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사자 (말라기 3장 1-6절) |
한 여인이 여섯 살 된 어린 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때부터 모든 의욕을 잃고 두문불출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옆집에 사는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 음식 한 접시를 주며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가져다 드리고 와라.” “왜요?” “그 아줌마가 지금 몹시 슬퍼서 누워만 계시단다.” “왜요?” “얼마 전에 사랑하는 딸을 잃어서 그 마음에 몹시 큰 상처를 입었거든,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딸은 엄마가 주는 음식을 가지고 가면서 한 가지를 더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낙담하고 좌절해 있는 그 옆집 아주머니한테 음식을 드리면서 일회용 반창고도 함께 내밀었습니다. “아주머니,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아주머니가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으셨대요. 이 반창고를 그 상처에 붙이세요. 그러면 나으실거예요.” 그 부인은 그렇게 말하는 아이를 껴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반창고를 죽은 딸의 사진 옆에 끼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보고 싶을 때마다 사진을 보면서 그 반창고도 함께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새 힘을 내어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채워져야 할 빈자리를 사랑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발버둥 칩니다. 돈으로, 술로, 도박, 마약, 각종 중독현상이 그래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야 합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영혼이 곤비해집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고, 똑똑해 보이고, 성공하는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은 허무하고, 방황하며,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메시야 예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 즉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오히려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되묻고, 하나님께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들과 이방나라와 물질적인 비교만으로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실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 1절에서 말하는 ‘내 사자’ ‘언약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언약의 사자로 부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랑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본문 2,3절에는 메시야, 즉 구세주가 오시면 하실 일을 말씀하였습니다.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연단하는 자의 불’이란 광산에서 광석을 캐어 용광로에 넣고 불을 가열하여 광석을 녹여서 그 속에 있던 불순물을 제거하고 100% 순수 금속을 얻게 하는 불과 같은 분이시며, ‘표백하는 자의 잿물’이란 빨래를 세탁할 때에 사용되었던 물질로써 요즘으로 말하면 빨래의 오염된 것을 제거하는 강력한 세제를 뜻합니다.
언약의 사자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깨끗케 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천사가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에게 꿈속에 나타나서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한 내용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이름 ‘예수’는 구약의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헬라식 이름으로 표기한 이름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정리하면,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질적인 복과 번영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자 메시야를 보내시어 깨끗하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물질의 복이 임하면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인간 문제의 모든 해결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해결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다줍니다. 죄는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 마음속에 죄책감을 갖게 합니다. 죄를 지은 후에 수치심을 갖게 합니다. 죄는 우리 영혼에 불안을 느끼게 합니다. 죄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서 우리의 감정과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양심을 무디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해결되지 않은 죄는 우리를 지배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어버립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깨뜨립니다. 사탄은 죄를 이용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공격하고, 지배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죄라는 것을 범죄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죄를 말하면, 범죄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범죄는 누가 누구에게 법적인 죄를 범하는 죄를 말합니다. 폭력, 간음, 살인, 도둑질, 사기 등과 같은 범죄를 죄로 여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훨씬 포괄적이고 광범위합니다. 훨씬 더 심층적입니다. 도덕적, 윤리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죄까지를 포함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 다른 사람에게 욕한 것, 교만한 것, 위선, 험담하는 것, 중상 모략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 자신을 저주하는 것, 자기 생명을 자신이 끊는 것, 이것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런 죄는 생명의 주인을 향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그리고 이 세상을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도 않고 지키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게 되겠지요. 그러니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시고, 특별히 사람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는 이 말은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 말은 “당신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존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지에 상관없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담아 당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당신이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실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해야 하며,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사랑을 깨닫고 받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와이군도 중 북서쪽 끝에 둘레가 50킬로미터쯤 되고, 인구는 3만 명에 불과한 카우아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섬이라고 합니다. 카우아이섬은 환상적인 대자연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천국 같은 섬이지만, 1950년대만 해도 이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콜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습니다. 학교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청소년 비행도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섬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마치 불행한 삶을 예약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섬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다양한 계층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1954년 미국 본토로부터 소아과의사, 정신과의사, 사회복지사,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진 일군의 학자들이 절망과 좌절로 가득 찬 이 섬에 도착했습니다. 훗날 사회과학의 역사상 가장 야심 찬 연구 중 하나로 기록될 카우아이 섬 종단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종단연구란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연구 대상자를 계속 추적 조사하는 연구를 말합니다. 이 연구자들은 1955년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나는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해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하였습니다. 카우아이 섬이 연구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열악한 사회경제적 환경과 인구유동이 적은 하나의 닫힌 세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55년 태어난 833명의 아이를 대상으로 시작된 연구는 그들이 30세가 넘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연구가 계속되었습니다. 무려 90%에 가까운 698명이 조사 대상으로 끝까지 남았습니다.
카우아이 섬의 연구자들은 어떠한 요인들이 한 인간을 사회적 부적응자로 만들며 그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끄는가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어릴 적의 어떠한 경험이나 사건들이 훗날 질병, 성격적인 결함, 사회적 부적응, 무능력, 우울증, 정신질환, 범죄 등을 유발시키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얻은 연구 결과는 그러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수록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기 힘 들었으며, 부모의 성격이나 정신 건강에 결함이 있을 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 부모와의 관계나 동료와의 관계가 좋은 아이일수록 자율성과 자기 효능감도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결과에 흡족하지 않았던 에미 워너라는 심리학자는 이 방대한 자료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무언가 더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 연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소위 고위험군에 속하는 201명 중에 72명에 관한 결과였습니다. 여기서 고위험군이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다른 집단에 비해 훨씬 더 학교생활에 부적응과 학습장애를 보였고, 학교와 집에서 여러 가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커서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상당수가 소년원에 들락거리고, 정신질환을 앓거나, 미혼모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명의 고위험군에 속한 아이들 가운데 72명은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존감을 길러가며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우게 된 것입니다. 극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 자존감이 높게 형성되어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존감이란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이 자존감은 어려운 순간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자기 스스로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하지만, 그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지닙니다. 자존심은 비교에 의해서 갖는 만족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존심을 먼저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자존감이 낮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무턱대로 자존심만 내세우지 않고, 부족하고 인정하기 싫은 부분까지 자신의 일부로 맏아들이며 있는 대로 수용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갖게 해줍니다.
사람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한 사람을 어려운 환경에서도 바르게 일어서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닫고 받아 누린다면 그야말로 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아직도 자존심 때문에 신앙생활이 흔들리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고 하면 신앙의 본질, 복음의 핵심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자아가 깨지지 않았다, 온전히 새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옛 자아가 아직 온전히 죽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한 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나만의 특별한 가치가 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내가 존귀한 자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셨고,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 확신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가치와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신앙이 시작되면 신앙은 변질되고, 신앙은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지 않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그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나 가슴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어떤 처지에서도 인정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잊었고,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이 무너지고, 영적인 고갈이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고, 희망 없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혈통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설명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스스로 존귀한 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지 않으면 절대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자신의 존귀한 존재라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이 좋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존감이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 지적하는 말, 비판, 책망하는 말을 들을 때,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입니다. 누구에게 말을 들으면 잘 삐끼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말한 마디를 들으면 자신의 가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 삐끼고, 툭하면 상처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교수이자 정신건강 상담사인 조세핀 킴은 우리나라 교포입니다. 그는 오랜 연구와 수많은 상담, 강연 등을 통해 아이들의 내면을 건강하게 키우는 핵심이 자아존중감, 즉 자존감이라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EBS, KBS 방송 등에 출연해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왔습니다. 그중에 낮은 자존감으로 자살을 시도한 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세핀 킴 교수는 이들에게서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실수나 잘못이나 단점을 지적을 받아도 “땡큐”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얼굴을 붉히거나 자존심 상해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오히려 쓴소리를 해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약점을 드러내지 않거나, 공부 좀 하면 자존심이 강해서 지적을 당하지 않으려고 민감한 우리나라 학생들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둘째는 힘들 때는 기꺼이 도움을 청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한답니다. 하버드 대학생들은 자신의 삶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삶도 소중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걸 인식하고 늘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똑똑하거나 공부를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 중심에 있는 자존감은 언제나 자신을 더욱 발전시키고 성숙시키는 것이라면 잘못이나 허물이 드러나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고쳐나가려고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신앙의 자세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주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천국시민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누구나 ‘공사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허물이 들춰지고, 실수가 드러나고, 잘못이 밝혀지는 것, 죄가 드러나는 것, 죄를 지적당하고, 책망을 듣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덮어두려고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숨기려고 하는 것이 창피한 일입니다. 책망을 듣는 것을 자신을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진정한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최종목적지 천국에 들어가야지요.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나의 모습, 나를 창조하여 생명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신 목적, 나를 향한 계획, 내 삶에 가지고 계신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새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날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 중에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우리 마음속에 모셔야 하는지를 깨닫고 다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날마다 범하는 죄를 정결케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새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참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여 살도록, 창조 때의 본래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언약의 사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울증이 생깁니까? 왜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삽니까? 왜 헛된 것에 집착하고 버리지 못할까요? 왜 행복을 주지 못하는 다른 것으로 행복을 만들려고 합니까? 왜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왜 쉽게 낙심하고 좌절합니까?
온 천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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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02일
신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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