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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  [3435]
· 설교 일자 : 2012년 10월 21일
· 본문 말씀 : 요한복음 6장 41-51절
· 설교 :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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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 (요한복음 6장 41-51절)
  지난 수요일에 말하면 잘 아는 교회 목사님 두 분과 함께 복국 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면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쯤에 한 목사님은 구토가 나고, 오한이 나서 먹은 것을 다 토하고, 저녁에 수요기도회 설교도 부목사에게 맡길 정도로 고생을 했다고 하면서 카톡으로 신 목사는 괜찮으냐고 묻는 문자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목사님도 그날 저녁 다른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해야 하는데, 역시 구토가 나고, 설사에다가 오한이 나서 고생 고생하다가 겨우 부흥회 직전에 구토, 설사가 멈추어서 강단에 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가면서 그 소식을 들은 저는 괜히 몸이 이상한 것 같고, 나도 혹시 구토나 오한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또 목요일 아침에 기온이 많이 내려갔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몸이 약간 으실으실하고, 몸살기가 있는 것 같고, 속도 약간 메스꺼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잘 버티어 냈습니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암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강사는 자신의 딸이 고등학교 때 암에 걸려 투병했었고, 결국 세상을 먼저 떠났다는 말을 하면서, 암을 예방하는 방법을 말했습니다. 우리 몸이 암에 걸리지 않을 수 있으려면, 세 가지를 노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좋은 음식 즉 웰빙 먹거리입니다. 둘째는 좋은 환경입니다. 여기서 환경은 외적 환경뿐만 아니라 내적 환경을 포함합니다. 외적 환경이란 자연환경 즉 좋은 공기, 오염이 덜 된 환경을 말하고, 내적 환경이란 우리 마음의 환경입니다. 마음의 어둡고, 부정적이고, 불평, 원망, 열등의식, 분노, 미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 몸은 그런 내적 환경 속에서 건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좋은 생활 습관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 좋은 환경에서 살더라도 생활습관이 잘못 되어 있으면, 건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제일 기초적인 것이 첫 번째 음식입니다. 먹거리를 말합니다. 우리 몸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어떤 음식이냐에 따라 그 결과는 건강으로 나타납니다. 건강하기 위해서 좋은 음식은 아주 중요한 기초입니다.
  지난주에 우리의 생명이 활동을 하려면 호흡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호흡이 멈추면 죽습니다. 호흡은 생명 유지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호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영양분입니다. 필요한 영양분이 음식을 통해서 몸 안으로 들어와야 몸이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활동할 수 있고, 건강한 생명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호흡이 중요하고, 그리고 영적인 양식을 제대로 먹어야 건강한 신앙, 성장하는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음식, 양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속해있는 요한복음 6장은 배고픈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배고픈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는 예수님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년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도시락으로 오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있은 다음 날, 군중들은 다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의 숨겨진 동기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가난한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한 번 더 배부른 식사를 얻어먹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배고픈 사람들에게 배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그들에게 주시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더 중요하게 여겼어야 할 다른 양식이 있었습니다.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입니다. 그래서 6장 전체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공급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말씀의 내용이 바로 그 중심 내용입니다. 47절부터 5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생명의 떡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문학적 표현 방법 중에 제유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직유법, 은유법 등과 같은 표현 방법입니다. 직유법은 “보름달 같은 내 얼굴” 보름달에 직접 내 얼굴을 비유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은유법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는 표현과 같이 은은하게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유법이란 부분적인 것으로 전체를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일손이 부족하다’라고 말할 때처럼 손이라는 신체의 한 부분으로 사람 전체를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일하는 손이 부족하다는 뜻이 손만 부족한 것이 아니고 일 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한 것을 일손이라고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밥 먹었냐?”고 묻는 표현은 밥만 먹었느냐는 말이 아니지요. 밥상에는 밥도 있고 반찬도 있고 국도 있고 잔칫상에는 떡도 있습니다. 밥이라는 말로 “밥 먹었냐?”고 묻는 표현은 음식, 식사, 먹거리, 끼니를 표현하는 표현입니다. 국수 먹은 사람은 “밥 먹었냐?”는 질문에 안 먹었다고 대답하지는 않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떡이라는 표현이 바로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제유법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수사법에서 제유법이라는 표현 방법을 사용하여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 자신을 “떡”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단순히 떡 만을 의미하지 않고 음식, 양식, 먹거리를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40일 밤낮으로 금식하셨습니다. 금식 후 마귀가 와서 예수님보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에서도 떡은 단순히 떡만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뜻이라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밥도 있어야 하고, 국도 있어야 하고, 반찬도 있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씀해야 문장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먹는 양식, 먹는 먹거리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 말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는 말씀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의 뜻을 잘못 오해하여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일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만을 위해서 일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의 뜻과 같은 뜻입니다. 몸에 필요하여 먹는 양식도 필요하지만, 생명을 얻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기 위해서 힘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시고, 생명의 떡이시라는 뜻은 예수님을 생명 주시는 분으로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약속의 말씀을 먹어야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이 건강하고 풍성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지 않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신앙이 굳건하지 않고 자꾸 흔들리고 약해집니까? 혹시 여러분의 영혼이 건강하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영혼이 작은 일에도 힘들어하고, 고난과 시련과 환난을 당했을 때, 힘을 쓰지 못합니까?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지 못하여 영혼이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 영혼 안에 믿음이 생겨날까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나요?”라고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입니다. 믿음의 근원이신 성령님은 한 가지 수단을 사용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 수단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의 막연한 추측과 상상과 탐색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믿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자꾸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또한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히 있지 않는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충만한 것 같지만 성령충만이 지속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으니 마음이 성령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졌겠지요. 또 마음 가득 성령님 생각으로 가득 찼겠지요. 또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충만히 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충만히 있지 않으면 성령충만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으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능력을 믿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씀과 죄를 죄로 깨닫고 죄를 이기도록 하는 말씀을 붙잡고 살 때 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고 거짓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 때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역시 “하나님 말씀으로!”입니다.
우리가 만난 고난과 시련과 환난을 이길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역시 “하나님 말씀으로!”입니다.
  지난 9월에 우리나라를 관통하고 지나간 태풍 산바의 피해는 몹시 컸습니다. 그 피해 지역의 모습이 보도된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 못해 처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피해 중 과수원의 피해를 보니까 사과나무가 뿌리 채 뽑히거나 부러져 넘어진 곳도 많았습니다. 과수원 주인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태풍에 가지가 부러지거나 과일이 떨어지는 정도는 그냥 그 해의 수확만 피해를 입는데, 뿌리 채 뽑히거나 하면 나무를 다시 세워 뿌리를 땅에 다시 심어도 몇 년간 과일을 잘 맺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 채 뽑혀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이 박혀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이 넓게 뻗어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신앙의 뿌리가 쉽게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페이슨 프렌티스 여사는 27살에 조지 루이스 프렌티스 목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프렌티스 여사는 결혼한지 11년 되던 해인 1856년, 당시 유행했던 무서운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게 되었는데, 평소 병마와 싸우고 있던 그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병약자로서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믿음의 힘으로 승리하여야 한다는 것도 힘겨운 일이었던 그녀에게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은 슬픔은 진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관하여 이해해 보려고도 하였으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남편에게 “여보,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비참한 일이 왜 하필이면 우리 가정에 닥쳐야만 한단 말이죠?”라고 물었습니다. 남편 목사님은 “전염병에 사랑하는 어린 아이들을 잃은 가정이 너무도 많은데, 이와 같은 일이 우리라고 닥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소? 하나님께서 편애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잖소?”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프랜티스 목사 부부는 아이들의 묘를 다녀와서 프렌티스 여사가 슬픔에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어려움에 직면해 낙심하고 있을 때 우리를 더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마치 어린 자식들이 아프거나 괴로움과 번민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더 측은히 여기고 더 사랑하게 되듯 말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지 않소?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며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고 연단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이 기회가 우리에게는 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소?” 하며 아내를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프랜티스 여사에게 그토록 자식들을 사랑하던 남편이 자기가 느끼는 아픔보다 몇 십 배 클 텐데 신앙으로 승리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너무나 처절하게 보였습니다.
  늦은 시간에 심방을 다녀오겠다며 나가는 남편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던 프렌티스 여사는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펼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에 있는 얍복강 가에 이르러 외로움에 쌓여 홀로 서 있던 야곱에 관한 말씀을 보면서 야곱의 모습이 환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마음이 크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야곱의 모습이 현재 자신의 모습과 같아 보였습니다. 프렌티스 여사는 야곱이 그 쓸쓸하고 고독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어 새 출발한 것 같은 경험이 자신의 경험이 되기를 바라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마음은 변화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던 생각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식을 잃고 몇 주간을 보내다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귀한 위로를 받은 프렌티스 여사는 시를 써나갔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 이전에 세상 낙 기뻤어도 /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 본래 4절까지 가사인데, 우리 찬송에는 가사 한절이 빠졌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슬픔이 그의 일 하게 하시고 / 비애와 아픔 보내게 하소서...” 프랜티스 목사 부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슬픔과 괴로움과 환난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환난의 태풍을 견디어 내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담아야 합니다. 신앙이 건강해 지고 싶습니까? 변화되고 싶습니까? 회복되고 싶습니까? 치유되고 싶습니까? 개혁되길 기대하십니까?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또한 기독교 역사에 기록된 부흥, 개혁, 회복, 변화, 치유, 기적 등을 보면, 그것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잊어버렸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들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결단하였을 때, 부흥과 개혁, 회복과 변화, 치유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 운동도,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도 하나님 말씀을 되찾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치며 종교 개혁 운동이 일으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경회에서 회개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메마른 영혼과 식어진 열정이 영적 부흥과 살아있는 신앙생활으로 바뀌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에서 갖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생명의 떡으로 매일 열심히 먹고, 말씀 따라 살려고 하지 않는 한, 프로그램은 그냥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행사는 행사일 뿐입니다.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봉사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힘을 얻어 봉사할 때 신앙이 성숙해 집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고치고 변화시킵니다.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교우 여러분,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묵상할 때, 성령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읽고 듣고 묵상하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셔야 깨달아 지고, 믿어지고, 은혜가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으십시오. 이것이 복음적인 자세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적으로만 읽으면, 또는 율법적으로만 읽으면, 성경 말씀에서 ~ 해라, ~ 하지 마라는 계명과 말씀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부담되고 짐이 되는지 모릅니다. 복음적인 자세로 성경을 읽는다는 말은 성경의 말씀을 복음으로 읽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으로 읽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사랑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읽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읽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으면 이해가 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또한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역사합니다.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담대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게 하고, 시련과 환난을 이기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를 깨달아 신앙을 더욱 성숙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게 합니다.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교우 여러분, 지난주에 이어 신앙의 기본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기초부터 다시 세워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웰빙 먹거리를 먹어야 합니다. 건강의 기초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삶으로 주신 구원의 말씀,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 우리를 살리는 말씀을 열심히 영의 양식으로 먹어야 합니다. 기본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예배시 설교를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마시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떡을 영의 양식으로 먹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12년 10월 21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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