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교훈 (마태복음 21장 18-22절) |
여러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솝 우화입니다.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는 매우 빨랐고, 거북이는 매우 느렸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거북이를 느림보라고 놀려대자, 거북이는 토끼에게 달리기 경주를 제안하였습니다. 경주를 시작한 토끼는 거북이가 한참 뒤진 것을 보고 안심을 하고 중간에 낮잠을 잤습니다. 그 사이에 거북이는 열심히 달려 토끼를 이겼고, 뒤늦게 잠에서 깬 토끼는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변형한 유머가 있습니다. 거북이에게 경주를 진 토끼는 나름대로 작전을 세워 다시 경주를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토끼는 경주 전날 잠도 푹 자고, 지난번처럼 혹시 잠이 올지 모르니 패배하지 않으려고 잠 안 오는 약까지 챙겨 먹었습니다. 드디어 경주를 했습니다. 토끼가 거북이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큰 거리 차이를 두고 승리를 했습니다. 토끼는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경기 후 경기 심판들로부터 금지약물복용 테스트를 하게 되어, 잠 안 오는 약을 먹은 것 때문에 실격처리가 되었습니다. 토끼는 다시 거북이에게 실격패를 당했다는 유머입니다.
원작 이솝 이야기로 돌아가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 토끼의 패배 원인은 무엇입니까? 경기 중에 잠을 잔 것이 문제였습니다. 왜 잠을 잤습니까? 졸려서요? 토끼는 자신이 경주중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북이를 우습게 알았습니다. 거북이쯤은 내가 잠 잘 것을 다 자도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 안이함, 성실함 부족이 토끼의 문제입니다. 이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실하지 않고, 자만심과 안이함에 빠지게 되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달리기 경주를 하는 사람이 도중에 잠을 자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은 영적인 잠에 빠져 영적인 경주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마지막 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 성 밖으로 나와 베다니 동네에서 하룻밤을 지내신 예수님은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8km 떨어진 곳으로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가 사는 동네입니다. 아마도 그 집에서 묵으셨을 것입니다. 성으로 들어오시는 길에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동네가 가난한 동네인지라,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시장하신 예수님은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 무화과나무가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는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랬더니 그 나무가 곧 말라 죽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먹는 것 때문에 화가 치밀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는 것 때문에 토라지시거나, 먹는 것을 찾아 식도락가처럼 돌아다니거나, 먹을 것을 못 먹었을 때 쉽게 화를 내신 분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가르치실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의 첫 번째 교훈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 12-17절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뜰 한쪽에서 동전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과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휘두르시며 그들의 상을 둘러엎으시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사장, 서기관, 기타 지도자들이 성전을 이용하여 오히려 돈을 벌고,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고, 그것을 방치했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종교적 의식에는 번창하고 그럴 듯했지만 참 신앙의 열매가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유대교 지도자를 일차로 비유하여 교훈하시지만,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불모지와 같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영적 경주를 포기한 사람들 같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잠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저주라는 충격적인 교훈을 주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즉시 메말라 죽은 것을 보고 제자들이 이상히 여겨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이렇게 메말라 죽을 수가 있습니까?” 그들의 의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21, 22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하여 두 번째 교훈을 주셨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심판의 주제에서 믿음의 주제로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권면하십니다. 유대교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열매 없는 유대교 지도자나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심판의 날에 견디지 못할 신앙인이 되지 말고, 믿음으로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믿고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리하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열매를 맺지 않는 신앙인들은 정신을 차리라는 뜻입니다. 잎만 무성한 종교, 이름뿐인 종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신앙인, 내용은 없고 형식만 갖춘 신앙생활은 지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를 받지 않으려거든 깨어나라, 정신을 차려라, 새로워지라는 뜻입니다. 그 방법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무화과나무 사건의 교훈은 단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이렇게 된다는 심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믿음으로 살라,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심판의 끝만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사건입니다. 율법적으로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살라는 뜻이 아니라 복음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시는 사건이며, 교훈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믿음을 잃어버리면, 경주하다가 잠을 잔 토끼처럼, 영적인 잠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는 반드시 패배한다,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니 믿음을 회복하고, 그 믿음을 사용해라!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사랑입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라고 깨달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생명이 태어나야 한 생명의 삶이 이 땅에서 시작되듯,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새 생명의 삶,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물론 다른 종교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신, 그들이 믿는 교리나 교주가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이라는 말은 ‘복종’이라는 뜻입니다. 이슬람교 신자를 무슬림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복종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슬람교는 신에게 절대 복종을 강조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힌두교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많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물론 기독교는 사랑도 강조하고, 다른 덕목들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와 다른 특징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 영생을 얻는 방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감정적인 믿음, 마음속에 있는 믿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은 마음속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마음으로 믿어져야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마음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밖으로 표현되고, 행해져야 합니다. 그 믿음이 말로 표현되고, 행동으로 표현되고,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으로 살 것을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인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의식주라고 합니다. 옷, 먹거리, 집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의식주보다 더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호흡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호흡을 통해 공급된 산소가 심장으로 들어가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운반됩니다. 호흡은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제일 먼저 확인하는 방법은 코에다 손을 대어 보거나 귀를 대어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숨을 쉬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생명도 유지되고 활동하려면 영적 호흡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호흡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호흡이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지듯이, 영적인 호흡은 날숨 즉 하나님께 고백하고, 찬양하고, 간구하는 것과, 들숨 즉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영적인 대화요, 영적인 교제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는 기도가 필요 없었습니다. 곧바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죄 때문에 단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려면 단절된 관계를 이어줄 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관계적인 것입니다. 한 존재와 다른 존재의 관계를 연결해 주고,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은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이 믿음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이 믿음으로 살면서 기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이 믿음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고, 어떻게 능력을 행하셨고,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설명하면,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게 기도해라! 와서 나와 함께 대화하자. 와서 나와 함께 상의해라. 나는 너를 위해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내 뜻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예레미야 29장 11-13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나의 생각은 너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아니다. 평안을 주려는 것이다. 너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내게 기도해라, 그러면 너에게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주겠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냈을 때, 그가 너희들에게 본을 보이지 않았느냐? 기도를 본 보였지 않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새벽 미명에도 기도했고, 조용한 곳을 찾아가 기도했고, 기적을 행하기 전에 기도했고, 기적을 행한 후에 감사 기도했고, 지속적으로 나와 대화하고 교제하기 위해 기도했지 않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내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었다. 내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을 주었다. 내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왜 사용하지 않느냐?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부모에게 전화 한 통화하지 않는 자식처럼, 왜 내게 기도하지 않느냐? 고작 밥 먹기 전에 고개 까닥하며 기도하는 것이 전부냐? 교회에 나와서 주일예배의 기도 시간에 기도하는 것이 전부냐? 그것도 기도가 길어지면 반은 졸다가 아멘 소리에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기도의 전부냐? 아주 다급하지 않으면 도통 기도하지 않는 그 배짱, 그 여유, 그 느긋함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그 교만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네 목소리를 듣고 싶다. 네 입을 열어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지은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고 정결하게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네 기도 소리를 듣고 싶다. 긍휼과 은혜를 갈망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다. 네가 진정으로 날 하나님으로 믿고, 나에게 도움을 구하는 간구소리를 듣고 싶다. 나는 네 맘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 뒤 늦게 수습해달라고 울부짖는 기도보다, 먼저 나와 상의하고, 먼저 내 뜻을 묻고, 먼저 지혜를 달라고 구하고, 먼저 기도로 준비하는 네 기도 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네 말만 쏟아놓고 바삐 가버리는 기도 소리보다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고, 나의 응답에 민감해 하고, 내 뜻을 분별하려고 하고, 나에게 모든 주권을 온전히 맡기는 너의 기도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너무 기쁘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받아들이고, 내가 너희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너와 함께 네 인생을 동행하고 인도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제발 알았으면 좋겠다. 너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면 좋겠다. 너를 통해 이 땅에서 소중한 나의 일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것을 믿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너는 진정한 열매 맺는 나무가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간절히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고 있습니까? 깨닫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믿음은 기도함으로 나타납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이 아들에게 전화하여 “아들아, 옆집 누구네 집은 새 텔레비 놨드라, 잘 나오더라. 우리는 괜찮다! 동네 누구네 집도 샀드라. 사달라는 거 아니니 부담 갖지 마라” 이랬더니 얼마 후 아들에게로부터 3D 텔레비전이 도착했습니다. 가전제품 회사 기사가 와서 포장을 풀고 안방에다가 설치를 해 주고 갔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우리 집에 효자 아들이 글쎄 내가 이야기도 하기 전에 3D 텔레비를 보냈지 뭐야! 그 텔레비전이 3D인데, 안경을 쓰고 보면 입체로 보이는 텔레비야! 돈도 많이 줬대.”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왔습니다. 분명 기사가 와서 설치해 줄 때는 나왔는데 아무리 리모콘을 눌러도 화면이 까맣습니다.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습니다. 실컷 자랑한 할아버지는 당황해합니다. 그때 한 젊은 동네 사람이 소리칩니다. “텔레비전 코드를 뽑아놓았네요.” 할머니가 전기 아낀다고 빼놓았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그렇게 효자 아들이 보내준 좋은 텔레비전, 비싼 텔레비전, 입체로 보이는 텔레비전이라고 할지라도 플러그를 콘센트에서 빼놓으면, 텔레비전은 나오지 않습니다. 화면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흐르는 전기와 텔레비전이 연결되려면 전기코드를 콘센트에 꽂아야 하듯이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 기도라는 영적 전기 코드를 꽂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무리 있어도 그 믿음을 사용하지 않으면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시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으시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를 위한 우리의 요청, 우리의 바램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을 위한 요청과 바램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양정지하철 역 2번 출구 쪽에는 과일과 야채를 파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지나다니다 보면, 그 할아버지는 과일과 야채를 펴 놓고는 장기 두고 있습니다. 누가 지나가면서 집어가도 모를 정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과일과 야채를 길거리에 죽 늘어놓고서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배짱이 좋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자기가 책임을 지는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팔아도 자기가 팔고, 못 팔아도 자기 물건을 못 파는 것이고, 밑져도 자기가 밑지고, 남아도 자기가 남는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하고 상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내가 혼자 결정하고 내가 모든 것을 책임을 지고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이냐? 뭔가를 새롭게 해야 하고, 도움이 필요하고, 내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내 인생 내가 책임지고,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목표한 대로, 내 뜻대로 성취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께 보고 드리고,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께 허락 받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이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어리석음과 정결치 못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상의 드리고, 간구하십시오.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에서 토끼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거북이쯤은 이길 수 있다고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자만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자신의 신앙에 대해 자만한 나머지 토끼처럼 영적인 잠에 빠져있는 줄도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신앙 내가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줄어들고 있고, 복음적인 신앙이 흐트러지고 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우 여러분,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믿음으로 말하고 있는가?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믿음으로 봉사하는가?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의 미래가 걱정이 됩니까? 염려되십니까? 불안하십니까? 두렵습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답답하십니까? 낙심되셨습니까?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허공에다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의 현재의 모습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걱정의 중심이 본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걱정 해결의 중심이 본인으로부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깨어나십시오.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우리 교회가 걱정이 되고, 우리나라가 걱정이 되고, 여러분의 사업이 걱정이 되고, 여러분의 가정이 걱정이 되고, 여러분의 자녀가 걱정이 된다면 기도부터 시작하십시오.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출발이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믿음의 사다리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날개입니다. 땅의 세계만 보고 살지 않고, 하늘의 신령한 세계로 올라갈 수 있고, 하늘의 관점으로 땅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믿음의 날개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수도관입니다. 수도관이 막히거나 깨지면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기도가 막히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은혜가 공급되지 못합니다.
교우 여러분,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하여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열매가 없다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사용하지 않고, 영적인 잠에 깊이 빠진 여러분들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호흡을 멈춘 우리들에게 영적인 숨을 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을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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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4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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