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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3452]
· 설교 일자 : 2012년 09월 16일
· 본문 말씀 : 빌립보서 1장 20-21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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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빌립보서 1장 20-21절)
  처녀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왜 아줌마가 되면 버스를 탈 때, 지하철을 탈 때, 빈자리가 나면 거의 총알처럼 날라 가 앉는 것일까요? 총각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아저씨가 되면, 배가 부르다고 허리띠를 풀러 바지 자크도 조금 내려서 허리부분을 벌리고 다니는 것일까요? 왜 할머니가 되면 아무데서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치마 속주머니에 돈을 넣거나 꺼내는 것일까요?
  뉴스를 보면 정치인들은 경찰에 불려가면서 카메라 앞에서 뻔뻔스럽게 웃으면서 여유를 보입니다. 들이대는 기자들의 마이크에 대고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들의 죄가 보도됩니다. 곧 죄가 밝혀지는 데 왜 그리 뻔뻔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범죄자들이 경찰들에게 잡혀 갈 때 보면, 그들은 백이면 백 윗옷을 거꾸로 뒤집어 머리를 덮어 얼굴을 가리고 잡혀 갑니다. 똑같이 잡혀 가는 것인데 왜 그렇게 다를까요?
  부끄러움을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서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으면서도, 범죄를 행했으면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느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이란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한 마음, 스스러움을 느끼어 수줍어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유난히 수줍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부끄러움이 많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의 큰 문제이며 골칫거리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각박해지고 어려운 것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도 어린 시절에는 부끄러움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점점 성장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는, 여성들이 집에 방문한 사람에게 ‘나 세수도 안 했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하지?’라고 말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그 여성이 세수를 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럴 때 보면, 부끄러움이란 외부에서 누가 부끄러움을 줘서 느낀다기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본래 태초의 사람은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리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부부로 맺어졌습니다. 그들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태초의 인간은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부끄러워할 그 무엇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난 후에,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고, 부끄러워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가릴 것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인류의 최초의 옷인 무화과 나무표 치마를 만들어 입고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지만, 몸을 가릴 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수치는 가릴 수 없었습니다. 사탄이 유혹했던 것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 한 후에 인간에게 찾아 든 최초의 감정은 부끄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하기 전에는 벌거벗었지만 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그들이 범죄 하기 전에는, 다시 말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몰랐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그 상태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선한 것만 알고, 선한 것만 보고, 선한 행위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하여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 순결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악을 알게 되고, 악을 행하게 되고, 선과 악이 부딪히며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자에게 성취감과 평안이 제공되지 않고 오히려 진실의 책임과 짙은 죄의식, 그리고 후회와 두려움만이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이래로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범죄 할 때, 인간이면 누구나 본성적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워야 사람이다]라는 책 제목이 있더군요. 제목 속에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부터 성현들이 부끄러움을 이야기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의의 실마리이고, 자아성찰의 한 모습이며, 자기 발전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사람은 부끄러워 할 줄 알고, 부끄러움이 필요한 동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고 동물과 다른 점은 부끄러움을 아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 부끄러워해야 할 행동을 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을 짐승이라고 말하고,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자각하는 자에겐 아직 인간의 고결함이 남아 있다.”고 시인 스위번은 말했습니다.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떨 때에 부끄러움을 느끼십니까?
  선한 행동, 올바른 행동, 의로운 행동을 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이란 선하지 못한 행동, 올바르지 못한 행동,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 부끄러워합니다.  
  그런데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다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행에 맞춰 다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지 못하고 나가면 창피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행과 관계없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도 다른 사람 앞에서 창피하거나 옷 때문에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행에 민감하여 유행하는 옷을 척척 잘 사 입고 다니면서 유행에 뒤 떨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창피를 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나 교양 있는 말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못 느낍니다. 정말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무엇일까요?

  부끄러워하는 기준이 바르게 있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바르게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부끄러워야 할 때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때 부끄러워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 도리를 배워 행하지 않음이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옛 성현은 말했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장 2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이 담긴 말씀입니까?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지혜 있다는 사람, 세상에서 강한 사람, 세상에서 뭣 좀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바른 생각, 바른 삶, 깨끗해진 삶,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른 생각, 바른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정을 통해 목표를 이루기만 하면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룬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늘날 돈이 제일이라는 황금만능주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고, 이 사회가 돈을 우상처럼 사랑하느라 사람의 인격과 도덕과 윤리, 사람의 생명조차도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돈을 위하여 부끄러운 짓을 하고서도 인면수심처럼 뻔뻔스럽게 활개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모아 겨우 겨우 마련한 돈을 집어 삼키고도 가증스런 얼굴을 하면서 두 다리 뻗고 잘 사는 인간들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비웃습니다. 무능력한 사람들이고, 세상의 성공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들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부끄러워할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할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승이요, 짐승만도 못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덮으려고만 하고, 그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딸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해 놓고도 계속 거짓을 덮으려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세계가 모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너희들이 한 짓이 전쟁시 다른 나라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위안부, 성노예로 삼은 비인륜적 죄야!”라고 말하는 데도, 증거가 없어서 아니라고 하고, 또 자국의 신문 전체에다가 대대적으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광고를 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라도 있습니다. 양심이 무디어지고, 양심을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양심이 불량한 사람, 양심 불량 국가는 미래가 없습니다.
  사람이 양심이 무디어지고,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이 되면, 부끄러움을 못 느낍니다. 양심은 한꺼번에 화인을 맞은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소리를 한 번 무시하고, 또 무시하고, 그렇게 반복되면 양심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양심에 털이 나고, 철판을 깔고, 양심은 더 이상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무엇엔가 중독이 되면 양심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부끄러운 짓을 위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으로 삽니다. 알콜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성 중독, 인터넷 중독 등에 중독되면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합니다. 여러분, 정신 바싹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중독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양심을 잃어버린 그들은 도덕 교육, 윤리 교육을 통해서, 예절 교육, 교양교육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훈련, 영성 훈련을 통해서 양심이 회복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가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인생의 목적과 진정한 행복을 위한 삶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양심이 회복이 되려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사람 중심에 양심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과 은혜가 임할 때,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것은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행한 부끄러운 일이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이 알고 계시든 말든 상관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어 모든 것에 편재하여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은 모른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수 자체보다 실수 이후가 중요합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죄를 지었으면, 죄를 짓고 난 후가 중요합니다. 실수하고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짓고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부끄러운 것은 실수와 잘못과 죄를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변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로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책임을 전가시켜 자신은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에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저질러 놓고 소위 잠수를 탑니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요.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사라지면 자신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래, 난 원래 그런 놈이다! 어쩔래?”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옵니다. 자신은 그런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생각지도 느끼지도 않는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양심이 살아있다면,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실수와 잘못과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다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돌이켜야 합니다. 죄를 지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새로워집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자신과 민족의 죄 때문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고 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과 죄 때문에 부끄러워하며 회개할 때, 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 죄를 용서해주시는 은혜, 회복케 하시는 은혜, 새롭게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기회요, 은혜 받을 기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출발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회개와 변화가 없는 이들에게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책망과 진노와 형벌이 있을 뿐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고 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때로는 긍휼하심으로, 때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때로는 참고 인내하심으로, 그리고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씀이 나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뜨거운 입김의 분노를 쏟아내는 듯한 말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23장 1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라고 말씀하시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다”고, 그러다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온유하고 긍휼히 넘치시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강하게 책망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지도 않았고, 백성들을 잘못 이끌고 가는 것에 대해 책망하시는 말씀을 듣고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회개도, 변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고, 예수님께 나아와 회개와 사죄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끄러움을 대신 당하시고 부끄러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 말씀 따라 살아갈 때,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는 확신을 가지고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짓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서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깨달았고,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회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자신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의 뜻은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들이 부끄러워 할 일이라고 여겼지만 자신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 사도 바울의 처지가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유대인들의 공격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잡혀 죄수로서 심문 받고 또 심문을 받으며 로마로 압송되어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수라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도로써,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서 열심히 사역할 때, 시기하고, 비방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일까요? 어디에 근거한 당당함일까요? 바울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장 16절 말씀입니다. 또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 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없고, 이 복음과 십자가의 도를 위해 자신이 당한 모든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욱 강하게 하고, 소망을 굳게 붙잡게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을 주시는 복음을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도를 따라 부끄러워할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마가복음 8장 38절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못하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했습니다. 자신 지은 죄에 대해,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죄인 중의 괴수 노릇을 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자신의 과거의 허물을 다 덮어주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는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부끄러운 삶이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처럼 주님 안에서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맹자의 군자삼락이 있스비다. 양친이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부끄러워 할 줄 안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시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양심이 살아 있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싫어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건강한 사회, 성숙한 사회는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고, 부끄러워지지 않으려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부끄러움을 못 느낀다면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짖 밟힐 뿐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 안에서 어떤 것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2012년 09월 16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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