나도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구나...” 그리고 다른 사람이 넘어졌을 때, 자신도 넘어졌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넘어진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솝 우화 중 하나입니다.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장작을 한 짐 싣고 연못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귀 앞발이 미끄러져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좀 살려 주세요”하면서 물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이 가련한 나귀는 외쳤습니다. 나귀는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가 물에 빠져 일어서지도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물속에 있던 개구리들이 “원 어리석은 놈도 다 보겠군. 물에 약간 빠졌다고 저렇게 소동을 치다니. 우리는 항상 물속에서 사는데... 네가 이 물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무슨 소리를 할 테냐?” 물속에 사는 개구리가 물에 빠져 쩔쩔 매는 나귀를 나무라는 말입니다. 개구리는 자기들이 물속에 사니까 나귀도 자기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너무나 일방적인 판단입니다. “뭘 그것 가지고 그래?” 하지 말고 넘어진 사람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오락실에 가면 두저지 게임기가 있습니다. 그 두더지 게임은 정해진 시간에 올라오는 두더지를 망치로 때려서 못 올라오게 하는 게임입니다. 어떤 이는 두더지 게임의 망치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주위에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그들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망치를 휘둘러 다시 주저앉히고 넘어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은 아니겠지요?
  마태복음 18장 7절,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넘어지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내미신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떤 이유로 넘어졌습니까? 넘어져 있으면 그곳 밖에 못 봅니다. 넘어져 그냥 있으면 넘어진 그곳 주위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넘어져 다시 일어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는 일 밖에 없습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넘어져 신세 한탄만 하지 말고, 원망만 하지 말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절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다시 일어나려는 사람, 다시 회복하려는 사람, 희망을 다시 붙잡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굳게 서고, 넘어졌더라도 언제나 우리를 계산하지 않으시고, 넘치는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당당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08월 26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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